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필석의 산 이야기 3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여보~, 내가 해냈어~”

고소증을 이겨내며 엘브루스 정상으로 향하는 대원들. 우시바, 알렉산더 등 코카서스를 대표하는 명봉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있다.
러시아에 위치한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Elbrus)는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동봉(Vostochaya·5621m)과 서봉(Zapadnaya·5642m) 2개 설봉(雪峰)으로 정상부가 이루어져 있다.

카스피해(동쪽)와 흑해(서쪽) 사이에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공화국과 접경을 이룬 엘브루스는 산기슭에서 보면 반듯하게 누운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케 할 만큼 부드러운 쌍봉으로 기술적인 면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 아마추어 등산인에게 인기 있는 만년 설산이자 대륙 최고봉이다. 또한 코카서스산맥 주봉인 엘브루스 일원은 동구조룬(Donguz Orun·4468m), 우시바(Ushiba·4710m), 시켈다(Shkheldar·4320m) 등 북면이 거대한 암벽을 이룬 봉이 많아 거벽 등반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엘브루스 등반로는 동봉과 서봉 사이 안부(鞍部, 5200m)로 올라선 다음 급경사 설사면을 타고 주봉인 서봉 정상에 오르는 루트가 가장 일반적이고, 체력과 고소 적응력이 뛰어난 산악인들은 동봉과 서봉을 연이어 오르기도 한다.

필자는 엘브루스를 두 번 등반했다. 첫 도전은 한국–구소련 수교 이태 뒤인 1993년 7월, 한국 출발 7박 8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나선 유럽 최고봉 원정이었다. 그 등반에서 전진베이스캠프 격인 프리웃 산장(Friut Hut·4050m)에서 겁 없이 들이켠 술 덕분에 컨디션이 엉망이 되었고, 결국 동봉과 서봉 사이 안부에 주저앉아 정상으로 향하는 일행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곤 되돌아서야 했다.

2006년 두 번째 도전 때에는 ‘금주’와 충분한 고소적응이 성공률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고산 등반 ABC에 입각해 산행했다. 첫 스케줄이 ‘엘브루스와 동구조룬 조망대’ 체겟봉(Cheget·3461m) 트레킹이었다.


동네 뒷산 수준 등산 초보자도 참가

체겟봉 정상을 향해 돌밭 길을 걷는 대원들. 동구조룬 북벽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다.
체겟봉 트레킹은 해발 2100m 높이의 터미널에서 2인승 곤돌라를 타고 2500m 높이까지 오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릴 넘치고 즐거운 여행이다.

야생화 만발한 초원과 하얀 설릉이 반복되는 능선을 따르는 사이 순간순간 고소증에 다리가 무겁기는 하지만 엘브루스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일행 모두 입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10명의 일행 중 누구 한 명도 엘브루스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만큼 긴장해 있다.

일행 중 연장자인 장익진 씨(평택 맥산악회)는 “이응노 씨(맥산악회)와 이기열 씨(평택 여산회)가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강조한다. 고교 선후배 사이인 두 여성 산악인은 고산 등반은 처음이지만 10여 년 동안 거의 매주 산행해왔고, 테니스, 수영, 달리기 등 여러 스포츠를 통해 체력을 다져왔다. 엘브루스 등반을 석 달 앞둔 시점부터는 체력 강화에 최선을 다해왔기에 고소 적응만 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싶었다.

이영석 씨(청운대 교수)는 30대 초반 필자와 인연을 맺은 이후 해외 고산 등반을 꿈꾸고 전문 등반을 배우기도 했으나, 학교 사정상 몇 차례 기회를 놓쳤기에 이번 등반이 오랜 꿈을 이루게 해준 고산 원정이다. 또한 유진관 씨는 동생 진욱 씨(동국산악회) 권유로 참가했고, 두 사람에게 이종사촌 형인 박희정 씨는 설악산과 지리산 산행조차 경험이 없음에도 아웃도어 사업에 도움 될까 싶어 참가했다.

이렇게 아이젠 한 번 차본 적 없는 5명과 이영석 씨가 단지 엘브루스 등정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부산 산악인 이청산 씨와 석상명(동대부고 산악부 OB), 유진욱 씨는 5대륙 최고봉 등정이 목표다. 이청산 씨는 10년 전 킬리만자로(5895m)를, 유진욱 씨는 2005년 여름 북미 대륙 최고봉인 데날리(6194m, 매킨리)를 등정했기에 4개 고봉을 남겨둔 셈이다.

일행의 숙소가 위치한 테르스콜(Terscol·2200m)은 13년 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했다. 박산(Baksan)계곡 상단부인 이곳은 13년 전에는 케이블카 터미널만 있었으나 이제는 호텔과 식당, 상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체겟봉 케이블카 터미널이 있는 체겟 마을은 번화했다.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박산계곡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니만큼 가장 많이 변한 게 당연한 일이다 싶다.

