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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뽑힌 채 부유하는 현대인의 초상

입체 회화 그리는 작가 손봉채

그의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한다. 사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진도 그림도 주지 못하는 독특한 시각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3차원적인 공간을 2차원 평면에 재현하기 위해 원근법을 활용하는 그림과 달리 그의 작품은 실제 공간을 활용한다. 하나의 장면을 다섯 장의 투명 판에 나눠 그린 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중첩해놓았다. 그림이 서로 겹쳐지면서 가까운 쪽은 크고 진하게, 먼 쪽은 작고 아스라이 보이는 효과가 극대화된다.

원근법뿐 아니라 동양화의 농담 효과까지 실감나게 살아났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동양의 산수화를 떠올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뒤에서 LED 조명을 비춰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낸다. 작가 손봉채가 개발한 입체 회화다. 그는 이 기술로 특허까지 받았다. 작가와 기술특허라니 재미있는 조합 같았다.

〈Migrants〉, oil on polycarbonate+LED, 1840x940cm, 2014
그러나 작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요즘 주로 그리는 소재는 뿌리 뽑힌 나무다. 자신이 뿌리내렸던 장소에서 송두리째 뽑혀 부유하는 나무들. 신산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지구인의 초상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소나무 이전에는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장소를 촬영해서 입체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과 계곡에 놀러 갔을 때였어요. 계곡이 너무 예뻐 발 담그고 즐기고 있는데, 아버지가 ‘6・25 때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이 학살돼 이 계곡에 이틀 동안 핏물이 흘렀다’고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죠. 이후 사연 있는 장소들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막걸리 사 들고 다니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예쁘게 꾸며진 공원이 사실은 끔찍한 현장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이를 통해 본질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버리는 우리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현장을 찾았는데, 크레인이 소나무를 뿌리째 뽑고 있었어요. 휘청거리며 쑥 뽑히는 나무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촬영도 포기하고 돌아오는데, 도시로 들어서니 곳곳에 늘어서 있는 조경수들이 보였습니다. 뿌리 뽑혔던 소나무들이 그렇게 조경수로서 새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 나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동남아 근로자들, 유럽의 이주민이 떠올랐습니다. 뉴욕 유학 시절에 엿보았던 이주민들의 치열한 삶도 생각났죠.”


국내보다 해외 미술 시장에서 더 인기

〈물소리바람소리〉, oil on polycarbonate+LED, 1600x1200cm, 2015
그의 ‘이주민’ 시리즈는 이렇게 시작됐다. 독특한 효과를 내는 기법에 산수화처럼 관조적인 느낌,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사실은 우리나라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인기 있다. 세계시장에서 팔리는 작품 수가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작품 수의 열 배 이상이라고 한다. 독일의 마이클 슐츠 갤러리와 홍콩의 콰이펑 갤러리가 유럽과 중국, 홍콩에 그의 작품을 알려왔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중국, 일본, 타이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거나 단체전에 참여했고, 독일 쾰른, 스위스 바젤, 스페인 아르코, 파리 피악 아트 페어 등 세계적인 아트 페어에 모두 참가해 완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10여 군데에 지점을 두고 있는 오페라 갤러리의 소속 작가가 되었고, “아직 진출하지 않은 미국 미술 시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한다.

그는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시장성’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에는 한때 작품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뼈아픈 과거가 숨겨져 있다. 조선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1992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농사짓던 부모님은 땅을 팔고 노점상, 일용직 등 온갖 일을 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움직이는 조각을 처음 접하고 푹 빠져들었다. 정적이었던 조각이 살아 움직이니 너무 매력적이었다. 기계 조작 등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귀국하자마자 움직이는 조각으로 신세계미술제 대상을 받고,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 최연소 작가로 초대받았다. 천장에 매달린 270개의 외발자전거가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그의 작품은 충격과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우리나라 언론뿐 아니라 CNN, BBC, NHK 등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끊임없이 바퀴를 돌리며 새 울음 같기도 하고, 아우성 혹은 비명 같기도 한 소리를 내는 외발자전거는 권력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자화상이었다. 재료비만 5000만 원 가까이 드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대상으로 받은 상금 1000만 원에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죽자 사자 매달려 작품을 만들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작품을 발표하면 세상이 뒤집힐 줄 알았는데, 결국 제가 뒤집혔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작품을 본 LA 현대미술관이 전시하겠다며 작품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운송비가 없었다. 그 작품은 결국 창고 비용을 감당 못 해 고철로 처리됐다.

