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재자〉의 박해일

‘비누 냄새나는 변태’부터 ‘해맑은 똘끼’까지 천의 얼굴

꽤 반듯하게 생긴 박해일은 철없는 젊은 남자 역할을 자주 맡았다. 가방끈은 길지만 제대로 된 돈벌이는 할 수 없거나(〈괴물〉 〈고령화 가족〉), 성욕인지 사랑인지 분간도 못 하고 여자에게 무턱대고 들이대거나(〈질투는 나의 힘〉 〈연애의 목적〉).
그는 맑은 듯 음울한 눈빛과 서늘한 듯 온화한 표정으로 불쌍하고 저열한 청년의 속내를 뒤집어 보였다. 아버지가 봤으면 끌끌, 혀라도 찼을 아들의 모습이었다. 최근작인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에서 그는 아버지라면 응당 싫어할 만한 것을 두루두루 갖춘 한심한 아들의 총체를 연기한다. 서울 강남에 살면서 벤츠를 몰지만 사채빚에 쫓기는 신세이고,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다단계 판매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한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성치 못한 아버지는 요양원에 보낸 뒤 연락을 끊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여자가 임신을 하자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실없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한다”고 하자 그는 “제가 그랬나요? 배우 말고는 다른 일을 안 해봐서 그런가…”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사진제공 : 조선DB
“봉준호 감독님은 저보고 ‘비누 냄새나는 변태’라고 했는데, 설경구 선배는 인터뷰에서 저에게 ‘해맑은 똘끼’가 있다고 했대요. 다 관심의 표현이죠. 그런데 제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극단적이지만 자연인으로서 전 매우 평범하고 재미없어요.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 화를 잘 내지도 못하고, 웃기지도 않죠. 제 연기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쳐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나의 독재자〉에서 박해일이 맡은 태식은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꼬여서’ 철이 덜 든 아들이다. 1972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무명 배우 성근(설경구)은 회담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다. 그는 생애 첫 주인공의 역할에 말투부터 제스처 하나까지 필사적으로 몰입한다. 회담이 무산되고 20년이 지난 후, 노인이 돼서까지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는 아들 태식(박해일)에게 골칫거리다. 하지만 태식은 빚 청산 때문에 인감도장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다시 옛집으로 데려온다. 절대 소통하지 못할 것 같던 이들 사이에 조금씩 온기가 흐르는 순간, 그리고 성근이 20여 년간 독재자로 살아왔던 단 하나의 이유와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는 보는 이의 심장을 살며시 흔들어놓는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 박해일(37)은 잠시 화장실에 갔다. 그의 빈자리 앞에는 맥주 한 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박해일에게 “대낮부터 술이냐”고 부러움이 섞인 핀잔을 주었더니 그는 “방금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요즘 그런 전화를 종종 받다 보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차(茶)보다는 술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나의 독재자〉 촬영 중 아버지가 건강검진을 받으셨다가 암 진단을 받으신 것을 알게 됐어요. 이게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됐던 시점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수술을 받고 야위셔서 뒷모습이 반쪽이 되셨더군요. 기분이 묘했어요. 아, 지금은 다행히도 잘 회복하셨어요. 이번에 영화를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된 후, 언론의 관심은 설경구에게 쏠렸다. 김일성의 대역을 맡은 연극배우를 연기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연기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해일은 “제 비중과 상관없이 어차피 출연했을 작품”이라고 했다. 4년 전 알게 된 이해준 감독과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꼭 한 작품을 같이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해준 감독이 〈나의 독재자〉 시나리오 작업을 할 무렵 두 사람은 또 만났다. 박해일은 “그때 감독님과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준비한다길래 자연스레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됐다”고 했다.


“감독님은 독재자 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어요. 그렇게 쌓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화해하고 싶었대요. 생각해보니 저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때 이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박해일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한 음절 한 음절 꼭꼭 눌러 신중하게 대답하는 그가 “글쎄요”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큰 갈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서로 갈등을 빚었다기보다는 아버지가 절 보면서 마음속으로 갈등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집에서는 조용하고 순한데, 밖에 나가면 자잘한 말썽을 부렸으니까요.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기억이든, 추억이든 어느 정도 오해가 있기 마련이에요. 아버지들이 독재자 같고, 독선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따져봤어요. 아무래도 어릴 땐 아버지가 가장 커 보이고 강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요? 감독님의 시나리오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읽혔기 때문에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었어요.”


배우 설경구와 실제론 아홉 살 차이


아버지를 맡은 설경구와 아들을 맡은 박해일의 실제 나이 차는 아홉 살이다. ‘아버지’보다는 ‘형’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러울 나이다. 박해일은 “부자관계를 계속 이끌어나가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축이다. 하지만 배우 입장에서 나이 차이 때문에 느끼는 부담은 없었다”고 했다.

“설경구 선배를 처음 봤을 때 ‘아, 진짜 다행이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느낌, 아버지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거든요.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냥 스윽 아버지라고 불러봤죠. 술 마실 때 ‘아버지 한잔 드시죠’ 이러면서. 처음엔 당황스러우셨겠죠. ‘왜 이리 일찍 들이대나’라고 속으로 흉을 봤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배우로서, 현장에서 아버지와 아들 연기 같은 걸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설경구 선배가 쑥스러워하면서도 바로바로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다 받아주셨어요.”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 개봉 즈음 했던 인터뷰에서 박해일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여러 번 언급했다. “상대역이 박해일이었다는 게 너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촬영장에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걸리는 특수분장의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영화 〈은교〉에서 노인 역할로 특수 분장을 경험한 박해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도 모르는 부분을 오직 박해일만이 알았다”고 한다. 박해일은 “특수분장에 관해서 힘든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특수분장이 배우에게는 외연을 넓힐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이자 기회다. 선배도 고생을 많이 했지만 배역과 연기의 폭은 오히려 확장됐을 것이다. 후배로서 특수분장과 함께 새로 생긴 선배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게 좋았다”고 했다.


“특수분장을 하는 데 길게는 8시간까지 걸려요. 낮 촬영이 있으면 자정에 일어나 오전 한두 시부터 준비해야 하죠. 그렇게 오랜 시간 분장을 하고도 좋은 컨디션과 감정 상태를 유지해야죠. 분장을 오래 유지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촬영 시간도 길지 않고, 피부가 많이 상하니까 촬영 후 하루는 쉬어야 해요. 분장할 때는 어떻게 될지 알듯, 모를 듯하다가도 분장을 마친 뒤 멋진 캐릭터가 확 나타났을 때! 이건 배우한테는 굉장히 신선한 경험입니다. 전 모든 배우에게 특수분장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하하.”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철없는 아들 역할을 주로 맡은 박해일도 다섯 살짜리 아들을 둔 아버지다. “어떤 아버지냐”고 묻자 그는 “아들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주 가는 아버지다. 같이 가다 보면 아이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 어쩌면 아이는 날 레고 장난감을 사다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버지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돼요. 제가 태어난 70년대 아버지들은 대부분 바쁘셨어요. 먹고사느라 바빴고, 일하러 해외에 가는 경우도 많아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긴 힘들었죠. 저도 아버지가 쉬실 때 같이 공도 차고 탁구도 치면서 잠깐씩 시간을 보냈지만 대화를 많이 한 편은 아니었어요. 아무리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도, 저도 가끔씩 아버지처럼 될 수밖에 없는 걸 인정해요. 대신 그때 부족했던 부분을 제 아이와는 질적으로 채워 넣고 싶어요. 마음은 그런데 매번 그렇게 마음처럼 되진 않네요. 아마 그때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겠죠?”
  • 2014년 1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08

201908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08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