special issue | 언어의 감도(感度)

김수련의 일상의 철학

나는 해체한다 언어의 언어성을

글 : 김수련 

벨기에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소설 《앙테크리스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언어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실존적인 인간인가?”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의 문장이었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나는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 삶이 언어를 이끌어야지, 언어가 삶을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요즈음 나의 삶과 생각이 ‘언어(활자)’에 갇혀버리는 것만 같아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첫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얼마나 기쁘냐고. 그런데 솔직히 그렇지가 않았다. 내 안에서 꿈틀대며 생동하던 것이 지면을 통해 언어화되면서 활자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내게 ‘언어’는 수단이었다. 무형의 느낌과 생각들을 형상화하기 위해 ‘언어’를 빌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말’이나 ‘활자’를 통해 그것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를 종종 대면하게 된다.

나는 집에 개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개는 언제나 서로의 엉덩이 냄새를 맡으려고 쫓아다닌다. 어미 아띠는 제 아들 레오가 깨깽 거리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제일 먼저 항문 냄새부터 맡는다. 레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다. 누군가 개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달아놓고 촬영했더니 찍힌 것은 온통 다른 개의 엉덩이뿐이라고 했다. 개는 항문을 통해 나오는 냄새로 상대의 기분과 상태를 파악하고 소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그 냄새는 일종의 언어인 셈이다.

이렇게 ‘언어’라고 칭하는 것 외에도 소통하는 것들이 많다.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서, 벌꿀은 몸짓을 통해서 말로 하지 않아도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전달한다. 어쩌면 인간은 비언어적인 능력이 발달되지 않아 굳이 언어로만 소통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하게 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언어 능력이 발달해서 자신이 느끼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을 언어로 발설하면서 그것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찰리 채플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적게 느낀다.(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그는 그렇게 무성영화로 훨씬 많은 것을 전달한다.

누군가가 “앗 뜨거워”라는 말을 내뱉으면, 대상을 느끼기 전에 ‘뜨겁다’라는 단어를 통해 그것이 뜨겁다고 느끼게 된다. 내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도 전에, ‘슬프다’라는 단어로 그 기분을 정의하면 그 순간 슬픔에 빠지게 된다. 수많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펼쳐보면 단지 슬프다는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치밀하게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늘 표면으로 가장 두드러지거나, 혹은 이런 상황에 적확하다고 여기는 언어로 그 기분을 정의해버리면서 단순화한다.

오래전 학생이었을 때, 한 대학원생이 지도교수님에게 여쭸다.

“교수님, 요즘은 어떤 공부를 하시나요?”

그 노교수님은 버럭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아니, 교수한테 ‘공부’라는 단어를 쓰냐?”

아마도 ‘공부’라는 단어보다는 ‘연구’라는 단어가 교수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옆에 있던 내가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취지를 봐야지, 표현된 단어에만 집착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어린 학생의 이런 말이 다소 건방져 보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 교수님께 살짝 실망했다.

부러울 정도로 멋진 문장을 쓰는 작가를 직접 만났을 때 그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때 아멜리 노통브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그 단어 하나하나를 쓰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을 하기는 했을까? 평생에 걸친 다독과 훈련된 글쓰기를 통해 언어가 그의 실존을 앞서간 것은 아니었을까?

베를린 훔볼트대학 본관 정문을 열면 카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을 마주하게 된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각과 해석은 언어의 영역이고, 변화는 행동의 영역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고 행동이며, 거창하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더라도 어제와 다른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언어에 갇히지 않는 행동일 것이다. 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일 것이며, 글은 그 이후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결국, 나는 또 이렇게 언어로 글을 쓰고 있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 그래서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을 쓰는 것이 무척 힘들기만 하다. 점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나의 고민조차 언어가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내가 가진 언어들을 해체해 본다.

글쓴이 김수련은 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저자다.
대학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했고 삶의 다양한 길 위에서 수많은 질문을 만났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해 ‘소설’의 형태로 그 질문을 세상에 다시 던진다.
  •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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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아띠   ( 2018-05-25 ) 찬성 : 12 반대 : 12
'상대가 하는 말의 취지를 봐야지, 표현한 단어에 집착하면 안된다...' 정말 좋은 말씀 같습니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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