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 슈틸리케 감독의 리더십

‘파격’ ‘믿음’ ‘꼼꼼함’을 무기로 한국 축구의 희망이 되다

7개월 만의 반전이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의 아픔을 지웠다. 희로애락이 춤을 춘 2015년 호주 아시안컵이 한국 축구에 ‘희망’을 선사하고 막을 내렸다. 한국은 1988년 카타르 대회 이후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에 올랐지만 또 다시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했다. 호주와의 120분 연장 혈투, 1대 2로 석패했다. 55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은 또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눈물과 함께 미소가 번졌다.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한국 축구에 등을 돌렸던 국민이 박수를 보냈다. 그 중심에 7년 만의 외국인 감독 시대를 연 울리 슈틸리케(62) A대표팀 감독이 있었다.

사진 : 조선DB
좌초 위기 태극호를 만나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해 9월 5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선임을 발표했다. 감독 선임 3일 만에 입국한 슈틸리케 감독은 9월 8일 경기도 고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축구가 강국으로 도약할 희망이 없었다면 한국을 맡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같은 날 우루과이와의 친선경기를 관전한 슈틸리케 감독은 10일 K리그 경기 현장을 찾으며 ‘쾌속 행보’를 이어갔다. 잠시 독일로 돌아가 ‘코리안리거’를 살펴본 슈틸리케 감독은 9월 24일 한국에 돌아오며 ‘이방인’ 한 명과 동행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카를로스 아르무아 코치였다. 본격적인 슈틸리케호의 발진이었다. 10월 A매치에서 1승1패를 기록한 슈틸리케호는 이후 유소년부터 프로 무대까지 한국 축구 현장을 누비며,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그렸다. 11월 중동 원정 2연전을 마무리한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12월 15일부터 1주일간 열린 제주 전훈에서 국내파를 집중 점검했다. 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 피’를 대거 소집해 2015년 여름에 열릴 동아시안컵을 머릿속에 그렸다. 12월 21일,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에 출전할 23인의 태극전사를 발표했다. 비록 우승컵을 들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2월 1일 슈틸리케호는 국민의 박수 세례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2014년 9월 5일부터 2015년 2월 1일까지 149일간 그려낸 반전 드라마로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에 연착륙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 출신이다. 그러나 공식 인터뷰에선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한다. 그의 통역도 스페인어로 이뤄진다. 슈틸리케 감독의 논리는 이렇다. 그는 “내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아르무아 코치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니 스페인어 통역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왜 모국어가 아닌 스페인어를 즐겨 사용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축구인생에서 찾을 수 있다. 1972년 독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슈틸리케 감독은 1977년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전격 이적했다. 그러나 그의 스페인행을 바라보는 독일의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슈틸리케가 명성에서 뒤떨어지는 스페인 리그로 이적한다니, 자존심이 강한 독일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슈틸리케의 스페인 생활은 화려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미드필더와 수비를 넘나들며 외국인 선수상을 무려 네 차례나 차지했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리그 우승 3번에 1985년에는 유럽축구연맹(UEFA) 정상에도 올랐다. 선수 시절 전성기를 스페인에서 누린 그는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주목받으며 10년간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는 독일에 준우승을 선사했다. A매치 42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은퇴 후 독일이 아닌 스페인에 거주하는 그를 향한 독일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서서히 독일 축구계에서 슈틸리케를 바라보는 시선은 ‘스페인을 더 사랑한 독일의 이단아’가 됐다.


