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알제리 파이팅!

그랬던 것 같다. 해 질 무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검정 봉지. 그 안에는 관절에 무리가 있는 듯한, 눈동자에 초롱초롱한 다이아몬드조차 서려 있지 않은 슛돌이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부시럭부시럭 엄마는 그걸 내 몸에 입혔고, 나는 유치원 동기동창 영환이가 입고 있던 눈이 초롱초롱한 슛돌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 이거 아니야.”

그 언저리부터 축구는 내 인생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분당신도시 개발정책으로 이 지역 초등학교는 몰려드는 전학생들로 붐볐고, 신설된 반의 초반 분위기는 사뭇 서먹했다. 점심 시간. 한 코트에서 12개의 축구 경기가 동시에 이뤄진다. 우리반 대 3반의 친선경기. 1대 1로 긴장되는 경기가 진행됐고, 경기 종료 직전 나는 결승골로 사뭇 서먹했던 우리 반의 수컷들을 대동단결하게 만들었다. 헤딩으로 멋지게 골문을 가른 순간, 우리 반의 1짱부터 11짱까지 대동단결하여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축구를 못 하는 수비수였고, 날아오는 볼을 멋지게 우리 진영 골대로 맞춰 넣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머리와, 내 머리에 와서 맞은 공과, 그걸 막지 못한 골키퍼와, 날 욕하는 수많은 6반의 학우들과, 한 코트에서 200명 남짓한 초딩들이 동시에 축구를 해야 하는 이 열악한 현실과, 분당신도시 개발정책을 승인한 대통령과, 축구를 만든 놈, 그 옆에서 축구를 만들라고 부추긴 놈, 그 놈의 마누라, 그 마누라의 전 남친, 전부 다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1년 반을 나는 중탑초등학교에서 축구 못 하는 애로 살았다.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3개월 후, 대한민국에선 월드컵이 열렸다. 내가 좋아하는 하석주가 나오지 않았으니 이번 월드컵도 망했다고 생각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하석주가 없어도 4강에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4강에 간 것도 충격인데, 서울이란 동네에선 거리응원을 한다는 것에 17세 소년은 충격을 받았다. 옆에 있는 모르는 여자와 껴안고 뽀뽀를 하고 막 그러고 그런다는 소문을 들은 사춘기 소년은 충격을 받았다. 홍명보가 엘라스틴을 자랑하며 마지막 승부차기를 넣은 그 순간, 내 친구는 옆에 있는 붉은악마 동기동창 여자애랑 막 껴안고 막 그랬단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4년 후 나는 분기탱천하여 거리 응원에 나섰다. 스위스전이었다.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두 번째 골을 먹었을 땐, 내 옆에 있던 여자가 심판에게 전에 들을 수 없던 상욕을 하더라.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야이, XX!@#CXX!@%%!@ Off Side!?@!#FLYFLYGetemupHigH!!”

“엄마, 이거 무서워.”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는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갔다 온 친구가 하나 있었다. 장군의 아들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우리는 그를 ‘브라질’이라고 불렀고 ‘브라질’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 나는 축구도 못 하는데 고려대 법대도 못 갔다. 축구는 내 인생과 그렇게 궁합이 안 맞았다.

난 야구를 좋아한다. 내 몸엔 주황 피가 흐를 정도로 한화이글스의 골수팬이고, 그래서 야구를 잘 안 본다. 야구에 미치지 말라고 이글스가 도와주나보다. 모든 게 이글스의 뜻이다. 아무튼 야구를 잘 안 보게 되는 틈을 노려 브라질월드컵이 열렸다.

“메시의 드리블은 허재의 그것과도 같지.” “호날두의 프리킥은 마치 니 머리 같아, 무회전이지.” “넌 반 페르시 같아. 잘 주워 먹지.” “넌 도니스 에스코베르 같아. 누군지 모르겠어.” “난 이번에도 하석주의 마법 같은 왼발을 기대해.”

이런저런 기대감으로 월드컵을 맞이한 나는 또 충격을 받았다. 알제리 니들이 우승해라. 그래야 우리가 좀 덜 창피하다는 마음이다(그런데 알제리의 16강 상대는 독ㅋ일ㅋ). 태극전사들 호텔에 수맥이 흘렀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을 탓하기엔 내가 축구를 너무 못 한다. 결과야 어찌 됐든 더운 나라에서 몸고생 마음고생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다. 윤하 콘서트 가서 우연히 본 손흥민·김신욱 선수, 하석주의 마법 같은 왼발 슈터링만 있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내 인생은 축구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집 앞 종합운동장이 홈구장인 축구팀은 세계에서 유니폼이 제일 후지고, 우리 집 개는 축구공만 보면 물어뜯으려고 한다. 어서 빨리 이 축구 이야기를 끝내야겠다.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는 날엔 우승팀이 결정이 났겠다. 그리고 난 지금 그게 알제리였으면 좋겠다.

박정민은 영화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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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오아   ( 2017-03-26 ) 찬성 : 7 반대 : 4
브라질 분은 지금 패션회사에 다니시고 술한잔 하자고 하셨던 힘드냐고 물어봐 주신 그분이군요 글을 읽다보니 정민님의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것 같아 줄겁네요 비록 그학교는 남고지만요 흐흐
  bohya   ( 2016-04-28 ) 찬성 : 14 반대 : 23
전철에서 진짜 말 그대로 '빵' 터졌어요.
 어제보다 신나는 출근길이네요 :)
     ( 2016-02-21 ) 찬성 : 21 반대 : 12
ㅋㅋㅋㅋ 잘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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