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로 새로운 조형세계 빚어내는 작가 채림

“내 작품이 어떻게 변해갈지 나도 궁금”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그의 작품에는 짙은 녹음의 숲과 조용한 연못이 있고, 어스름한 저녁 풍경이 등장한다. … 숲의 속살거림이 화면을 채운다. … 덩굴인지 나뭇잎인지 나뭇가지인지 뚜렷하지 않은 선들이 서로 교차하고 엉키고 겹치며 미끄러지는 등 여러 표정을 짓는다.”(미술평론가 서성록)
최근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 채림 작가의 개인전에 들어선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했다. 재료나 기법을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매력 때문이었다.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작품을 보면 ‘옻칠을 한 게 아닐까?’ 짐작되지만, 다양한 색감에 마티에르 효과까지 살려 유화처럼 보이는 작품도 많다.

끈적끈적한 옻칠의 점성 때문에 붓 한 가닥 한 가닥의 흔적까지 다 드러난다. 무엇보다 순은이나 22K 금으로 도금한 은을 전통 문양이나 잎사귀 모양으로 세공한 후 진주, 산호, 호박, 비취, 터키석 같은 보석이나 자개를 박은 작은 조형물들이 화면 위에 브로치처럼 꽂혀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숲속을 거닐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잎사귀나 꽃, 열매를 보면 ‘보석 같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채림 작가는 그 느낌을 진짜 보석으로 표현했다. 2000년부터 장신구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작가만이 빚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2014년부터 옻칠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인도, 대만 등 세계 각국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하면서 뉴욕 아트엑스포에서 ‘솔로 어워드’를 수상하고, 영국의 사치갤러리가 세계의 떠오르는 작가들을 선정해서 개최하는 ‘스타트 아트페어’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불문학 전공

〈춤추는 버드나무, Dancing willows〉, 162x122cm, 목판에 자개, 22K금도금 실버, 천연 옻칠, 2017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갤러리, 파리 BDMC갤러리, 뉴욕 에이블파인아트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국에서는 계속 거절당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전시 기회도 얻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장신구 디자이너로 처음 활동할 때처럼 외국 공모전에 부지런히 참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미대를 졸업하지 않은 신인 작가라 설 자리가 없었지만, 외국에서는 달랐습니다. 장신구 디자이너로 활동한 경력까지 고려해 저를 중견작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사용하는 옻칠로 작업한다고 설명했더니 감탄하면서 회화와 공예를 혼합하는 제 작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장르를 넘나드는 게 요즘 현대미술의 경향이잖아요?”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을 조각적 회화(sculptural painting)라고 부른다.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인 옻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회화와 공예를 혼합하는 그의 작품은 ‘자연이 자연을 만나고, 예술이 예술을 만나는(Nature meets nature, Art meets art)’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회화도 조각도 공예도 아니다. 그는 이화여대와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그는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 사는 동안 패션학교에 다니면서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임신을 하고 연년생 아들딸을 키우느라 꿈은 뒷전이 되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티아라(작은 왕관) 전시를 보고 나서였다.

“외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갈 때마다 장신구도 예술품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패션디자인은 결혼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우니 장신구 디자인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장신구는 몸에 착용하는 예술품(wearable art)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다루는 재료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석디자인과 함께 보석감정까지 공부했고, 국제보석감정사 자격도 땄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단기 코스로 보석세공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세공을 하지는 않습니다. 10대 때부터 보석세공을 해온 장인과 협업해서 작품을 만듭니다.”


디자인에서 순수미술로 영역을 넓히다

〈숲 속을 거닐며, Walking in the forest〉, 목판에 자개, 실버925, 천연 옻칠, 2014-2017
그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금방 주목받았다. 일본의 국제진주디자인콘테스트, 한국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의 국제주얼리디자인공모전, 대한민국미술대전 디자인부문 등에서 연이어 수상하고, 한국디자인진흥원의 굿디자인어워드에 선정됐다. 김희애, 전지현, 윤은혜 등 최고의 배우들이 시상식에서 그가 디자인한 장신구를 착용했다.

“2012년부터 매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주얼리 문화전’에 참여하면서 제 작품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장신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제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느낌이었죠. 전통 장신구에서 활용하던 산호, 호박, 비취뿐 아니라 자개를 깎아서 사용했습니다. 자개를 반구형으로 깎으면 빛이 굴절하면서 문스톤처럼 은은하게 빛납니다.”

자개를 다루면서 자연스레 옻칠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장신구를 어디에 올려놓으면 돋보일까 고민하다 옻칠이 생각났습니다. 옻칠한 목제품에 얇게 갈아낸 자개를 붙인 게 나전칠기잖아요? 자개와 옻칠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죠. ‘이제까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하면서 본격적으로 옻칠 공부를 했습니다. 세계적인 옻칠작가 전용복 선생과 인간문화재 박강용 선생을 찾아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두 분 모두 제자 대하듯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배운 전통기법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장신구를 몇 사람밖에 즐길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던 그는 옻칠을 접한 후 순수미술(fine art)로 영역을 넓혔다. 처음에는 30~40차례 반복해서 옻칠을 하고 굳히고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통해 유리처럼 반짝이는 표면을 만들고, 그 위에 조형물을 브로치처럼 꽂았다. 그러자 호수 위 그림자처럼 조형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외국에서 전시하면 사람들마다 신기해해 옻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붙여놓는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옻칠로 자연의 색감과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다. 색색의 점들이 찍혀 있는 작품 〈춤추는 버드나무〉를 보면 점묘법으로 그린 인상주의 작품이 떠오른다. 화면 위에 올라간 자개 조형물들은 햇살처럼 반짝인다.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만든 작품입니다. 식물에 쏟아지던 햇살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죠. 수없이 점을 찍으며 겹겹이 색을 쌓아 올리니 마티에르가 두꺼워지면서 색감이 깊어졌습니다.”

이리저리 얽힌 붓 터치가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작품도 있다. 〈푸른 안개〉는 폭포 때문에 물안개가 자욱한 푸른 숲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저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의 올해 전시 일정도 빼곡하다. 2월 23일부터 한 달간 일본의 한국문화원에서 전시를 한 후, 3월 베니스 아트엑스포와 홍콩 센트럴 아트페어, 4월 뉴욕 아트엑스포, 5월 뉴욕 컨텍스트와 칸 비엔날레, 6월 스위스 바젤의 라이 아트페어 등에 참여하고, 11월 28일에는 가나인사아트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처음에는 제 작품을 알리기 위해 여기저기 공모전에 지원했지만, 요즘은 전시 요청이 밀려들어 선별해야 할 정도입니다”라고 말한다.

“피카소는 8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았잖아요? 늦게 시작했지만 저도 그러고 싶어요. 무궁무진한 옻칠의 세계를 접하고 나니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 작품이 어떻게 변해갈지 저도 궁금합니다.”
  •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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