프리웃 산장 또한 몰라보게 변했다. 예전 산장은 불에 타 외벽만 겨우 남았고, 그 아래 새 산장이 들어서 있다. 위쪽 컨테이너박스 역시 대피소였다. 1993년 등반 때는 박산계곡 테르스콜 마을에서 하루에 프리웃 산장에 올라서고, 이튿날 새벽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파스투초프록(4650m) 상단 약 200m 설사면에서 빙판을 만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프리웃 산장을 거쳐 마을로 내려서야 했다. 아이젠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정보를 믿은 대가였다.

엉성한 러시아제 아이젠을 사고 다시 프리웃 산장에 올라섰을 때 그곳에 머물고 있는 러시아 아가씨들의 미모에 빠져들어 함께 어울려 노래 부르고 배낭 안에 넣어 온 등정 축하주를 있는 대로 꺼내 마시다 보니 컨디션이 엉망이 돼 버렸다. 당연히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고 이튿날 새벽 산장과 50m쯤 떨어진 화장실을 갈 때는 몸을 가눌 수 없어 낮은 포복 상태로 눈밭을 기어야 했다. 가까스로 등반에 동행했으나 동봉과 서봉 사이 해발 5200m 높이 안부에서 돌아서야 했다.


스키에 배낭 메고 정상 향하는 외국 클라이머들

체겟봉 능선 쉼터에 다가서는 대원과 외국 트레커들. 체겟봉은 트레커들에게 인기 있는 ‘코카서스산맥 조망대’ 같은 봉우리다.
체겟봉 트레킹을 통해 고소 적응 과정을 거치고 마을로 내려섰는데도 모두 컨디션이 좋다. 이영석 씨는 “샤슬릭(꼬치구이 일종)에 맥주 한 잔!”을 외치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도 먹어보자”며 아우성이다. 먹거리는 결국 샤슬릭으로 매듭지어졌다. 마땅한 선택거리가 달리 없기 때문이다.

밤새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가라바시 산장(3600m)으로 베이스캠프를 옮기는 날이다. 짐을 꽉꽉 집어넣은 100리터 용량 카고백과 라면 한 상자, 맥주 한 상자 등 엄청난 짐에 호텔 앞마당에서 기다리던 여성 가이드 마리나가 깜짝 놀란다. 삼삼오오 모인 ‘각개전투팀’이다 보니 중복되고 불필요한 물건이 많다.

오늘은 체겟봉 트레킹을 함께한 마리나 외에 가이드가 3명 더 따라붙었다. 여행사 사장인 빅토리아도 가라바시 산장까지 함께 오르겠다고 한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케이블카를 두 차례 갈아타고 해발 3470m 높이의 터미널에 도착하자 스노캣(snow cat·캐터필러 설상차)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짐 열세 덩어리에 가이드들 짐까지 싣고 7명이 올라탔는데도 끄떡없이 잘 올라간다.

퀸셋형 6인용 숙소 2곳으로 나누어 들어간 일행은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오전 11시 파스투초프록까지 고소 적응에 나섰다. 이틀 뒤 등정 시도에 대비해 체력을 아낄 생각에 해발 4150m 높이 설사면까지 설상차를 타고 오르기로 한다. 대원 10명에 가이드 4명, 운전사까지 15명이 올라탔는데도 설상차가 설사면을 가볍게 올라가자 장익진 씨는 “이 차 타고 정상까지 밀어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우스갯소리를 해댄다. 농담이 아니더라도 설상차는 정상까지 밀어붙일 기세로 급경사 설사면을 힘차게 올라갔다.

정오를 조금 못 미처 눈밭에 내린 일행은 완경사 설사면을 한 발 한 발 오르다 파스투초프록을 200m쯤 앞둔 지점에서 아이젠을 착용했다.

파스투초프록에 올라선 것은 오후 3시경. 마침 안개가 걷히면서 산 아래 설악동과 같은 마을이 형성된 박산계곡 일원과 동구조룬에서 우시바로 이어지는 침봉군이 거대한 장벽처럼 웅장하게 바라보인다.