“몇 년 후 한 노신사가 손녀의 미술 교과서에 실린 그 작품을 봤다며 구매할 수 있느냐고 했지만, 이미 고철이 된 후였죠.”

사채 이자를 대기 위해 철공소와 조선소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다. 포장마차는 엄청 잘됐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작가로 돌아왔다.

“포장마차를 찾아온 어머니가 ‘저런 일은 중학교만 나와도 할 수 있는데’라고 혼잣말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날 정말 펑펑 울었죠.”


원근법과 동양화의 농담 효과를 동시에

〈Migrants〉, oil on polycarbonate, 90x68cm, 2015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하면서도 먹고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선배들은 “조각은 안 팔려. 그림은 그래도 팔리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보면서 그는 ‘왜 평면으로만 그릴까? 그림을 입체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유레카’의 순간이 왔다.

“대학에서 시험 감독을 하는데, 뒤로 돌기만 하면 ‘사락사락’ 하는 비닐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애들이 OH필름에 축소 복사를 해서 커닝 페이퍼로 쓰고 있더라고요. 압수한 OH필름을 한꺼번에 모아놓으니 글자들이 뭉쳐져서 덩어리로 보이잖아요. ‘이거다’ 했죠.”

처음에는 OH필름 30장에 사진을 중첩시켰다가 스무 장, 열 장으로 줄여나갔다. 2000년대 중반 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낀 기업이 협업을 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자본력이 있는 기업이 이 기법을 가져가 대량으로 아트 상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 특허 신청을 했다. OH필름에서 유리, 강화유리, 아크릴, 방탄유리, 폴리카보네이트로 재료도 계속 바꿔나갔다. 재료의 단점이 발견되면 지체 없이 새로운 재료를 찾았다. 비행기 창문에 쓰이는 합성수지인 폴리카보네이트는 아크릴보다 강도가 300~500배나 강하다. 급격한 온도 변화와 충격에 모두 강해 지금으로서는 만족스럽다. 풍경에서 나무로 소재를 바꾸면서 사진 대신 그림을 직접 그려 넣는 작업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두세 가지 색으로 그렸지만, 요즘은 흰 물감만으로 나무껍질 하나, 솔잎 하나까지 극사실주의로 묘사한다. 사람들이 사진으로 착각하는 이유다. 폴리카보네이트에 그림을 그려 넣으려면 유화물감을 사용해 가장 가는 세필로 그려야 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린다고 한다.

〈Migrants〉, oil on polycarbonate+LED, 1200x800cm, 2014
그는 언제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남이 시도하지 않는 방법으로 새로운 기법, 재료, 소재를 실험해왔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한국 시장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컬렉터들은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기 주저하죠. 그림을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고요. 그러니 도전적인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유럽 시장은 달라요. 각자 자신의 취향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매하고, 새로운 작품을 사면 친구들을 불러 함께 즐기죠. 그림을 즐기는 층이 두텁고, 새로운 시도를 반기는 편입니다. 쾰른 아트 페어에서 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난 이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들어. 꼭 갖고 싶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는지 할부로 구매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습니다.”

그의 실험은 아직 진행 중이다. 투명한 TV 모니터를 활용해 입체 회화와 움직이는 영상을 접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움직이는 조각도 다시 시도하고 있다. 그는 “세계와 계속 소통하면서 작업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 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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