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리’ 있는 ‘상여자’로 돌아온 손예진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해적 대단주로 변신

영화 16편에 드라마 9편, 손예진은 데뷔 후 14년 동안 25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개근상’감이라고 하는데,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여배우가 개근상을 받기란 주연상을 받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남자’ ‘집단’ ‘누아르’ 영화가 대세인 충무로에서 손예진이 ‘여자’ ‘해적’ ‘액션’으로 나타났다. 영화를 본 뒤 만난 손예진은 체격이 생각보다 작아 놀랐다. 스크린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크고 믿음직스러워 보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손예진은 조용히 사고치는 모범생 같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뜻밖의 모습을 보여준다.
탄탄한 연기력으로 롱런에 성공

손예진의 첫 영화는 <취화선>(2002)이었다.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민식이 희대의 화가 장승업을 연기했다. 손예진은 소운 역으로 등장했다. 장승업의 첫사랑이었다. 당시 최민식은 손예진을 보며 “이 아이는 몇 살인데 이렇게 연기를 잘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손예진이 누군가의 첫사랑으로 등장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정말 놀랄 일은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일어났다. 2014년 여름, 최민식은 시대를 초월한 영웅 이순신(영화 <명량>, 7월 말 개봉)이 되어 나타났고, 손예진은 같은 바다 위에서 여자 해적(영화 <해적>, 8월 초 개봉)이 되어 맞붙었다. 손예진은 당시 최민식의 칭찬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셨을 리가요. 제가 그때 얼마나 연기를 못했는데요(웃음).” 대신 그는 최민식의 조언을 기억한다. “예진아, 연기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해.” 그 한마디가 손예진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드라마 속 손예진은 <맛있는 청혼>(2001)에서 등장했다. 극 중이었지만 상대역이었던 권상우는 손예진을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한다. 웃을 때마다 초승달처럼 기우는 눈,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한 인상, 적당한 온도의 음성. 등장하는 순간 보는 이들도 알았다, 쉬 사라질 배우가 아니었다. 이 드라마 이후 손예진은 단박에 여자 주인공이 된다. <선희 진희>(2002), <대망>(2003), <여름향기>(2004), 그리고 <연애시대>(2006)까지. 몇 번의 시청률 부진은 있었지만 한 번도 ‘연기력 논란’은 없었다. 특히 <연애시대>는 지금도 회자되는 웰메이드 드라마.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잃고 이혼녀가 된 뒤 전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는 복잡다단한 스토리에서 주인공 은호를 연기한 손예진은 겨우 스물넷이었다.

“그때는 정말 작품 하나만 보고 했어요. 작품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인물 속에 빠져 지냈어요. 지금은 그 외의 것들도 보이죠. 흥행이나 시청률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요.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지만(웃음), 지금은 지금대로 좋아요. 모두가 다 저를 좋아할 수도 없고, 내 몫이 아닌 부분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다만 저에게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하는 거죠.”

손예진의 드라마를 <연애시대>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면, 영화는 어디가 분기점일까.

<클래식>(2003),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에서 그녀는 분명 로맨틱 멜로퀸이었는데, <작업의 정석>(2005)과 <아내가 결혼했다>(2008) 그리고 <무방비 도시>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나쁜 여자’가 된다. 스릴러물인 <백야행>(2009)을 지나 재난 영화인 <타워>(2012), 그리고 심리극인 <공범>(2013)까지 훑고 나면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손예진,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배우지?

“여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처음에는 공감하지 못했어요. 작품이 열 개 들어오든, 두 개 들어오든 결국 하나의 작품을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정말로 선택의 폭이 좁다는 걸 느껴요. 로맨스나 멜로물도 많이 안 만들어지잖아요. 남자들이 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많고요. 여배우가 작품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작품이 안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되도록 작품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겨요.”


<해적>에서 고독한 여인의 향기 품은 여월 역


태풍 후라 더 고온다습한 늦여름,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손예진을 만났다. 이야기 틈으로 툭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가 청량했다. 이번에 출연한 영화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다. 선량한 눈매에는 아이라인을 짙게 그려 넣어 음영을 주었다. 복잡한 심리 묘사는 대사나 눈빛이 아닌 와이어 액션과 검술로 대신했다. 조선 건국 후 10년이 흐르도록 ‘국새가 없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시작된 영화. “국새를 찾는 자, 천하를 호령하리라”는 구호 아래 해적의 무리와 산적의 무리가 모였다. 손예진이 맡은 ‘여월’은 여린 여자의 몸으로 해적단 대단주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이익보다 의리를, 출세보다 형제를 선택하는 ‘상여자(?)’.

“제가 체구가 작은 편이라 보는 분들이 불안하게 느껴질까 걱정했어요. 믿음직스럽고 카리스마 있는 그러면서도 왠지 고독해 보이는 해적으로 보이길 원했거든요. 실제로 여월은 멋있는 인물이고 남자들 무리 속에서 홀로 견뎌야 하는 순간도 있었으니까요. 자료가 없어서 여월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일 고민했어요. 어떤 옷을 입었을까, 어떻게 머리를 했을까. 너무 캐리비안 해적 느낌이 아닌 그렇다고 또 너무 동양스럽지 않은 인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벽란도 장면에서 입는 옷은 저랑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시장을 다니면서 만든 거예요.”