아이젠을 찰 즈음 “나는 이쯤에서 쉬는 게 컨디션 조절에 좋겠다”고 했다가 후배들 등쌀에 떠밀려 올라온 장익진 선배도 화색이 돈다. 이응노 씨는 18번을 부르고, 이기열 씨는 남자 가이드를 일으켜 세워 댄스파티까지 연다.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가 파스투초프록에서 벌어졌다. 모두 행복한 표정이다. 이런 순백의 풍광 속에서 즐거움을 맛보려고 우리 모두 지금 이곳에 올라와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즐거움은 잠시. 하산길에 들어서자 일행 모두 무너지는 모습이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고. 다른 대원들에 비해 30분 늦게 프리웃 산장에 내려선 유진관 씨는 아예 말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설상차로 가라바시 산장까지 내려서기로 계획을 바꾼다. 하기야 여태껏 너무 순조로웠다. 지금 우리가 오르려 하는 봉이 그래도 유럽 최고봉이 아닌가.

휴양지이자 겨울 스키의 메카인 박산계곡을 대표하는 음식인 샤슬릭. 양고기 꼬치구이다.
설상차를 타고 내려가는 사이 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파스투초프록을 향해 오르는 유럽 산악인들이 보인다. 스키를 신고 오르는 이들도 있다. 저들 대부분 이날 파스투초프록에서 비박하고 내일 새벽 정상을 향할 계획이다. 고산을 고산답게 대하는 외국 클라이머들의 자세에 위축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가라바시 산장에 도착한 다음 날은 모처럼 휴일이다. 어제 산장에 내려선 이후 가랑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좋다. 발아래 구름바다가 깔리고 엘브루스 일원의 명봉들이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다. 그림이다. 명화를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오늘은 부산 산꾼 이청산 씨의 50번째 생일이다. 이응노 씨와 이기열 씨는 이른 아침부터 서두르더니 과자와 초코파이를 이용해 멋진 생일 케이크에 미역국까지 차려 놓았다. 이역만리 러시아 땅, 유럽 최고봉에서의 생일상, 이 이상 호사로운 생일파티가 또 있으랴.

이제 내일 정상에 올라서면 모든 스케줄이 끝이다. 그런데 엊저녁 밥도 못 먹고 잔 유진관 씨와 장익진 선배는 몸이 무거워 보인다. 장 선배는 엘브루스 도착 첫날부터 목감기 때문에 고생했는데 아직 깨끗이 낫지 않은 것 같다. 첫날 숙소에서 장 선배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며 조심스러워 했는데도 술을 거나하게 마신 이영석 씨가 덥다며 창문을 활짝 열고 잤으니….

아침밥을 먹고 난 다음부터 바람이 강해진다. 내일이 걱정이다. 마리나는 어제 우리의 등반 실력이 미심쩍었던지 종일 쉬자던 일정을 바꾸어 11시부터 피켈 활락법을 훈련하자고 한다. 설사면에서 추락할 경우 피켈로 제동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오전 10시를 넘어서면서 비바람이 거의 45도 각도로 몰아친다. 사흘간 날씨가 그리도 좋더니 꺾였는가 보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 했으나 비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후 2시경 마리나와 보조 가이드인 블라디미르 밀라노프가 굳은 표정으로 일기예보를 보여주며 가슴 철렁하게 한다.

“오늘 아침 정상 날씨는 초속 15m의 강풍에 영하 15℃였다. 내일 새벽은 20m에 영하 20℃다.”

“…”

일행 모두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자 블라디미르는 “예보는 예보일 뿐”이라며, “새벽 2시경 일어나 5시까지 기다리다 날씨가 좋으면 밀어붙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등정을 시도하자”고 위로해준다.

“안 돼요. 무조건 전진이에요.”

프리웃 산장으로 다가서는 대원들. 왼쪽 설봉이 엘브루스 주봉인 서봉이다.
이응노 씨와 이기열 씨는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식당에 들어가 감자를 깎는다. 감자전을 부쳐 대원들에게 영양보충을 해주기 위해서다.

오후 3시가 넘어 감자전이 한 장 한 장 부쳐지자 매실소주와 맥주까지 곁들여 내일의 등정을 기원한다. 이제 번개가 번쩍이는 날씨도 걱정되지 않는다. 해발 5642m 높이 고산을 오르는데 폭풍설 한 번 겪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침대에 드러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날씨도 불확실하고, 시간이 다가오면서 과연 이 구성원으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화이트아웃은 반복되지만 그래도 구름이 떠오르는 게 다행이다 싶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청산 씨의 “기상!”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새벽 2시 15분. 얼른 식당으로 가보니 마리나가 식사 중이다. 빙긋 웃으면서 오늘 서미트(summit)에 나서자고 한다. 이렇게 좋을 수가-.

그런데 설상차 앞에서 장비 점검을 하는데, 장익진 선배가 지퍼를 열어놓은 우모복 차림에 안전벨트와 아이젠을 차지 않고 있다. 서둘러 챙겨드리고 설상차에 올라탔는데 이번에는 보안경이 없단다. 난감해진다. 해가 떠오른 이후 보안경 없이 설산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행위인 것이다.

