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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정우, 화가 김성훈의
양쪽 얼굴

어린 김성훈은 화가가 될 줄 몰랐다. 배우가 되리라고도 확신하지 않았지만, 화가는 좀 더 멀었다. 그림이 그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은 연기를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대학 시절, 연기하지 않는 순간에 무엇을 ‘할’ 필요를 느꼈고 그 갈증이 그림이 됐다. 낙서와 여백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어린이는 연기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해냈다.
연기로든, 그림으로든 한순간도 자신을 토해내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김성훈 혹은 하정우에 관한 이야기. 그림을 프리즘 삼아 풀어보자. 2월 28일까지 서울 청담동 까르디에 메종, 3월 5일까지 이태원동 표갤러리에서 만났던 작가 하정우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를 화제로 삼았다. ‘작가’ 하정우의 답은 명쾌하면서도 겸손했다. 이야기는 각별한 사연과 애착을 가진 영화 〈베를린〉으로 시작했다.
‘베를린’

‘베를린’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림은 실제로 베를린에서 그려졌다. 2012년, 영화 〈베를린〉을 베를린에서 촬영할 때의 일이다.

그림 ‘베를린’에는 유난히 선이 많다. 촘촘하게 그은 선으로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들 안에 우주를 담아내는 게 하정우 작품의 특징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게 유난히 두드러진다.

“영화 〈베를린〉에는 액션 신도 많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정예 요원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에요. 마음을 바로잡고 달래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과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어요. 연속해서 선을 그으며 극 중 표종성을 제 안에 담았습니다.”

Berlin_ 178×139cm, Acrylic, Pen on Canvas, 2012
당시 베를린에 있던 영화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베를린〉의 촬영 현장에는 ‘날’이 서 있었다. 위험천만한 촬영이 계속됐고 한석규·하정우·류승범, 누구 하나 대충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터라 ‘저러다 진짜로 다치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실감나게 ‘액션’을 했다고 한다. 연기로 시퍼렇게 선 ‘날’들을 다스리고, 다음 날 촬영을 위해 새로이 ‘날’을 세우는 마음으로 선을 긋고 또 그었을 하정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베를린에 7주 있었는데, 6주 정도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린 작품이에요. 제목 그대로 ‘베를린’ 자체입니다. 그 뒤 라트리아로 넘어가서 8주를 더 있었어요. 독일에 체류하는 15주 동안 큰 것 2개, 소품 20개 정도 그렸는데 그 작품들로 지난해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어요. (하정우가 한국의 배우인 걸 모르는 상황임에도) 기대보다 반응이 좋아 거의 다 팔렸어요. 독일에서 그린 그림 중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베를린’이 유일해요. 지금 보시는 ‘무제’는 라트비아에서 그린 건데요, ‘베를린’보다 더 커요. 그래서 꽤 오래 제 곁에 있겠구나, 싶었는데 뉴욕 전시회 뒤에 열린 파리 아트페어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났어요. 유일하게 하나 남은 거라 그런지 ‘베를린’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무제
‘무제’ 속 남자는 영화 〈베를린〉의 동명수(류승범)를 닮았다. ‘베를린’에서는 어쩐지 두 남자가 느껴진다.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

“평소 그림을 그릴 때 대칭으로 그리지 않아요, 한 사람을 그려도 좌우가 같지 않고요. 그런데 ‘베를린’에는 확실히 표종성과 하정우 혹은 하정우와 김성훈이 담겼어요. 내가 원하는 모습과 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모습일 수도 있고, 무의식과 의식이 동시에 표현된 것일 수도 있고요.”

〈베를린〉의 남자주인공 표종성 vs 그를 연기하는 배우 하정우. 다양한 캐릭터를 옮겨가며 표현하는 배우 하정우 vs 배우 이전에 언제나 존재하는 본연의 자아 김성훈. 필자의 눈은 점점 ‘베를린’ 선 안의 세계로 초대되고 있었다.


‘브라더스’

Brothers_ 142×86cm, Acrylic, Pen on Canvas, 2013
뿔을 가진 개성 넘치는 세 남자가 있다. 귀는 시작과 끝에만 있다. 귀에서 귀로 이야기가 흐른다. 사람을 거치며 이야기의 모습은 달라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세 사람은 생각을 공유하고 인생을 나눠 가진다.