평소 손예진은 “나에게서 1%라도 발견할 수 있는 면이 있다면 그 역할을 하게 된다”고 했는데, 손예진에게서 여월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해적>의 촬영은 엄동설한에 이뤄졌고 대부분의 촬영이 물속이나 물위에서 진행됐다. 미술팀장을 맡았던 김지아 감독은 손예진을 “같은 나이인데 여배우에 대한 편견을 깨준 배우”라고 했다. 컴퓨터 그래픽을 맡았던 강충익 감독은 “모두가 숙소에 쓰러져 있을 때 손예진씨만 홀로 남아 CG의 마무리 작업에 함께했다”고 했고, 이석훈 감독은 “손예진은 한번 배를 타면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쩌다 주어진 휴식시간에도 동료 해적(?)들과 배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원래 제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잘 안 옮겨요(웃음). 산적팀은 아무래도 땅 위에서 촬영하다 보니까 따로 시간을 가질 기회도 많았다고 하는데, 저희 해적팀은 지금도 아쉬운 게 한 번도 회식을 못 했어요. 세트장이 야외여서 현장에 제약이 많았거든요. 액션 한 번 찍고 나면 다들 뜨거운 물 생각만 간절한 거예요. 시간을 최대한 절약해서 고생을 줄이는 게 급선무였어요. 촬영할 때는 ‘다신 액션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 찍고 나니까 ‘겨울엔 하지 말아야지’ 정도로 바뀌었어요(웃음).”

손예진이 ‘의리의 아이콘’인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999년 데뷔 이래 15년 동안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의 김민숙 대표와 함께했다. 대구에서 여중과 여고를 나온 손예진은 고등학교 시절 하루에 두 시간씩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연기수업을 받았다. 그때부터 맺은 인연이 톱배우가 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민이 왜 없었겠느냐마는 한번 뿌리를 내린 나무가 바람 탓, 토양 탓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고민의 순간마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고 했다. 손예진은 자신이 다른 건 몰라도 ‘우직함’은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문득 궁금했다. 대구라는 (본인 표현에 따르면) 보수적인 고장에서 자란 이 내성적인 소녀는 어떻게 배우의 꿈을 꾸게 되었을까.

“와핫, 그러게요. 대구에는 생각보다 연예인이 별로 없어요. 근처에 김제동 오빠 정도인데, 오빠는 좀 더 시골이고요(웃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제가 좀 애늙은이에다 생각이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 누가 놀러오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한참 관찰했어요. 낯을 많이 가려서 옆에 가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는 못했고요.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해도 혼자 말없이 서너 시간을 놀곤 했대요. 같이 놀던 아이가 재미없다고 갈 정도로(웃음).”


“서른이 넘으니 타인의 삶에 관심, 후배들에게 도움 주고 싶다”


손예진은 막 혼자 하던 소꿉놀이를 끝낸 참이다. 20대의 손예진은 ‘배우’ 손예진이 전부였다. 작품이 전부였고, 일이 전부였다. 신비주의라는 오해도 받았지만 해명할 여력이 없었다. 이제는 주변이 보인다. 틈틈이 여행을 다니고, 길게 수영을 하고, 또래의 배우들을 만나고, 가끔은 자기와 비슷한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도 건넨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줄곧 주목받는 삶을 살고 있는 20대 초반의 걸그룹이나 청순 혹은 가련한 이미지에 갇힌 후배 배우들을 만나면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저는 데뷔하자마자 거의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남자 선배님들이랑 작업해서 조언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최)민식 선배님, (설)경구 선배님, (감)우성 오빠, 지진희 오빠… 송승헌씨나 정우성씨도 저보다 훨씬 선배였고요. 물론 배울 점도 많지만, 여배우는 남자 배우들처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는 벽이 있어요. 굵은 주름은 남자 배우에게는 멋일 수 있지만 여배우는 그렇지 않거든요. 후배들도 아마 이 말이 다는 이해가 안 될 거예요. 그래도 언젠가 ‘아, 그 말이 었구나’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그 친구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해적> 촬영을 마친 후 손예진의 이색 행보 중 하나는 <무한도전> 출연이었다. 무도 멤버들과 함께 응원연습을 하고 브라질 월드컵 응원에도 참여했다. 그중 인상적인 장면은 손예진의 ‘몰래카메라’. 함께 출연한 배우 정일우와 기싸움을 하더니 “나 이 연습 힘들어서 못 하겠다”며 홀연히 사라진다. 멤버들을 향한 몰카이기도 했지만, 대중이 갖고 있는 오해와 편견에 대한 역습이기도 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속았어요?”라고 외친 손예진은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에 임했다. 대중에게 오해할 권리가 있고 배우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다면, 손예진은 이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참이다. ‘청순한 이미지의 대명사’인 손예진이 줄을 타고 바다 위를 날며 연검을 찌른다. 그 활강이 끝날 즈음이면 또 어떤 얼굴의 손예진을 만나게 될까. 아직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 201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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