“형님, 제 것 쓰세요.”

석상명 씨가 배낭에서 예비용 보안경을 꺼내 건네주자 장 선배 표정이 애매해진다.

“아무래도 난 하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도중에 포기하면 후배들한테 피해줄 테니 말여. 대신 평택 아줌마들은 꼭 올려줘야 혀.”

오전 4시 설상차에서 내려 10분쯤 걸어갔을까, 장익진 선배가 하산을 결심한다.

스포츠 브레지어 차림으로 파스투초프록을 향해 오르는 외국 여성 산악인.
어둠을 뚫고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오르는 대원들은 모두 자신감 넘치는 용사처럼 당당한 모습이다. 그러나 파스투초프록을 지난 지 30분쯤 됐을 때 유진관 씨가 하산을 결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다.

유진관 씨가 가이드 한 명과 함께 하산하고 대원 8명과 가이드 3명만이 정상으로 향한다. 밑에서 볼 때 왼쪽으로 계속 틀면서 올라가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거의 곧장 오르는 급사면이다. 추위와 바람도 대단하다. 동이 튼 직후 얼굴에 선블록 크림을 바르려고 장갑을 벗자마자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설사면에 휘날리는 눈보라는 긴장케 했다. 그렇지만 등 뒤로 펼쳐지는 풍광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두꺼운 구름을 뚫고 솟구친 침봉들은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들면서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블라디미르는 서봉 너머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산군 뒤에 흑해가 있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웬 사람이 앞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를 촬영하곤 한다. 쇼트 스키를 배낭에 매단 그는 어떨 때는 멀찌감치, 또 어떨 때는 바로 앞에 다가와 사진을 찍어댄다. 너무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이 부럽게 느껴졌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상업사진가였다. CD 한 장과 사진 7장당 40달러씩 주고 개인 사진을 샀지만,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잘 찍은 사진이었다).

트래버스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기열 씨는 벌써 지친 모습이고, 이영석 씨는 “나는 이즈음에서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그러기에는 눈이 너무도 초롱초롱하다. 동봉과 서봉 사이의 안부에 올라선 것은 오전 8시 40분. 좋다, 이대로라면 두어 시간 뒤면 모두 정상에 올라선다. 안부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충분히 쉬는 사이 이청산 씨와 석상명 씨가 동봉을 자꾸 쳐다본다. 두 사람은 2개 봉 연속 등정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무사 등정을 위해 자신들의 꿈을 곧 버리고 만다.


“미정아~, 사랑한다”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정상에 오른 한국 산악인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등정의 기쁨을 만끽했다.
가이드들이 이제부터는 경사가 가파르다며, 한 손에 피켈을 들고 다른 손에 폴을 잡으라고 권한다. 이어 가이드인 세르게이 푸르소프는 슬링을 꺼내 이기열 씨의 벨트에 연결한다. 이 역시 안전을 위해서다. 출발하자마자 모두 힘들어한다. 산행을 시작하고 내내 유지하던 2~3m 간격의 대열이 깨지면서 3개 조로 나뉘어 오른다. 그러나 누구 한 명도 포기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1시간쯤 오르자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허리를 반쯤 굽힌 채 올라오는 이기열 씨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리나는 “그만 하산하는 게 어떻겠냐?” 묻고, 또 30분쯤 지나서 다시 한 번 “괜찮겠냐?” 묻는다. 그때마다 이기열 씨의 대답은 “무조건 고(go)”이다.

설사면을 10분쯤 더 올랐을까, 설릉 뒤편으로 봉우리 두 개가 보인다. 마리나는 오른쪽 봉이 정상이란다. 모두 숨을 고른다. 이제 100걸음이면 정상이다. 설릉을 따르다 막판의 가파른 사면에 올라설 때는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굽어진다.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여보~, 내가 해냈어~.”

“미정아~, 사랑한다.”

유럽 최고봉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모두 감격의 함성을 질러대고, 각자 소속 산악회 깃발을 펼친 채 멋진 폼도 잡아본다. 자신의 체력이나 인내심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정상을 향했던 대원 모두 환희에 넘치는 표정이다.

하지만 정상에서 1시간 가까이 머물다 하산길에 접어든 대원들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점에 올라서기 위해 온몸의 힘을 다 짜냈던지라 쏟아질 듯 가파른 설사면을 내려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하산하는 사이 우리 팀 뒤를 이어 정상을 향하던 외국 산악인들이 안부에서 포기하고 내려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파스투초프록을 향해 내려설 때는 또 다른 산악인들이 며칠 후의 등정길을 위해 고소 적응차 설사면을 한 발 한 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 아마추어 산꾼들은 빙긋 웃음 지은 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파이팅!’을 외쳤다.
  • 201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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