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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현실을 통쾌하게 그린 블랙코미디

다양성 영화 부문 1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감독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수남은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공장에 가서 일을 할 것인지,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인지. 손재주가 뛰어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주산이나 부기와 같은 자격증을 14개 땄다. 하지만 졸업할 쯤 컴퓨터에 밀려서 그는 작은 공장의 경리 직원으로 취직해야 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 집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던 남자는 어느 날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수남은 남편을 대신해 두세 배로 일을 해서 집을 장만하고 남편의 병원비도 댄다. 수남이 한 것이라고는 성실하게 살다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남자를 만난 것밖에 없다. 하지만 집을 마련하며 아이를 기르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진제공 : KAFA FILMS
안국진(35) 감독이 연출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영화 제목에 수긍이 간다. 수남은 모두가 성실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것 같다. 안국진 감독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난 후에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주인공이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세계에 빠졌다가 의도와 관계 없이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 공통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처럼 영화도 주인공의 모험을 따라가는 지점이 비슷한데, 관객들이 보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상한 나라의 성실한 앨리스’란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하시던데요.”

수남은 식당에서 일을 하고, 광고지와 신문을 돌리고, 청소를 하며 돈을 번다. 성실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무슨 일을 해도 숙련자가 된다. 주인공을 숙련된 노동자로 설정한 데 영향을 준 것은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이었다.


창업 실패 후 선택한 영화아카데미


안 감독은 수남만큼 여러 직업을 전전한 건 아니지만, 경희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자마자 감독의 길을 걷진 않았다. 기계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친구와 함께 쇠갈비를 해체하는 기계를 발명해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그 무렵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다. 쇠고기 관련 사업은 힘들어졌고, 안 감독과 친구도 사업을 접었다. 안 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보다’라는 생각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동안 생계를 위해서 모바일 게임 시나리오, 아동용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케이블 TV 단막극 시나리오 등을 써왔다.

“처음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볼 때마다 한 가지 직업을 오래 하시면서 직업의 마에스트로 같은 분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놀랐어요. 항상 프로그램 말미에 그 분들께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돈 벌어서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 ‘이제 집을 사고 싶다’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그런 인터뷰를 보면서 가슴 아프기도 하고 현실 배반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집을 사지만 남편의 병원비 때문에 그는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고시촌에 들어간다. 그 집은 애 딸린 젊은 부부에게 세를 준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남편의 병원비를 대기가 빠듯하자 수남은 이 부부에게 세를 올려달라고 닦달한다. 어느 날 재개발 계획이 발표된다. 수남의 집이 그 대상이다. 재개발로 수남의 사정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재개발 대상에서 빠진 동네 주민들이 거기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수남의 유일한 희망은 남편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 그때까지 병원비를 계속 내는 것만이 그의 목표다. 수남은 자신의 목표를 방해하는 동네 주민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안 감독은 “저예산 영화를 만들면서 집과 재개발을 얘기하는 게 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걱정이 됐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얘기할 때 집을 빼놓고 얘기할 수가 있을까? 집이 있으면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에게 집은 중요한 문제다”라고 했다.

“수남과 싸우는 사람들도 결코 잘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세입자나 동네 주민들이나 모두 수남과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열심히 일해서 집 하나 겨우 장만했거나 그마저도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저는 이 사회에서 계급간 갈등보다는 계급 안에서 이뤄지는 갈등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고요. 그걸 표현하는 블랙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2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 감독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제작비가 너무 적으면 개봉하기 힘들다고 해서 제작비에 현물 지원까지 포함시켰다. 실제로 들어간 돈은 7000만원 정도”라고 했다.

그는 2012년부터 이 영화를 구상했고, 이듬해 시나리오를 썼다. 원래는 무명배우들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이 영화를 프레젠테이션할 때 교수들이 반대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것이 배우 이정현이었다.

안 감독은 “영화 시나리오를 보니 수남을 연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남에 캐스팅되는 배우에 따라서 시나리오를 고쳐 쓸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정현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범죄소년〉 〈파란만장〉을 보면서 그의 연기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정현의 소속사로 시나리오를 보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그때쯤 박찬욱 감독과 알고 지내는 이 영화의 분장실장이 시나리오를 박 감독에게도 보냈다. 시나리오를 읽은 박 감독은 안 감독에게 주연 배우로 이정현을 추천했다. 이미 거절당했다는 걸 안 뒤에는 박 감독이 직접 나섰다. 그래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칭찬했다”는 수식어를 달게 됐다. 과장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팬이니까 당연히 얼떨떨했죠. 시나리오 때문에 욕을 많이 먹어서 ‘거봐’라는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어요. 그래도 이정현씨를 비롯해서 많은 배우들이 캐스팅됐으니 정말 다행이었죠. 알고 보니 제가 시나리오를 제안했을 땐, 이정현씨한테 전달도 되기 전에 거절당했더라고요. 출연료를 제대로 드릴 수 없어서 배우들에게 교통비 정도를 지원했는데, 정현씨는 그것도 안 받았어요. 오히려 촬영장에서 아침식사까지 산걸요.”


생활력 강한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나리오 완성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8월 13일 개봉 이후 다양성 영화 부문에서 흥행 1위를 차지했다. 9월 첫째 주까지 동원한 관객 수는 4만 명을 훌쩍 넘겼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자 제작비 2억원을 들인 영화로서는 상당한 성적이다.

안 감독이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 수남에게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의외였다”고 할 정도다. 어렸을 때부터 성실하게 살길 교육받지만, 그렇게만 살아서는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데에 공감하는 관객이 많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남이란 캐릭터가 주는 반전의 재미와 통쾌함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만 바라볼 정도로 지고지순하지만, 자신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사람의 목을 바로 그어버릴 정도로 강단도 있다. 안 감독은 “원래 주인공은 남자였는데 시나리오가 잘 안풀렸다. 여자로 바뀐 다음에는 모든 게 쉬워졌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남편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약자 중의 약자인 여자가 악조건 속에서 애를 쓰면 그 심정이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아요. 수남의 캐릭터를 만들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어요. 굉장히 활동적이고, 잠시도 일을 쉬지 못하세요. 수남이 극단적인 행동을 할 때면 어머니를 떠올렸죠. 과연 어머니의 의지와 생활력이라면 수남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상상했어요.”
  •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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