세 남자는 형제처럼 닮아간다. 하정우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훈이형’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성훈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정우씨’ ‘정우야’ ‘하 배우’ ‘하 감독’ ‘하 작가’… 그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의 수만큼 호칭도 많다. ‘브라더스’를 보노라면 하정우가 사람을 만나고, 만나서 신뢰를 쌓고, 신뢰를 넘어 형제처럼 친해지는 방법이 보인다. 그래, 김성훈 또는 하정우의 곁에는 사람이 있고 대화가 있다.

“멋진 해석이에요.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피를 나누는 거라고 생각해요. 귀를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을 한다면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그림은 2013년 3월 하와이에서 그렸어요. 생일(그의 생일은 3월 11일이다)을 맞아 혼자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그리웠어요. 한국에 있을 내 형제들이요. 영화 〈대부〉의 그런 형제, 브라더처럼 제겐 가족 같은 사람들이죠.”


‘하와이 페스티벌’

Hawaii festival_ 84×69cm, Acrylic, Pen on Canvas, 2013
“하와이에서의 휴식, 먹고 냄새 맡은 하와이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그림이에요. 여행을 가면 누구나 로맨스를 꿈꾸지 않나요? 그래서 여인이 등장했나봐요(웃음). 저의 여행은 주로 산책하고, 먹고 뒹굴고, 쉬고, 그림 그리는 거예요.”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촬영을 마친 시점이다. 하정우는 영화 촬영을 마치고 곧잘 하와이를 찾는다. 직장인처럼 쉼 없이 일을 해가는 그에게 영화 사이의 ‘망중한’은 꿀맛 같은 쉼표다.

“〈더 테러 라이브〉를 끝내고 머리를 샛노란색으로 물들인 때였어요. 〈군도〉에 헤드스킨이 예정돼 있었던 만큼 찍기 전에 탈색하고 싶었거든요. 〈베를린〉은 개봉하고, 〈더 테러…〉 촬영은 끝났고, 〈군도〉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달까요. 그런 밝은 느낌의 일탈이 그림에 묻어났네요.”


‘머니 트리’

Money Tree_ 100×56cm, Acrylic, Pen on Canvas, 2013
주연과 연출을 맡은 〈허삼관 매혈기〉를 준비 중인 두타연(하정우의 소속사가 설립한 판타지오픽쳐스와 공동 제작) 사무실에 가본 적이 있다. 1층에 음식점이 있는 건물의 2층, 작은 사무실에 소담하게 감독의 방이 차려졌다. 아담한 공간 곳곳에 크고 작은 화분이 놓여 있다. 영화 시작을 축하하며 지인들이 보내준 나무들, 난초, 꽃….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 스스로 옮겨 심었다는 허브 화분들이다. 로즈메리를 비롯해 미처 이름을 묻지 못한 허브 삼형제가 감독의 책상 앞을 지키고 섰다.

“좋아하는 자연과 떨어져 살잖아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다보면요. 그래서 꽃과 나무를 많이 그리나봐요. 이 그림은 저희 집(남동생과 둘이 살고 있다) 화장실 벽에 붙여놓고 그린 그림이에요. 화장실은 어두우니까 나무를 놓을 수 없잖아요. 그림으로라도 하나 키워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만난 그림입니다.”

화장실에 두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그림이라고 화장실에 붙여두고 그리다니, 하정우답다.

그림 ‘머니 트리’가 하정우와 닮은 또 한 가지. 제목부터 그림 구석구석 배려의 마음이 가득하다. 사람으로 치면 관계 맺은 상대, 영화로 치면 작은 배역까지 모두 함께 주목받기를 바라는 그의 배려가 그림에서도 보인다. 먼저 “다른 사람 손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자를 위해 ‘돈 많이 벌라’고 희망적 메시지를 담아” 지었다는 제목 ‘머니 트리’에도, 이파리 사이에 가려지기 일쑤인 나뭇가지들에 검은 보타이 같은 잎을 달아 레드카펫에 선 남자배우마냥 돋보이게 한 센스에도 인간미가 넘친다. 화분 오른쪽 아래 붙은 귀퉁이 살은 배려의 절정이다. 마치 왼편에서 비친 햇살에 생긴 그림자처럼 보여 눈길을 붙드는데, 햇빛을 당겨와 화폭의 생명력을 강화했다는 측면보다 그저 살아 있는 것들을 품은 죽은 그릇으로 여겨지기 십상인 화분에까지 관람객의 눈길을 머무르게 했다는 따뜻함이 주는 감동이 더 크다.


