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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과 악함,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얼굴

〈탐정 홍길동〉의 다크 히어로 이제훈

드라마 〈시그널〉에서 과거를 향해 간절한 무전을 보내던 배우 이제훈이 이번에는 영화 〈탐정 홍길동〉의 다크 히어로가 됐다. 조성희 감독이 펼쳐놓은 이 기묘한 세계에 그의 현실적인 연기가 보태져 ‘한국적 히어로물’이 완성됐다.
이제훈에게 연기는 여전히 ‘목숨을 걸고 하는 무엇’이다. 그 절절한 마음이 보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진제공 : CJ엔터테인먼트
2011년, 한국 영화계의 발견은 이제훈이었다. 신인남우상에서 〈파수꾼〉의 이제훈과 〈고지전〉의 이제훈이 맞붙는 명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1984년생, 당시 나이 스물여덟. 이 늦깎이 신인에게 충무로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일생에 한 번뿐이라는 신인상을 휩쓸었던 해, 이제훈의 수상 소감은 짧고 명료했다.

“목숨 걸고, 연기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섯 해가 지났다. 그는 〈건축학 개론〉 〈분노의 윤리학〉 〈점쟁이들〉 〈파바로티〉 등의 영화에 출연했고, 드라마로는 〈패션왕〉과 〈비밀의 문〉 등을 찍으며 현대극과 사극을 오갔다. 〈건축학 개론〉처럼 국민영화가 된 작품도, 〈비밀의 문〉처럼 뼈아픈 결과를 얻은 작품도 있지만 그의 연기가 논란이 된 적은 없었다. 첫사랑의 신열을 앓는 대학생을 연기할 때나, 수백 년 전의 인물인 조선왕조의 세자를 연기할 때나 그는 한결같이 목숨을 걸었다. 〈고지전〉의 장훈 감독은 이제훈을 보며 “이렇게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연기하는 배우가 있었나 싶다”고 했다.


군 입대는 그의 엔진에 열을 식혀주는 시간이 됐다. 배우가 아닌 일반인으로 보낸 2년 동안, 몸과 마음을 재정비했다. 배우라는 직업이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목숨을 건 열정에 고마움과 책임감이 더해졌다.

“어릴 적부터 제 유일한 취미는 영화 보기였어요. 늘 내 곁에 있는 친구였죠. 그런데도 제가 연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어요. 뒤늦게 용기를 냈고, 대학교에 입학한 다음에 첫 도전을 했어요. 처음에는 한 작품만 해보려고 했는데, 연기라는 게 그렇게 잠깐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연기에 목숨을 걸다

영화 〈파수꾼〉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에 입학했다. 이미 늦깎이였으니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데뷔작은 2007년에 찍은 단편 영화 〈밤은 그들만의 시간〉이었다. 이후 여러 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내 얼굴은 왜 저런지, 입술은 왜 이리 두꺼운지, 목소리와 발성은 왜 이렇게 답답한지…’ 한 편 한 편 쌓일 때마다 절망했고, 그만큼 노력했다. 그리고 첫 장편영화로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을 만났다.

“〈파수꾼〉은 제 연기의 기반을 다져준 작품이에요.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준 영화이기도 하고요.”

〈파수꾼〉에서 이제훈이 연기한 기태는 지금도 무명 배우들이 오디션장에서 준비하는 단골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훈이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넘어오며 보여준 성취는 지금도 저예산영화를 찍으며 고군분투하는 시네키드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고 있다.

영화 〈분노의 윤리학〉
“윤성현 감독님은 현장에서 늘 말했어요. 네가 느끼는 만큼만 연기하라고요. 느끼지 않은 것을 ‘연기로’ 보여주지 말라고요. 그 이후에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임합니다.”

〈탐정 홍길동〉은 군에서 제대한 뒤 처음으로 찍은 영화다.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이 연출했다. 조성희 감독은 윤성현 감독과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다. 〈파수꾼〉부터 이제훈의 연기를 눈여겨 봐왔다는 조 감독은 이번 작품을 그를 염두에 두고 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훈의 얼굴에는 선함과 악함이, 강함과 약함이 공존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저 역시 조성희 감독님의 단편 〈짐승의 끝〉과 〈남매의 집〉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저는 굉장히 현실적인 연기를 하는 인물인데, 감독님의 작품은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만화 같기도 하고, 그래픽 노블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어요. 내 연기가 이 세계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이번 작품은 그에게 여러모로 도전이었다.

영화 〈탐정 홍길동〉
〈탐정 홍길동〉에서 길동은 악당보다 더 잔인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그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유도 정의 구현보다는 사적 복수에 가깝다.

‘이 인물이 관객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을까’ 염려가 된 것도 사실이다. CG가 많이 쓰인 작품이라, 허허벌판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찍은 장면도 있었다.

“현장에서 제일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파수꾼〉에서 같이 했던 촬영감독, 조명감독님이 함께 했다는 거예요. 독립영화를 하면서 고생했던 분들인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같이 왔다는 게 감동이 되더라고요. 그 사이에 아이 아빠가 된 분도 있고요(웃음).”

