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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의 한 수>에서 팜므파탈로 변신

배우 이시영

배우의 변신은 물론 무죄다. 특히나 여배우의 팜므파탈 시도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쉼 없는 반추의 결과라면, 매일 링 위에서 복싱으로 단련하는 여배우의 변신일 때 관객에게 전해오는 울림은 그 깊이가 다르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그간의 건강한 몸짓과 쾌활한 웃음을 말끔히 지우고 비애감 풍기는 섹시 히로인으로 우리 앞에 선 배우 이시영 얘기다.
주고받을수록 필자를 자신의 세계 안으로 초대하는 그녀, 대할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이시영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7월 3일 영화 개봉에 앞서 세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깐깐한 눈초리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영화를 보는 기자들 앞에 첫선을 보이는 시사회가 끝난 메가박스동대문의 카페에서, 그리고 이어진 맥주를 사이에 두고 수다를 나누는 미디어데이에서,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마침표 모르는 통화를 했다.

이시영은 <신의 한 수>에서 ‘배꼽’을 연기했다. 정우성을 축으로 하는 선의 진영, 이범수를 중심으로 한 악의 진영으로 단순화하자면 배꼽은 악에 속한다. 하지만 숨겨진 사연이 있고 비밀이 있다. 두 진영을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다. 때로 살수(이범수)의 여자로 보이고, 어느 순간 태석(정우성)의 마음을 훔치고, 태석을 무너뜨리는 살수의 특급 살인병기로 쓰이지만 눈빛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영화 <홍길동의 후예> <위험한 상견례> <남자사용설명서>의 쾌활함을 지웠네요. 이시영의 섹시 변신, 인상적이에요.

“배꼽의 임팩트가 크진 않아서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에요. 중간에 사라지는 역할이기도 하고, 최진혁 씨(선수 역)는 더 먼저 죽지만 임팩트가 강한데, 저는 약해서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겠다, 진짜 그거 하나로 선택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요즘 여자배우는 영화를 만나기 어려워요. 모든 게 만족되는 작품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택한 부분도 솔직히 있고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연기했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봤어요. 웃음기를 지운 이시영이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강렬했어요. 중간에 사라지다뇨, 끝까지 잘 봤어요. 일찌감치 중규모의 영화를 책임지는 여주인공 혹은 원톱 주연의 영화들을 해왔어요. 이번엔 멀티 캐스팅 영화네요.

“<남자사용설명서>와 <더 웹툰: 예고살인>을 하면서 느낀 건데요. 저 혼자 끌어가는 영화를 하다 보니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주인공의 역할이자 부담감이잖아요. 저보다는 작품의 기본과 전체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여러 배우가 같이 책임지는 영화, 한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해보니 장단점이 있어요. 여러 명이 주인공이니까 즐기면서 할 수 있었어요, 부담감도 덜했고요. 선배님들 연기하는 거 구경 많이 했어요, 많이 배웠죠. (단점의 측면을 보자면)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서일 텐데, 저는 역시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있지만 희열이 큰 기존의 방식이 맞는 것 같아요. 가슴 벅차고,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도 있고…. 그렇지만 이번에 멀티캐스팅의 매력을 알았기에 종종 시도해보고 싶어요.”



팜므파탈, 멀티캐스팅, 여기에 보태 기존과 다른 것 하나 더 질문할게요. 시영씨 특유의 발화 어투가 있는데 이번에 전혀 없네요. 왜 있잖아요, 살짝 입술 부딪히며 나는 순음 같은 소리요.

“아, 느끼셨어요? 다행이네요(휴우). 딕션(발음)을 제일 많이 연습했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요. 차가우면서도 우수에 찬 캐릭터가 처음이라 억양 하나, 말투 하나에 곤두섰죠. 표정 연습도 많이 했어요, 거울 보고. (결과가) 저 스스로는 많이 아쉬워요. 시사회에선 늘 그렇지만 ‘저 신, 왜 저렇게 찍었지?’ ‘릴랙스하며 놀면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요. 하정우 선배님, 그렇게 하시잖아요.”


표정 연습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요. 데뷔 8년 차잖아요. 아직도 표정 연습하나요(이시영은 2008년 수퍼 액션 드라마 <도시괴담 데자뷰 시즌3-신드롬>으로 데뷔했다).

