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 일러스트레이터

텍스트에 빛을 비추는 일 일러스트레이터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참고자료 :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보통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기》(길벗)
텍스트가 담은 내용을 알기 쉽게 표현하는 일,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의 정의다. 일러스트는 한국어로 ‘밝게 하다, 조명하다’는 의미, ‘삽화를 그리는 일’이 일러스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출판 매체의 내지와 표지의 그림, 광고나 영상매체의 그림이나 문양을 도안하고 제작하는 일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의 범주도 출판과 영상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분야가 다양하다. 거기에 캐릭터, 애니메이션, 앨범 표지, 가방 디자인, 문구류 제작 등 일러스트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회사에 소속돼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업체의 의뢰를 받아 일을 진행한다. 먼저 일러스트 의뢰를 받으면 의뢰 대상에 대한 스타일과 작품의 방향을 의뢰인(편집자나 광고주 등)과 함께 논의한다. 이들의 작업은 일반 회화 작가와는 달리 이런 공동작업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조율과 협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필수 덕목이기도 하다.

작품이 정해지면 일러스트레이터는 대상의 스타일과 주제를 연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일러스트가 삽입될 작품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 다른 도구를 사용한다. 1차로 도안된 그림이나 문자가 나오면 색상 작업을 해서 견본을 만든다. 이 견본을 가지고 의뢰인과 다시 회의 테이블에 앉는다. 심화할 내용, 수정할 내용 등을 나눈 뒤 완성 작업에 들어간다.


몇 년 전부터 일러스트레이터 전문 과정을 둔 학원이나 일러스트레이터 학과를 둔 전문대학도 등장했다. 현재 활동 중인 일러스트레이터 중에는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이들이 많다. 프로로 입문하려면 매체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매년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이 있어 자신에게 맞는 분야의 공모전을 준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개인작가가 인기를 얻어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평소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다면 백화점 문화센터나 공공기관의 일러스트레이션 강좌를 들을 수도 있다.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큼이나 ‘개성 있게’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해석력이 일러스트레이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는 게 많이 그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조언이다.

《보통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기》를 쓴 민효인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때로는 프리랜서의 탈을 쓴 백수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사랑하며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임을 부지런히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작업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 먹고살기 힘들 때도 있지만, 갑자기 일이 몰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을 때도 있는 게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때문에 불규칙한 프리랜서의 생활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관리하는 능력’ 역시 일러스트레이터의 요건이다.



일러스트레이터 백두리

그림을 통해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요

정이현의 단편집 《말하자면 좋은 사람》, 심리치유도서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씨네 21〉에 연재된 ‘김중혁-김연수의 나의 친구, 나의 영화’, 중앙일보에 연재된 ‘가까운 진심’ 등에서 따뜻하고 동그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려온 작가 백두리. 그가 자신이 쓰고 그린 책을 냈다. 《혼자 사는 여자》, 그의 그림책을 읽은 한 독자는 그를 “한국의 마스다 미리”라고 불렀다.



전라북도 익산, 내 영혼의 고향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주변에서도, 본인도 당연히 ‘화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다만 어떤 화가가 될 것인가는 대입을 앞두고 고민했다. 순수 정통회화를 그릴 것인가, 디자인을 전공할 것인가. 디자인 쪽이 좀 더 다양한 일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디자인을 전공하던 언니의 작품을 어깨너머로 본 것도 영향이 있었다. 그렇게 홍익대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다. 시내에 미술학원 두 개, 좀 과장하자면 길을 걷다 보면 거의 아는 사람인 소도시에서 그의 합격 소식은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로 집안과 학교의 경사였다. 지금도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에 내려가면 열아홉 소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서울살이 12년차가 되어가지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이 작은 도시라는 건 그의 자랑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진로 탐색기


대학시절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휴학을 하는 동안 GUI 작업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GUI는 화면조작 소프트웨어 중 하나로 그림문자(아이콘) 등을 통해 컴퓨터의 작업을 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벌이도 좋았고, 전망도 괜찮았지만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복학 후 일러스트레이션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고 즐거웠다. 양쪽을 모두 겪어보자 어떤 길이 나에게 맞는지 확신이 섰다. 졸업전시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다.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이 주제였다. 그 전시가 백두리라는 그림작가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단행본 작업을 시작하다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이 네이버 캐스트에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을 공유했다. 작가가 먼저 그리며 위로받았던 그림은, 비슷한 우울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만졌다. 이 전시를 통해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의 표지와 삽화를 그리게 됐다. 이 책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이후 비슷한 부류의 심리치유도서의 작업이 이어졌다. ‘위로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심리도서의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 ‘너무 밝게 그리지 않는다’,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밝은 그림은 오히려 와닿지 않는다. 그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그림에 위로를 받는다. 물론 단행본 작업은 작가와 편집자 디자이너와 회의를 통해 조율해간다. 이 과정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성장통이기도 했다.


조율과 협의라는 큰 산


단행본 그림을 그릴 때 원칙이 있다. 반드시 작업하는 책의 문장을 모두 읽는다. 마감 일정이 빠듯하더라도 이 원칙은 깨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일을 시작하던 초반, 원고를 미리 읽을 수 없었던 번역서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책이 나온 후 내용과 맞지 않아서 느낀 당혹감을 잊을 수 없어서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메모한다. 어떤 책은 책을 다 읽은 후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책은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는다. 이 큰 산을 넘고 나면 또 하나의 큰 산이 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이들과의 협의다. 같은 책을 읽어도 떠오르는 그림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이미지로 합의를 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그 적정선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자, 결국 우리가 모두 바라는 것은 ‘좋은 책’이라는 걸 믿게 되었다. 마음고생하며 혼자 울던 시간도 조금씩 줄었다.


말하자면 좋은 사람


2010년 4월, 나는 단행본 경력이 없는 신인 일러스트레이터였다. 하지만 나의 경력이 아닌 나의 그림을 보고 믿어준 분들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소설가 정이현의 단편집 《말하자면 좋은 사람》에 작업 제의를 해준 것이었다. 당시 두근거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여러 사정으로 출간이 미뤄져 4년이 흐른 2014년에야 책이 완성됐다. 덕분에 이 책에는 2010년에 그린 풋풋한 그림 12점과 2014년에 그린 성숙한(?) 그림 10점이 더해졌다. 책에 담긴 도시생활자의 고민은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작업 자체가 뜻깊은 경험이었다. 그사이 나는 40여 권의 단행본 작업을 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이야기, 혼자 사는 여자


그리고 마침내, 나의 이야기를 담은 단행본이 나왔다. 《혼자 사는 여자》 글·그림 백두리.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작업 자체가 홀로 하는 일이고,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때문에 ‘혼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 거기에 함께 생활하던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반자발적으로 시작된 ‘독립’은 내게 열린 신세계였다. 혼자 살게 되면서 나의 취향, 나의 습관, 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더 내밀히 알게 됐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그림일기 형식으로 남겨왔는데, 그게 모여 한 권의 책이 됐다. 일러스트레이션도, 혼자 사는 일도 나에게 행복과 고독을 동시에 준다. 내일(tomorrow)과 내 일(work)에 대한 불안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일이 없을 때도 훈련 삼아 그림을 그린다.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림 그리는 행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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