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공의 길 함께 걸어가는
아버지 윤만걸 명장과 동천・동훈 형제

천년 시간 함께 쌓아가는 석공 삼부자

글 : 한정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경주 남산 보물 제1188호인 천룡사지 석탑,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탑과 국보 제39호 나원리 5층 석탑, 보물 186호 용장사지 석탑. 그가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신라 천년의 유산이다. 쓰러진 탑을 다시 세우러 남산을 수천 번 올랐다.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 필요한 도구와 재료는 이고 지고 날랐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과 맞서가며 탑을 쌓았다. 손이 찢어지도록 정과 망치를 두드렸다. 바로 윤만걸(60) 명장과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두 아들 동천(38)·동훈(35)씨까지, 석공 삼부자 이야기다.

사진제공 : 윤만걸
윤만걸 명장(가운데)의 뒤를 이어 석공의 길을 걸어가는 두 아들 윤동훈(왼쪽), 윤동천씨.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1년 뒤였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생존의 치열함이 극에 달하던 그때였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윤만걸 명장. 제대로 먹을 수도, 배울 수도 없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따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 돌 일 하는 친구 따라 경기도 마석으로 갔다. 묘비 같은 것을 만드는 돌 작업장이었다. 그의 눈에 돌을 만지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다. 정 안되면 돌아가신 아버지 묘비라도 제 손으로 세워드리겠다는 요량으로 일을 배웠다. 그렇게 3년을 작업장에서 살았다.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인지, 손재주가 부족했던 것인지 그는 잘나가지 못했다. 더 배우고 기술을 연마하자는 생각에 익산으로 갔다. 그렇게 오영근 석장 밑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석공예를 익혔다. 그의 나이 16세였다.

함께 일을 배운 친구들은 돈을 좇아 건설현장으로 빠졌다. 하지만 윤 명장의 마음을 이끈 것은 다른 곳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마음에 세운 원(願)이 있어요. 돌 만지는 일을 시작한 거, 기왕이면 불국사 다보탑 같은 작품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죠.”

윤 명장은 아내와 막 태어난 큰아들을 데리고 경주로 내려왔다.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서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작업장은 마련했지만 일거리가 없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나날이 이어졌다. 돈을 벌고자 마음만 먹으면 좋은 기회는 많았다. 올림픽 특수로 건설경기가 호황인 시절이었다. 하지만 ‘다보탑 같은 걸작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석공 아사달의 혼이 잠든 곳, 경주

윤 명장에게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배움터였다. 특히 다수의 석조 문화재가 남아 있는 남산은 윤 명장에게 훌륭한 교과서였다.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과 함께 답사를 다니며 신라의 역사와 유적을 공부했다. 배운 만큼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 느끼는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천년 세월을 버텨낸 불상과 탑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라 석공에 대한 경외심이 들고 말아요. 신라 석공들은 몇 년 동안 산속에 처박혀 돌을 깨고 나르고 다듬었겠죠. 돈 벌려고 이 일을 한 게 아니었을 거예요. 오로지 백성들을 잘살게 해줄 거라는 통치자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으로 한 일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산속에 100여 개에 달하는 석탑을 세울 수 있었겠어요? 불가능하죠.”

지금까지 전해지는 여러 문화재 중 70%를 차지하는 것이 석조 문화재다. 돌이라는 재료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돌도 바람에 깎이고 물에 씻긴다. 이끼도 낀다. 천년 이상 세월이 흐르다 보니 유실되고 훼손된 것이 많다. 아예 형태를 잃어버린 것도 있다. 형태가 온전치 못하면 문화재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빛을 잃고 돌덩어리에 불과하던 폐탑과 깨진 불상에 혼을 불어넣은 사람이 윤 명장이다.

“폐탑 복원을 한다고 하면 일단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설계도면을 보죠. 재료의 특성과 탑이 만들어진 시대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해요. 똑같은 화강석이라 해도 경주 지역의 돌은 누런 색깔인 반면, 다른 지역 돌은 하얗죠. 신라의 탑에 백제의 돌을 가져다 붙여놓으면 보기에도 딱 티가 납니다. 석조 문화재의 보수, 복원은 단순히 문화재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에요. 그 문화재가 만들어진 시대를 살려놓는 것이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이어주는 일이죠. 우리가 중간에서 잘못해놓으면 역사가 일그러지는 거예요. 문화재를 대하는 석공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0대 때는 겁 없이 돌을 만졌다. 30대, 40대 때는 무작정 했다. 60대가 되고 나니 돌을 만지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 돌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자신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돌 앞에선 매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천년 세월이 사라진다. 다음 세대에게 잘못된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 그런 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두 아들이다.


“우리 세대 석공은 10명도 안 돼”

남산 정상에 남아 있는 보물 186호 용장사지 석탑. 윤만걸 명장 삼부자의 손으로 수리, 복원한 것이다. 최대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 손으로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다.
형 동천(38)은 석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하러 다니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그렇게 일을 해도 집안 형편은 좋지 못했다. 어머니도 부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하나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다. 가족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어머니랑 도시락 싸서 동네로 소풍을 갔어요. 어릴 적 가족사진엔 아버지가 없어요. 항상 일을 다니셨으니까.”

대학에선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따라 정과 망치를 들었다.

“졸업할 즈음 보니까 컴퓨터 전공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도 살아남을 확률이 거의 없겠더라고요.”

군대를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돌 일을 배웠다. 문화재 보수, 복원 작업에 필수인 석공예기능사, 문화재보수기능사 드잡이공, 문화재보수기능사 쌓기석공 자격도 갖췄다. 아버지와 함께 남산 폐탑 복원 사업에도 참가했다.