파격적인 선수 선발로 주목


슈틸리케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와 그의 리더십은 아직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들다. 취임 후 5개월밖에 흐르지 않았다. 감독이 자신의 축구 철학과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1~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호주 아시안컵에서 드러난 몇 가지 ‘단초’를 통해 그의 축구 철학을 조금 엿보는 것은 가능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리더십을 몇 가지 단어로 정리해봤다. 첫 번째 단어는 ‘파격’이다. 한국 대표팀을 수년간 이끌어온 타깃형 공격수 이동국(전북)과 김신욱(울산)이 부상으로 아시안컵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무명’ 이정협(상주)을 깜짝 발탁했다. 박주영(알 샤밥)이 아닌 이정협의 발탁은 한국 축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파격’이었다. “선수들의 이름값이 아닌 ‘제로 베이스’로 선수를 선발하겠다”던 슈틸리케 감독의 의지였다. 이정협의 발탁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이 밖에 아시안컵 기간 내내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 선수들이 부상과 감기 몸살로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베스트 11의 7명을 바꿔버렸다. 결과적으로 1대 0의 승리를 거뒀지만 ‘최악의 졸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11명만 가지고 대회에서 우승할 수 없다. 23명을 모두 활용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정성룡(수원)을 제외한 22명의 태극전사들을 투입하며 준우승을 일궈냈다. 파격적인 선수 선발이 성공을 이뤄낸 원동력은 ‘믿음’이었다. ‘깜짝 선발’된 이정협은 큰 무대의 중압감에 힘들어했다. 그의 발탁에 물음표를 찍은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 시드니에 입성하자마자 이정협과 개인 면담을 했다. “네가 잘하든 못하든 내가 책임을 질 테니 걱정 말고 편하게 부담 없이 뛰어라.”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에게 병풍을 자처했다. 자신이 발탁한 선수가 혹시라도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감싸 안겠다는 의미였다. A매치 경험이 전무하고, 소속팀 상주에서도 백업으로 뛰던 이정협은 아시안컵을 통해 ‘신데렐라’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최종 리허설에서 득점에 성공한 그는 본선에서 2골을 쏘아 올리며 슈틸리케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그의 선수 운영 방식은 ‘꼼꼼함’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꼼꼼함은 보물 1호, 수첩에서 나온다.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 한 번도 수첩을 놓지 않았다. 이 수첩에 적힌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지만 선수들에 대한 모든 데이터와 훈련 일정이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첩을 통해 선수들의 컨디션과 훈련 성과를 확인했고, 이런 정보들이 모여 파격적인 선수 선발과 베스트 11 구성의 밑바탕이 됐다. 그의 꼼꼼함은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으로 세상에 나온다. 선수들과의 소통 방식이 그렇다. A매치와 호주 아시안컵을 치르면서도 그는 훈련 외 시간에 선수들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본 뒤 하고 싶은 말을 간단한 단어로 설명하는 편이다. 주로 기자회견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짧지만 강한 울림이다. “이번 호주전에서는 침착성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선수들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선수들이 스스로 감독의 의중을 꿰뚫고 움직여주길 바란다. 그 결과 ‘실용축구’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아도 결과를 챙기는 경기 스타일을 빗댄 표현이다. 결승전 이전까지 5경기에서 무실점으로 5연승을 질주했다.


러시아월드컵을 향한 두 번째 여행

슈틸리케 감독의 계약기간은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까지다. 본선행에 성공하면 당연히 슈틸리케 감독이 러시아월드컵을 지휘한다. 희망이 가득한 미래가 전망된다. 슈틸리케 감독의 본격적인 축구철학이 한국 축구에 젖어들기까지 시간이 충분하다. 특히 브라질월드컵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수비 조직력 불안을 부임 4개월 만에 ‘짠물 수비’로 바꿨다. “공격하는 팀은 승리를 거두지만 수비를 잘하는 팀은 우승을 차지한다.” 수비수 출신인 슈틸리케 감독의 지론이다. 아시안컵에 대비하며 슈틸리케 감독은 수비 조직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수비진 간격을 cm단위까지 주문했다. 선수들과의 호흡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우즈베키스탄과의 아시안컵 8강전에서 기성용이 측면 공격수로 나서겠다고 건의하자, 슈틸리케 감독이 이를 수용해 승리를 이끌어낸 게 대표적인 예다. 이제 슈틸리케호의 키는 러시아로 향한다. 한국이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신데렐라’와 ‘언성히어로’(보이지 않지만 제 역할을 하는 선수)가 필요하다. 그래야 팀이 강해진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는 결승전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할 때 많은 선수가 더 많이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수들이 발굴이 되지 못한 것인지 (한국 축구 전반이) 기술적으로 부족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3주간의 휴가를 마친 뒤 3월 초 귀국해 다시 K리그 무대를 찾는다. 이정협 같은 새로운 신데렐라를 발굴하기 위함이다. 대학경기부터 챌린지, 클래식까지 무대를 가리지 않는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의 지휘봉을 잡으며 “새로운 여행이 시작됐다”고 했다. 러시아월드컵을 향한 긴 여정의 제1장이 이제 끝났다. 3월부터 시작될 두 번째 여정,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에 어떤 추억을 선사할지 주목된다.
  •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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