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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설국열차〉의 소녀,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보여준
배우 고아성

‘봉준호 세계’로의 여행은 지금까지 갓 스물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결정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40대 젊은 거장의 탁월한 미학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빚어낸 그곳, 〈괴물〉의 한강 둔치엔 한국 대중영화의 최전선이 있었다.
길게 꼬리를 물고 미래의 빙하기를 달리는 〈설국열차〉에선 인류의 묵시록으로 시공간을 확장한 봉준호의 상상력과 대면했다.
그곳엔 또한 인생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불러내 걸진 놀이판을 벌이는 당대 최고의 광대, ‘송강호의 세계’가 함께 있었고, 먼 곳으로부터 초대받아온 이방의 명배우, 이를테면 ‘틸다 스윈튼의 세계’도 있었다.
거목들로 우거진 거대한 숲 같은 이 세계에서 여배우 고아성(22)은 길을 잃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좋은 기운을 마음껏 호흡하며 자랐다.
아역배우로 데뷔해 열네 살 여중생 시절 〈괴물〉에 출연했고, 〈설국열차〉와 함께하며 성년을 맞았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긴 터널을 지나 봉준호의 세계가 아닌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주연을 맡아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고아성이 봉준호와 송강호의 후광을 입지 않고도 얼마나 독보적인 배우가 될 수 있는지, 그가 앞으로 승부를 펼칠 연기의 세계가 얼마나 흥미진진할지를 입증한 첫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고아성의 연기는 봉준호와 송강호의 세계로부터 내린 뿌리가 얼마나 굵고 튼실하며, 만만치 않은지를 보여준다. 〈설국열차〉가 개봉했던 지난해 8월 만났던 고아성은 에둘러 가는 법 없이 딱 한마디로 배우로서의 지향을 표현했다. “배우로서 진정한 삶은 30대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됐을 때, 송강호 선배와 봉준호 감독의 기대에 미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지난 3월 초 반년여 만에 만난 고아성은 비를 만난 대나무 싹처럼 또 훌쩍 커 있었다. 〈괴물〉의 ‘현서’도, 〈설국열차〉의 ‘요나’도,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모두 자신의 한구석 어디론가에 살포시 품은 채, 봄날을 맞은 화사할 뿐 아니라 유달리 영특하고 성숙한 20대 청춘의 모습이었다. 파스텔 톤으로 차려입은 옷차림이 밝고 씩씩했으며, 들뜨지도 움츠러들지도 않고 나누는 대화법은 영리하고 단단했다. 스물 몇 살 무렵에는 보기 어려운 균형감과 성숙한 사유가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작 〈설국열차〉를 끝낸 후 근황을 묻는 질문에 고아성은 학교와 일상에 복귀해 지낸 몇 개월의 이야기로 답했다.

“일단은 (영화 촬영 때문에 휴학 후) 복학생 신분이 된 것이 너무 슬펐죠. 저는 개인적인 삶도 중요한 사람이라 제게는 가족, 친구, 공부 등 일(연기) 외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이 잘 갖춰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영화 때문에 미뤄져 있던 일상을 잘 누렸어요. 아마도 스무 살 무렵부터는 개인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느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늘 마음속 깊은 곳, 견고한 내적 평화를 가진 사람을 동경해왔어요. 이번에 같이한 김희애 선배나 김혜수 선배도 그렇고, 〈설국열차〉에서 함께했던 틸다 스윈튼도 그런 분이죠. 저도 그 든든한 마음을 어릴 적부터 찾으려고, 가지려고 노력해왔어요.”


고아성은 현재 성균관대 사회과학부(3학년)에 재학 중이다. 심리학이 전공이다.

“저희 집안에 철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신 분이 많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학교 정규 과정엔 없는 서적을 많이 접했죠. 한편으로는 배우는 연극영화과를 가야 한다는 편견도 싫었습니다. 일하면서 만난 선배들도 절대 연극영화과를 가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고등학교 때부터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정서・인격・예술심리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싶었어요.”