“남산 문화재 수리나 복원은 등산객이 다니지 않는 겨울철에 하거든요. 문화재가 대부분 차가 다닐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작업도구와 재료를 전부 사람이 직접 날라야 해요. 석조 문화재 수리할 때 강회를 쓰는데 이때 물이 필요하거든요.

물 한 번 길어다 놓으면 추위 때문에 금방 얼어버리고 다시 내려가 또 길어오고. 매해 겨울이면 남산을 그렇게 수천 번 오르락내리락했죠.”

늠비봉에 있는 탑을 수리할 때는 돌에 깔리기도 했다. 7m 높이의 탑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때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두 개의 체인블록으로 끌어올리던 돌이 휘청했다. 동천이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혔다.

“우리 같은 석공은 간발이 좀 커야 돼요. 안전장치 같은 거 할 예산이 안 되니까요. 그런 거 없이도 7~8m 되는 탑 꼭대기에 올라가 망치질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 동훈(35)이 한마디 거든다. 형과 달리 동생은 석공 일이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주말이면 아버지 작업장에서 돌도 나르고 허드렛일을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형보다 석공 선배다. 석공예기능사, 문화재보수기능사 드잡이공 자격증을 갖고 있다.

“돌 일이 정말 힘들거든요. 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한테 정과 망치 쥐여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다 도망가요. 돌 일은 그만큼 힘든데 그래서 재미있어요. 돌 일이란 게 똑같이 되는 법이 절대 없거든요. 무조건 다 달라요. 돌의 크기가 다르든지 형태가 다르든지. 이걸 어떻게 깎아낼지, 몇 단으로 어떻게 쌓을지, 오랜 시간과 공들여 생각하고 작업을 마쳤을 때 희열이 느껴지죠.”

윤만걸 명장의 공방 마당에 설치된 실물 크기의 포석정.
2009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석가탑 제작 과정을 전통방식으로 재현해달라는 작업의뢰였다. 한식진폴방식으로 석가탑을 세우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인부는 몇 명이 필요한지 전 과정을 재현했다. 동훈은 이 작업을 가장 뿌듯했던 일 중 하나로 꼽는다.

하지만 이듬해 이루어진 석가탑 해체, 보수 작업은 다른 사람이 맡았다. 두 형제는 아쉬움이 컸다.

“경주에서만 수십 년 동안 석조 문화재 보수, 복원을 해왔는데 석가탑도 첨성대도 다른 지역 사람이 와서 작업하니까 허탈한 감이 없지 않아요. 우리 지역 문화재는 우리가 가장 많이 다뤄왔고 잘 아는데 말이에요.”

요즘 동훈은 대학원 논문 마무리에 여념이 없다. 석가탑 재현에 사용한 한식진폴기법에 관한 연구서다. 형 동천 역시 대학원에서 문화재 보존에 대해 공부했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운 아버지와는 다르다. 경험으로 깨치라는 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면, 두 형제는 어떻게든 이론과 문서로 석공의 노하우를 남기고 싶다.

“우리 또래 중에 석탑이나 불상 같은 대형 석조 문화재를 다루는 석공이 전국에 10명도 안 될 거예요.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석공이 되고 싶다고 해도 일을 가르칠 사람도, 함께 작업할 사람도 없을지 몰라요.”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우리 손으로 푼다


윤 명장이 처음 돌 일을 시작했을 때 세운 다보탑 같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꿈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1992년도에 다보탑과 똑같은 크기의 모형을 만든 것이다. 그가 만든 다보탑 모형은 그의 고향 울산과 경주를 잇는 7번 국도에 서 있다.

다보탑 다음은 포석정이었다. 포항공대 교환교수로 와 있던 고 함인영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는 포석정 회돌이 현상의 비밀을 풀기 위해 윤 명장을 찾았다. 실험을 위한 포석정 모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다양한 크기의 포석정 모형 만들기를 수십 차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비를 들여 재료를 샀다.

윤 명장의 공방 마당에는 실물 크기의 포석정이 설치돼 있다.

“포석정 모형은 전시하려고 만든 게 아니거든요. 포석정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와서 회돌이 현상을 연구해 과학적 비밀을 풀어보라고 만든 거예요. 신라시대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 과학으로도 풀지 못하잖아요. 만약 이걸 푼다면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르죠. 우리 마당에 포석정이 있으니 누구든 와서 연구하세요.”

윤 명장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석굴암을 재현해보는 것이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마음이 통했을까. 동천・동훈 형제 역시 “석굴암 재현”을 큰 목표로 꼽았다.

“석굴암은 신라미술의 결정체예요. 구조학적으로 완벽하고 미학적으로 뛰어난 석조 건축물이죠.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아치문화와 돔문화가 혼용된 것이기도 해요.”

아버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전해 내려온 것을 잘 지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 다만 아들들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다보탑 같은 걸작’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은 아들의 몫이다.

“스물여섯 살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갔어요. 웅장하고 화려한 석조 건축물이 많은 것에 놀랐죠.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까지 돌로 건물을 지었거든요. 1970~80년대 산업사회를 거치며 콘크리트로 집을 짓게 됐죠. 예전처럼 석조 건축물을 지어보고 싶어요.”(동훈)

“대학원 시절 일본의 석공을 만난 적이 있어요. 모아이 석상도 복원하고, 지금은 앙코르와트 사원을 복원하고 있어요. 그분처럼 세계 곳곳의 석조 문화재를 수리, 복원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각 나라의 다양한 돌을 다뤄보고 알아보고 싶어요.”(동천)
  • 201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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