“연기한 후 모니터 보잖아요. 의도한 대로 나왔나, 잘했나 봐야 하니까요. 정말 놀랐던 게, 저는 무표정 연기를 했는데 모니터에는 찡그린 표정으로 나오는 거예요. 되레 살짝 웃어야 무표정으로 보이고요. 자연인 이시영의 표정과 배역 사이에도 간극이 있지만, 자연인 이시영과 배우 이시영 사이에도 불일치 지점이 있었던 거죠. 고개만 해도 저는 똑바로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살짝 한쪽으로 기울 수 있고요. 물론 일부러 살짝 웃어 무표정을 연기하고, 고개를 삐딱하게 해서 꼿꼿한 모습을 연출하는 게 제 자연감정과 일치하지 않긴 해요. 그러나 배역의 연기감정에 따르는 게 맞다고 봐요. 어떻게 보이든 내 감정에 충실해서 연기했다, 이게 배우로서 역할을 다한 건 아니라는 거죠. 관객이 그렇게 보시도록 배역의 감정을 연기하는 것, 그게 배우의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아직 마스터하지 못했고 노력의 과정에 있지만요.”


모든 배우가 이런 고민들을 하지는 않을 걸요? 본인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발견과 연습을 통해 일치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싶어요. 연습 얘기 재미있네요. <신의 한 수>에 프로바둑기사 출신으로 등장하니 연습이 필요했겠어요.

“바둑돌 놓는 연습만 두 달 넘게 했어요. 바둑알을 집어서 그냥 놓는 건 줄 알았어요. 아니더라고요. (손으로 시연하며) 엄지와 검지로 바둑알을 집어서 한 바퀴 돌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후 (바둑판에) 놓더라고요. 프로기사다워 보여야 하잖아요. 틈만 나면 TV를 보면서도 계속 바둑돌을 쥐었어요. 돌 하나 놓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돌과 돌 사이에 살포시 놓아야 할 때도 있고, 부러 소리를 내며 놓아야 할 때도 있어요. 기분 좋았던 건, 영화에 제 손이 많이 쓰였다네요. 배우들이 아무리 연습한다 해도 프로들의 대역이 필요했는데, 배꼽 분량에 제 손을 많이 쓰셨다는 (조범구) 감독님 말씀 듣고 너무 좋았어요. 제가 왼손잡이거든요. 대역은 오른손잡이라 그에 맞춰 오른손 연습을 했기에 보람이 더 커요.”



본인 연기에 박한 평가를 내리더니, 손 연기는 좀 마음에 들었나봐요(웃음).

“(지난 6월 19일 종영한) 드라마 <골든크로스> 찍고 나서 배꼽을 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정극에 쏟아내는 것도 배우고, 개인적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된 드라마예요. 훨씬 자신감 있게 잘했을 텐데, ‘요거 이시영, 배꼽 아쉽다’ 하고 다음 영화에서 안 써주면 어떡하나 걱정이에요. 할 때 잘해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해야 하는데 아쉬워요.”


충분히 잘했어요. 홍일점 이시영 빼곤 <신의 한 수>에 남자배우가 많네요. 남자들 얘기 좀 해볼까요. 촌평 부탁할게요.

“음, 정우성 선배님은 ‘웃긴 남자’예요. 그렇게 잘 생겨서 그렇게 웃길 줄 몰랐어요. 촬영장 전체를 편안하게 부드럽게 해줬어요. 재미있는 말을 너무 잘하세요. 안성기 선배님은 정말 온화하세요. 어쩜 그리 여유로우신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촬영 오늘 끝내면 좋고 아님 내일 더 찍으면 되고…. 정말 너그러운 분이에요. (이)범수 오빠는 <홍길동의 후예>를 함께하면서 느꼈지만 타고난 코미디언이에요. 말도 재밌지만 그 살아 있는 표정이라니. 오빠가 말만 하면 저는 그냥 웃음이 나요. 최진혁씨와는 딱 한 번 촬영했어요. 주변에서 얘기 들어왔고, 드라마 <응급남녀> 재미있게 봐서 같이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번에 제대로 연기호흡 못 하고 인사 정도만 나눴네요. 다시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최진혁씨와의 호흡도 좋지만, 정우성씨는 어때요? 키스신을 보니 두 사람 화학작용이 좋던데, 제대로 멜로영화 해볼 생각 있나요?