이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은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이기도 하다. 조성희 감독은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올 수 있구나’ 싶은 순간들을 구현해 낸다. 그는 한국의 고전 히어로 홍길동을 소환해 고전적인 필름 느와르 형식으로 장면을 꾸렸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복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하다.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드라마 〈시그널〉
“할리우드에도 많은 히어로물이 있지만 〈탐정 홍길동〉이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적인 정서를 버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길동이 극중에서 동희, 말순이와 동행해요. 그리고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죠. 겉은 자랐지만 속은 아이 같은 길동이 어른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점차 바뀌고요.”

현재 극장가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출연하는 〈시빌워〉가 장악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부진, 봄 가뭄이 길어지는 5~6월 극장가에 〈탐정 홍길동〉은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 편으로 끝내기에는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많거든요. 조성희 감독님이 짜놓은 판이 이게 끝이 아니에요.”

영화 〈탐정 홍길동〉
김성균이 오랜만에 제대로 악역을 선보이긴 했지만, 그가 속한 거대 조직인 광은회의 정체도 이제 막 드러난 것뿐이다. 이제훈도 그렇다. 길동으로서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아직 많다. 일단은 홍길동이 되어 종횡무진 몸을 잘 푼 덕분에 드라마 〈시그널〉에 투입되었을 때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할 수 있었다. 김원석 감독은 〈미생〉 당시에도 이제훈에게 손을 내민 적이 있다. 그땐 영화 촬영으로 일정을 맞추지 못했지만 ‘만나야 할 인연은 언젠간 만난다’는 믿음이 현실화됐다.

“〈시그널〉은 여러모로 저에게 뜻깊은 작품이죠. 무엇보다 너무 좋은 선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혜수 선배님은 배우로서나 여성으로서나 제가 꿈꾸던 이상형에 가까워요. 조진웅 선배님은 제 필모를 통틀어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춰본 배우일 거예요. 〈시그널〉이 끝난 뒤 집에서 TV를 보다가 우연히 〈분노의 윤리학〉을 봤는데 그때도 선배와 함께더라고요.”

〈시그널〉의 성공은 비단 장르물의 쾌거만이 아니었다. 작가와 감독, 배우와 제작진이 전심을 다해 만들면 그 시그널이 시청자에게도 통한다는 진심의 확인이었다. 이제훈은 배우 중 가장 먼저 현장에 투입됐다. 조진웅은 이제훈의 촬영분을 보며 현장의 감을 잡았다고 했다.


“초기에 연기력 논란이 있었던 것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어요. 현장의 상황이나 작품의 템포와 관계없이, 보는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니까요.”

데뷔 후 처음 있었던 연기력 논란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며 시청자와의 간격을 메워갔다. 그는 이미 보는 이들이 있어야 연기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였다. 제대와 함께 달라진 또 하나는 그가 대중과 소통하는 접점을 늘려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연예가 중계〉는 물론 〈냉장고를 부탁해〉 〈런닝맨〉 〈해피투게더〉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예능 초보인 데다 평소 진지한 모습이 습관이 돼서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의 그런 순수한 면모가 의외의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연기를 시작할 땐 배우는 작품으로만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인 이제훈이 자꾸 보이면 배역과 혼동이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둘을 구분해서 보시더라고요. 그동안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초심, 이제훈 연기의 시그널


〈냉장고를 부탁해〉의 셰프들은 그를 ‘선비’라고 불렀다. 〈해피투게더〉에서는 ‘바른생활 사나이’의 모습을 고수하는 그가 한동안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연예가 중계〉에서는 자기 입으로 ‘6년째 솔로’임을 털어놔 리포터를 당황하게 했고, 〈런닝맨〉에서는 무전기를 든 김에 〈시그널〉의 박해영 경위로 상황극을 만들기도 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제훈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보기 좋았다.

“연기를 시작할 때의 초심은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그 폭이 더 넓어지는 거 같아요.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니까요. 모든 순간에 목숨을 걸 듯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은 변함없어요. 그건 화면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거든요. 현장의 스태프들뿐 아니라 화면 밖의 관객들에게도요.”

윤성현 감독과 조성희 감독은 그걸 가장 먼저 느낀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확연히 다른데 둘은 이제훈이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윤성현 감독은 이제훈에게서 아주 현실적인 모습을 봤고, 조성희 감독은 그에게서 아주 비현실적인 히어로를 만들어냈다. 윤 감독은 〈탐정 홍길동〉을 보고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얼굴이 나왔다”고 했다.

“원래는 촬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고 가요. 현장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요. 이번 작품을 통해서는 완벽하게 준비하고 현장에서는 완전히 놓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아마도 새로운 모습이 나왔던 거 같고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현대물과 시대극, 이제는 판타지의 영역에까지 발을 디딘 이 배우는 현재 한국 영화의 경계를 넓히는 최전방에 있다.

한결같은 마음과 변화무쌍한 얼굴을 지닌 흥미로운 파수꾼으로.
  • 201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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