‘portrait’

portrait_ 175.5×146cm, Acrylic, Pen on Canvas, 2013
하정우는 2013년 말, 다시 하와이를 찾았다. 10개월에 걸친 영화 〈군도〉의 지난한 촬영을 마친 뒤였다. 〈군도〉 촬영 중 주연작

〈더 테러 라이브〉의 개봉이 있었고,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를 공개했기에 지방 촬영 중에도 영화홍보를 위해 틈틈이 서울에 올라와야 했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영화 여정은 〈더 테러 라이브〉 〈롤러코스터〉를 거쳐 〈군도〉로 이어지며 2년의 시간 동안 하정우를 폭풍처럼 몰아쳤다. 하와이를 찾기 전 그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고 “5개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겠노라”고, “대중 앞에서 사라지겠노라”고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까. 짐작했듯 물론 아니다.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한 탓이었는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1주일을 먹지도 못하고 내리 잠만 자며 앓았다는 그는 죽을 것같이 목이 마르면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어 물만 꺼내 마셨단다. 그러고는 갑자기 몰려온 식욕에 다시 내리 1주일을 커다란 버거를 폭풍 흡입하며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하정우는 다시 일어섰고 일을 시작했다. 〈허삼관 매혈기〉 시나리오 작업부터 배우 캐스팅, 일을 함께하고 부탁할 스태프들을 찾아 인사하는 것까지 여느 감독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허삼관 매혈기〉로 진입하기 전, 화가로서 2년에 걸쳐 자신을 괴롭힌 그림을 마무리했다. ‘큰 산’을 연거푸 넘은 듯 고단했던 2년의 영화 여정에 ‘마침표’를 찍듯 말이다. 그게 ‘portrait’다. 흔히 어깨까지의 인물화를 말하는 portrait, 오래도록 그의 손끝을 떠나지 않았던 이 그림은 자화상이다.

“그림 연도 ‘2013’ 아래에 보면 작게 ‘2012~2014’라고 적혀 있어요. 베를린과 라트비아에서의 촬영을 끝내고 오자마자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에요. 이렇게 끝내지지 않은 그림이 없어요. 〈허삼관…〉으로 출근하기 전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와이 다녀와서 끝냈네요. 이 그림이 그려진 기간은 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바쁘고 정신없었던 시기예요.

〈베를린〉을 끝내고, 〈롤러코스터〉가 시작되고, 〈더 테러…〉 찍고, 〈군도〉를 찍고, (〈군도〉를 제외한 세 영화를) 개봉들을 했죠.

한 사이클 돈 느낌이에요. 인생 자체가 하나의 큰 사이클이지만 그 안에도 또 작은 사이클들이 있잖아요. 그림을 끝내며 ‘아, 2년 안에서 작은 사이클이 하나 돌았구나’ 감회가 몰려오더라고요.”

분홍빛 얼굴, 붉은 입술이 강렬하다. “이제 다시 뭔가가 시작되겠다 싶은 기대, 설렘이 담긴 거예요. 스테로이드와 열정이 올라오는 상태, 빨강은 열정과 젊음의 색깔이고요. 흥분 상태랄까요. 선과 패턴과 컬러로 저의 그런 심리가 표현된 게 아닌가 싶어요”.


못 다한 이야기

연기 인생의 쉼표 시간을 이용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지만 이제는 북미, 유럽, 동남아에서 전시 초대를 받는 어엿한 화가가 됐다. ‘배우가 그리는 그림’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고 얻은 결과라 더욱 뜻깊다. 훈장을 달고 무거워진 어깨, 그의 초심도 달라졌을까.

“그림으로 기교를 부리거나 무엇을 숨기거나 하고 싶지 않아요. 잘 그리려고 멋 부리고 싶지 않고요. 연기도, 영화도 과하지 않게…. 80점 정도의 연기가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요.”

“나이를 먹는 것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신중해지고 노련해지는 것처럼 제 그림에도 더 울림이 생기지 않을까요? 전문적으로 그리시는 작가 분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초라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음으로 일기를 쓰듯 순수한 작업이어서예요. 배우 생활을 점검하고 반성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의식을 올리는 시간이 제게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입니다.”

글 홍종선
  • 201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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