“(키스신이) 너무 짧게 나와서 배꼽과 태석의 감정이 관객에게 다 보일지 의문이에요. 몇 초 차이인데 굳이 잘랐어야 했나, 아쉬워요. 두 사람 특히 배꼽의 감정라인이 보이는 유일한 신이어서 더 애착이 가나봐요. 모니터하면서 보니 좋았거든요. ‘두 남녀가 키스를 한다’ 정도만 전달되는 건 아닌지…. 물론 <신의 한 수>가 태석의 복수극인 걸 알고, 그래서 배꼽의 감정이 드러나기를 저 역시 원치 않았어요. 담백하게 보이길 바라며 연기했고, 키스신이라고 해서 뜬금없이 멜로로 가면 연기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납득이 안 된다는 것 잘 알죠. 앞으로 이런 역할 맡으면 욕심나는 한 장면 정도에 대해선 더 신경 쓰고 주장해야겠다 생각했어요(웃음).”

“정우성 선배님이요? 기회 되면 저야 너무 좋죠. 해보니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다 싶고(웃음). 선배님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 있잖아요. 대사를 하지 않아도 풍기는 분위기와 특유의 눈빛, 말하지 않아도 좋은 미소와 아우라 넘치는 제스처… 너무 좋아요. 멜로 하기에 굉장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그래서 <신의 한 수>가 범죄 액션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베드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편집인가요, 신 삭제인가요?

“아예 촬영하지 않았어요. 했다 해도 베드신은 애초부터 대역의 몫이었어요. 살수가 사우나에서 휴대전화 액정으로 태석과 배꼽의 정사 장면을 보는 신에 쓰일 예정이었고, 몸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을 거라 대역이 하기로 돼 있었어요. 감독님 말씀으로는 키스신으로 두 사람의 감정이 다 나왔다, 굳이 베드신 필요 없겠다 하셨어요. 그러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웃음).”


네, 두 사람의 멜로 호흡에 대한 기대는 잠시 참고 저축해둘게요. 요즘 배우 이시영으로서 가장 큰 고민은 뭔가요. 마지막 질문이 되겠네요.

“정말 하고 싶은 연기가 뭘까,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늘 고민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뭔가 배우로서 터질 수 있는 걸 가지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그 정도는 자인하니 배우를 계속하는 걸 거예요. 다만 저 혼자 터뜨리기는 힘든 것 같아요. 굉장히 어린 나이라면 언젠가 터뜨릴 수 있는 내공이나 깨달음을 얻겠지 스스로 위안해보겠지만, 생각보다 제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혼자 터뜨리려고 마흔 넘어 발화하기보다 남이 건드려서 작용, 반작용으로 보다 일찍 터뜨릴 수 있다면 저는 후자를 원하거든요. 좋은 감독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예요.

저는 상대 배우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제가 연기할 때 (상대가) 본인 장면 아니라고 시선 다른 데 보고 있으면 집중력이 깨지는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상대 배우가 지쳐서 다른 데 볼 수 있고, 흔히 그렇게 하잖아요. 제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장면일 때도 저는 열심히 대사 쳐주려 노력해요. 나 혼자만의 표현인데, 제가 할 때도 이렇게 해달라는 발버둥이에요. 그래서 저 혼자 서운해하기도 해요, (상대 배우가) 눈치 못 채면요.”


나 혼자 다할 수 있다는 태도의 배우들보다 좋은데요. 그래요, 훌륭한 감독들 만나 이시영이라는 배우가 어떻게 꽃피는지 저도 보고 싶네요.

“상대 배우와 감독이 중요한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출연 분량이 많지 않다 해도 <신의 한 수>처럼 대작에 출연하고 싶은 거예요. 좋은 감독님과 좋은 배우가 나를 어떻게 바꿔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죠. 제가 아직 모르는 ‘그게’ 나올까, 항상 기대해요. 누군가 건드려주면 새로운 자극제가 되거든요. ‘나한테 이런 게 있었어?’ ‘내가 이런 게 되는구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모르는 배우 이시영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배우 이시영이 처한 2014년 한국영화의 현실은 여배우에게 녹록지 않다. 쏟아지는 영화들은 남자가 주연부터 단역까지 휩쓴 남자들의 이야기가 거의 전부다. 제작 규모가 클수록 남배우 편중 현상은 심하다. 복싱으로 다져진 권투선수 이시영의 건강한 몸을 십분 활용한 경쾌한 액션 영화는 진정 꿈일까. 은퇴를 선언한 안젤리나 졸리, 아직은 노익장을 과시 중인 캐머런 디아즈와 산드라 블록을 대신해 여기 한국의 이시영을 주목해달라고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리는 게 빠를까. 액션 대작에서 환히 웃는 배우 이시영의 내일을 기대한다.
  • 201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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