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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포기하지 않은 진채선은 연습생 시절 내 모습”

〈도리화가〉에서 조선 최초의 여류 명창 역 수지

첫사랑. 나른한 오후에 창틈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처럼 간질간질하고, 따뜻하며 아른한 단어.
2012년 〈건축학개론〉 개봉 이후 수지는 이 단어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하지만 그 존재는 ‘미스에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었던 그가 배우로 발돋움하는 기회이자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는 위험이기도 했다.
그는 “〈건축학 개론〉이 끝나고 생각만큼 시나리오를 그렇게 많이 받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잘랐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읽은 건 많지 않았다”고 했다. 3년 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 때 그 위험은 더 커 보였다. 〈도리화가〉로 최근 복귀했을 때 그런 우려는 없어졌다, 영리한 선택이란 평가를 받았다.

사진 : 조선DB
‘국민 첫사랑’ 이미지는 넘어야 할 산

“아무래도 여러 활동을 병행해왔기에 시간도 많이 흘렀고, 개인적으로도 다음 영화는 신중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건축학개론〉 이후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에는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그런 수식어들은 영화 이미지에서 나온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작품을 해나가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부담도 되고, 넘어서야 하는 말이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제가 평생 그것만 가지고 갈 수는 없잖아요? 〈도리화가〉를 선택한 것도 ‘이 영화에 출연하면 ‘국민 첫사랑’처럼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이다’라고 계산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국민 첫사랑’은 저한테는 결국 넘어야 할 산과 같은 거니까요.”

〈도리화가(桃李花歌)〉는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던 19세기 중반, 소리를 하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우연히 듣게 된 신재효(류승룡 분)의 아름다운 소리를 잊지 못한 채 소리꾼의 꿈을 품어온 진채선(수지 분). 진채선은 신재효가 수장으로 있는 조선 최초의 판소리학당 동리정사에 찾아가지만, 신재효는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채선의 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진채선은 포기하지 않고 남장까지 불사하며 동리정사에 들어가고, 신재효는 춘향가의 진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단 한 사람, 남자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를 지닌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흥선대원군(김남길 분)이 개최하는 전국의 소리꾼을 위한 경연 ‘낙성연’에 조선 최초로 여자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다.

수지는 “예전에는 딱히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없었는데, 요즘은 시나리오를 읽고 끌리거나 배역이 나와 비슷한 면이 있으면 더 끌리게 돼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기에 내 모습이 많이 드러나는 부분에 끌린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 내가 가진 것들을 표현하는 직업이기도 하고. 〈도리화가〉도 그렇고, 이제 들어갈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도 다 그런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처음 보면서 많이 ‘울컥울컥’했다.


“진채선의 일대기에 감정 이입이 잘됐던 것 같아요. 저도 연습생을 하면서 가수를 준비하던 기간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감정과 닮아 있어서, 그의 서러움이나 기억이 시나리오에서 스쳐간 것 같아요. 내겐 그 기억이 있으니까 채선을 더 잘 연기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가수가 되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JYP 연습생 전에는 작은 댄스 동아리에 있었는데 부모님은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릴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셔선지 반대를 하셨어요. 그래도 가수가 되고 싶으니까 끝까지 다녔죠.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어머니를 초대해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JYP 연습생이 된다고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광주에 있었고 회사는 서울에 있었어요. 평일에는 학교를 가야 했고 주말에만 서울에서 연습을 했는데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억울했는지 몰라요. 연습이 잘 안 되기도 했고,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을 때도 있었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서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뭔가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죠.”

199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영화 주연을 맡았던 오정해는 한국음악을 전공했고,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의 ‘춘향가’ 이수자였다. 판소리를 공부하는 동안 미스춘향 진에 뽑혔고, 영화 주연으로 발탁이 됐다. 가수이긴 하지만, 판소리와 접점이 없는 수지에게는 소리 연기가 과제였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영화의 판소리 연기를 대신한다는 것은 생각도 안 했다. 당연히 작품을 고를 때부터 판소리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 판소리를 배울 때도 내가 이걸 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조선 최초 여류 명창 이야기라고는 해도 내가 연기할 것은 진채선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나가는 것이기에 꼭 판소리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가 떠올린 것은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제니퍼 로렌스.

“제니퍼 로렌스도 전문 댄서는 아니지만 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잖아요. 영화를 보면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저 역시 채선이 판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보여주면 어떨까. 전문 판소리꾼은 될 수 없겠지만 채선이 점점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드릴 순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생겨났죠.”


판소리는 새로운 득음의 훈련


가요를 부르면서 반가성을 주로 택했던 그에게 소리가 단단한 진성과 가성이 오가는 판소리는 새로운 득음의 훈련이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소리 선생님을 못 만나면 아예 수업 과정 한 시간, 두 시간을 통째로 녹음해 반복해서 들었다. 소리에 대한 부담도 있었겠지만 역시 진채선도 초반에는 소리를 익히는 훈련생으로 나오니까 감정에 더 집중했다. 그는 “판소리를 배운 것이 제가 가수를 하는 것에도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지금은 판소리를 안 배운 지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에도 앨범 녹음을 했는데, 확실히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에는 소리가 단단해진 기분이 들더라고요. 판소리는 제가 평소 쓰는 발성(반가성)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소리가 단단해서 처음에 무척 고생을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판소리를 배워서 득을 본 것이 많아요. 그래서 다시 판소리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남자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춘향가를 불러 스승과 흥선대원군을 감동시키는 대목이 클라이맥스다. 수지는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를 부르는 장면은 나 스스로도 마음에 든다”며 “합천 황매산에서 촬영했는데 자연과 어우러지며 원숙한 소리가 나왔다”고 했다. 반대로 (춘향이가 옥중에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쑥대머리’는 감정이 깊고 구슬퍼서 애를 먹었단다.

