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 골목에 스트리트 뮤지엄 만든 박동훈 대표

도심을 문화 중심지로 되살리는 길거리 미술관

조선시대에는 중등교육 기관인 남부학당과 활자를 만들던 주자소가 있었고, 한때 출판, 인쇄, 광고, 영화의 중심지였던 곳. 하지만 차츰 사라져 흔적으로만 남아 있던 서울시 중구 필동의 옛 영광을 되살려 또다시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지하철 충무로역 4번 출구에서 남산한옥마을로 올라가다 보면 골목에서 불쑥불쑥 자그마한 미술관이 고개를 내민다. 버려져 있던 자투리땅을 활용해서 만든 스트리트 뮤지엄(Street Museum)이다.
필동 24번가 모퉁이에 공중전화 박스처럼 놓여 있는 미술관 ‘모퉁이’는 아래위로 길게 난 창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보게 하는 독특한 형태다. 남산한옥마을 안에도 ‘우물’ ‘이음’ ‘골목길’ 등 3개의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우물’은 전통적인 우물 형태로 땅을 깊이 판 후 그 안에 작품을 배치하는 미술관. 작품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음’은 옆으로 길게 난 창을 통해 주변 자연이 액자 속 풍경처럼 담기는 길이 10m, 높이 3m의 미술관이다. 전시장 안에는 긴 통쇠가 받침대 위에 올려 있고, 그 밑에 그 통쇠를 갈아낸 쇳가루로 쓴 글씨가 보인다. 김종구 작가의 작품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진다. ‘골목길’ 은 골목길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이다. 강병인 작가가 ‘봄’과 ‘꽃’이란 글자를 약동하는 자연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캘리그래피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둥지’는 육교 밑 자투리땅에 새 둥지처럼 자리 잡았다. 두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두 살짜리 아이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 김혜진 작가의 작품이 이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비탈길 자투리땅에 자리 잡은 ‘사변삼각’은 높이가 6m에 이르러 대형 작품을 전시하기에 좋다. 현재는 검(劍)의 본질적 속성을 재해석해온 최정윤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작은 미술관 옆에 디지털 안내판을 세워 전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 그리고 작가 인터뷰도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전시 장소를 찾기 어려웠던 작가와, 예술과 가까워지기 어려웠던 일반인이 이렇게 골목골목에서 불쑥 만날 수 있다.

필동 골목에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은 미술관들을 세워 거리 풍경을 바꾸고 있는 박동훈 핸즈BTL미디어그룹 대표를 만났다.

필동 거리 미술관 지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개인이 사비를 털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한 뒤 서울 한복판에서 자리 잡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돈 벌러 떠났던 엄마를 찾아 1979년 경남 산청에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하지만 어머니도 저를 교육시킬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잘 곳이 없어 공터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주무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부터 넝마주이, 분식집 배달, 납땜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종이를 줍다 어느 사무실 앞에 잔뜩 버려져 있는 만화 그림을 모아서 보곤 했습니다. 알고 보니 만화영화를 제작하는 곳이었죠. 몇 날 며칠 사정해 그곳에 들어가 만화영화를 배웠습니다. 뒤이어 인쇄소, 우드락 회사에서 일하다 광고회사로 옮겼죠. 모두 이 근처였어요.”

덕수상고를 다니면서 방과 후나 주말을 이용해 일했던 그는 예술고로 옮겼지만 2학년 2학기 때 자퇴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의 저자로 유명한 한호림 선생님이 덕수상고 미술 선생님이었어요. 제 그림을 보고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예술고로 가라’고 하셔서 학교를 옮겼지만, 재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만뒀습니다. 광고회사에 들어간 후 처음에는 미대 졸업자들에게 밀려 제대로 된 일을 맡지 못했지만, 현장에서 익힌 디자인 감각을 인정받아 디자인 팀장까지 했죠.”


필동에서 보낸 광고 인생 30년에 대한 보답


1992년, 그는 인쇄소 구석 자리에 책상 하나 놓고 자신의 광고회사를 시작했다. 그 회사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성장했다.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한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 한 번 만난 사람들과 지금까지 수십 년째 거래해오고 있다. 5년 전 드디어 필동 24번가의 옛 인쇄소 건물을 사들인 후 리모델링해 사옥을 마련했다.

“2013년, 1년 6개월 만에 사옥을 완공한 후 5층 제 사무실에서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셨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죠. 그러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소름이 끼쳤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나에게 누릴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그렇다면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직원들에게 미대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와 성공하려면 학비가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밑바닥부터 일을 배운 이곳 필동이 그에게 학교가 되어 주었고, 인쇄소・제본소 등 이곳 협력 업체들이 그를 믿고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서울에 올라온 지 30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유학까지 다녀오려면 5억원 남짓 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장해오던 카메라와 렌즈부터 팔았다. 카메라 수집가로 이름이 날 만큼 어렵게 장만한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동사무소를 찾았다.


“우선 주민자치위원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필동이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인지 새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다시 문화 중심이 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전 세계 문화타운 곳곳을 누비면서 벤치마킹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저도 거리의 주인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순수미술과 공예, 디자인, 서점, 카페, 푸드 트럭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자유롭게 먹고 놀고 즐기면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거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필동 24번가 사옥 근처에 레스토랑과 베이커리카페, 북카페, 공연장, 펍 등을 열면서 주변의 자투리땅들을 미술관으로 변신시켜 나갔다. 쓰레기만 쌓여 있어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땅이었다. 사옥 앞 자투리땅을 사들여 첫 번째 미술관 ‘모퉁이’를 만든 후 ‘이런 식으로 미술관을 지을 테니 땅을 무상 임대 해달라’고 땅 주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한국전력공사, 한국시설안전공단 등 땅 주인들은 개인에게 땅을 빌려준 적이 없다며 난감해했다. 작품 관리와 전시를 위해 냉・난방과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보험을 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는 하나하나 끈질기게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대지 조건에 맞춰 이제까지 8개의 미술관을 디자인한 그는 “12개까지는 제가 하고, 그후는 건축가의 재능 기부로 디자인을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자연 속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이 지금까지 제게 영감과 에너지를 줍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순수미술을 접했다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생각도 하죠. 이곳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쉽게 미술작품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요. 회화, 판화, 사진, 미디어아트 등 미술작품은 출판, 광고, 영화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곳에 들어올 콘텐츠로 꼭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남부학당의 터이자 일제강점기 기생을 교육한 권번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 서재 ‘남학당’을 열어 강연장과 북카페로 활용하고, 젊고 실험적인 음악가들을 위한 뮤직홀 ‘코쿤 뮤직’의 문도 연다.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그는 미술과 음악, 강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필동골목축제 ‘예-술-통’을 연다. 필동 골목이 앞으로 어떻게 변신을 거듭할지 기대된다.
  • 201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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