“판소리는 많이 미숙하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들이 있어요. 소리라는 것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제 소리가 아닌 전문적인 판소리를 입히는 편이 영화에는 더 좋은 결과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감독님에게 제가 하는 연기니 판소리도 제가 직접 하는 것이 좋다고 끝까지 고집했어요. 그런데 고집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었는지, 영화를 보니 감독님이 기술적으로 좀 만진 부분도 있더라고요. 채선이가 초반에는 미숙하지만 점차 성장하는 내용이라 완벽한 모습보다는 간절한 마음을 진심을 담아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실제로 촬영도 감독님이 순서대로 해주셔서 처음에는 막 배운 느낌이 나고 점점 성숙해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 같아요. 판소리를 후시녹음으로 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영화를 촬영할 때는 항상 동시녹음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했고, 실제로 동시녹음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도 많아요. 전 미리 연습을 마치고 현장에서는 집중해서 연기를 하는 편이라 사실 후시녹음이 더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현장에서 영화를 촬영할 때 내가 몰입해서 나오는 감정이 나중에 후시녹음에서 제대로 표현이 될까 걱정이 많았죠. 아무래도 야외에서 멀리 산을 바라보며 나오는 소리와 녹음실에서 벽 보고 하는 소리는 정말 다르지 않겠어요?”


금녀(禁女)의 시대에 사는 진채선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남장도 불사했다. 그는 판소리를 배우는 동리정사에서 유일한 여자였다. 촬영장에도 온통 남자배우들밖에 없어서 수지는 진채선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남장을 하려고 수염도 붙이고 얼굴에 숯칠도 하고 했는데 촬영장에서 수염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는 말까지 나왔다. 처음엔 그런 제 모습이 적응이 안 돼서 거울 보고 깜짝 놀라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런 분장을 한 모습이 더 예뻐 보이고 진채선이란 아이한테도 더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었다. 예쁘게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고 원래 내가 진채선이었던 것처럼 말이다”라고 했다.

“현장에서의 저는 거의 남동생이었어요(웃음). 제가 애교가 있는 편이 아니에요. 선배님들도 털털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애교와 밝은 건 다르잖아요? 촬영장에서 밝게 행동하고, 마침 남장을 하는 부분도 많아서 다들 남동생처럼 잘 챙겨주셨어요.”

진채선과 수지가 비슷한 점은 두 사람 다 ‘악바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남장을 하고서 남자들과 같은 강도로 훈련을 받았던 진채선처럼 수지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에는 만만치 않은 노력을 해야 했다. ‘악바리’란 표현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와서 꿈도 삶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속도가 있는 분들이 멋있어 보이는 것 같다. 그게 여유로움일 수도 있고, 당당함일 수도 있다. 또 여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각박함이 안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스무 살 때부터 했다. 당시 제 삶에 여유가 없어서 막연하게 주변의 그런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노래와 연기는 똑같이 사랑하는 일


“제 속도는 조금 빨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지금은 그렇게 빠르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때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요. (연습생 시절엔) 남들보다 일찍, 남들보다 늦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보다 연습실에 일찍 나온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무조건 큰 꿈을 꿨어요. ‘수퍼스타’가 돼야 하고 큰 무대에 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소탈한 꿈을 꾸게 돼요. 소극장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은 예전만큼 악바리처럼 일하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제 자신이 아쉽다고 느끼는 게 싫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어서 그저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채찍질만 하면서 가다간 금방 지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연기도 급하게 하기보다는 천천히 신중하게 하고 있어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던 3년 동안 그는 본업인 가수 활동을 했다. 가수로 데뷔했지만, 이제 대중은 수지가 배우로서 연기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노래와 연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전혀 아니다. 노래와 연기는 똑같이 내가 사랑하는 일이다. 엄마 아빠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이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했던 가수활동에는 콘셉트적인 게 많았어요. 제가 드러나는 게 크게 없었죠. 영화의 경우 캐릭터를 연기하기는 하지만 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돼요. 또 무대 위에서는 진한 화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저를 감추는 기분이라면, 영화는 맨 얼굴로 서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수지가 또래처럼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해외에서도 파파라치가 따라붙는 게 그의 현실이다. 그는 쉴 때 “팔당댐에 드라이브를 많이 다녀와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글을 쓰거나 노래 가사를 쓸 때도 있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도 멜로디보다 가사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현실적이고 위로해주는 가사가 좋다. 무조건 ‘수고했어. 괜찮아’보다는 생활에 맞닿아 있어 공감대가 형성되는 가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수지가 요즘 좋아하는 노래는 ‘아프로디노’의 ‘휴’. “제발 어디라도 기대 쉴 곳 하나 있으면 좋겠네”라는 가사가 좋단다.

“직업의 특성상 하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하면 피곤해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부분을 깨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피곤해지니깐 그런 게 싫어서 다들 피하고 사는 것 같아요. 굳이 일은 안 만들면 돼요. 밖에 안 나가면 사진을 찍히지도 않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다가도 사진이 찍히면 평범한 친구들이 피곤해지니까 그냥 집에서 시켜 먹어요.”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자, 영화배우이며 만인의 첫사랑으로 살고 있는 그는 좀 고단하고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복숭아꽃・자두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도리화가는 스물한 살의 수지를 위한 노래인 것 같았다.
  • 201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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