아역배우 때부터 자신의 실제와는 다른 가상의 삶을 연기해오며 길러진 감성 때문일까, 사람의 정서와 심리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 결과일까.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고아성은 한층 더해진 몰입도와 해석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그는 ‘무표정의 슬픔’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열 몇 살의 소녀가 자꾸 바깥으로 삐질삐질 새나올 것 같은 눈물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자, 슬픔 그 자체가 딱딱한 껍질처럼 굳어져 이룬 완강한 방어막이기도 하다. 함께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어리고 약했던 여동생의 자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열 몇 살 소녀의, 어쩌면 치기 섞인 자존심은 슬픔을 내보이는 것도, 과잉된 웃음을 짓는 일도 허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표정 뒤로 혼란과 감정을 숨기는 것이 가장 편했을 터다. 모두 김려령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하자면 <완득이>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낙관성으로,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고아성 분)는 언뜻언뜻 냉소적인 무표정으로 어린 소년 소녀에겐 무지막지할 슬픔을 감당해낸다.


〈우아한 거짓말〉은 착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던 ‘천지’(김향기 분)가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을 하고난 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마트에서 일하면서도 주책 맞을 정도로 씩씩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혼자 두 딸을 키워온 엄마 ‘현숙’(김희애 분)과 생전 동생이 친하게 지냈던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만지’는 동생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간다. 유서를 남기지 않은 죽음으로 한 소녀가 엄마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언니인 ‘만지’에게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만지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죽은 소녀에 대한 죄책감을 비로소 대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상실이 가져오는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1주일 동안 가까운 사람들을 잃는 꿈을 꾼 후 출연을 결심했어요. 지난해 〈설국열차〉의 개봉을 앞두고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시나리오를 보고는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없었어요. 연기할 때 반드시 경험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상상만으로는, 실제로 느껴보지 않고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 진짜배기 사랑을 해보는 것, 아이를 낳아보는 것 같은 일이요. (동생을 잃게 되는 역할인)〈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출연을 거절한 후 꾼 꿈이 결정을 바꾸게 했다. 시나리오가 강렬했지만, 자신이 역할을 맡을 정도로 경험이 충분하지 못했던 게 한스러워서였을까.

“1주일 내내 꿈을 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꿈이었죠. 꿈에서 엄마가 죽거나 오랜 단짝 친구가 죽거나 언니를 잃었어요. 꿈이지만 그렇게 실제 같고, 구체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엄마가, 언니가, 친구가 이제는 곁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결심, 그러다가 다시 밀려오는 상실감에 감정이 온통 미궁에 빠지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을 꿈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했어요.”


고아성에게 〈우아한 거짓말〉은 이미 그 1주일의 꿈속에서 만들어지고 상연됐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전에 나에게 보낸 신호가 있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가 죽기 전에 신은 나에게 미리 암시를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꿈속에서 들었다고 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담긴 이야기 그대로다.

“결정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고나서 바로 감독님께 장문의 메일과 함께 전화를 드렸어요. 영화를 하고 싶다고.”

《애도일기》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고 2년간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순간마다 교차하고 너울지는 외로움과 상실의 슬픔, 생에 대한 의지를 집요하게 글로 육화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가가 생의 가장 큰 슬픔을 담아낸 한 문장 한 문장이 스물두 살의 섬세한 감성에 어떻게 꽂히고 스며들었을지, 얼마나 많은 영감을 줬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이번 작품에서도 고아성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지만, 〈설국열차〉 때 이미 성년을 맞았다. 열네 살에 처음 만나 어엿하게 성장한 고아성을 봉준호 감독은 마땅히 ‘동료’로서 대우했다. 고아성은 “제가 까마득히 어리지만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거리낌 없이 상의했다”고 말했다. 고아성은 자신의 역할 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그래도 〈우아한 거짓말〉은 봉준호와 송강호라는 버팀목 없이 성인으로서 대면한 첫 주연작이었다. 어땠을까.

“지금에 와서 보니 아역 시절에는 저도 모르고 누리던 ‘어드밴티지’가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변화를 체감하죠.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요. 예전에는 촬영하고나면 내 몫만 하고 빠졌는데, 이번 작품에선 처음으로 전체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연기를 했어요. 또 한 가지 부담이라면, 제가 그동안 얼마나 좋은 감독이랑 작업했고 얼마나 좋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했는지, 겪은 것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못 보여드릴까봐 걱정했다는 것이요.”


고아성은 열여섯 살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 글을 읽고 쓰는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은 기자 출신이신 아버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고아성은 말했다. 독서는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편식하는 편이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들을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최고의 영화로 치고, 최근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인상적으로, 감동적으로 봤다. 히치콕 감독이나 스탠리 큐브릭 같은 봉준호 감독의 추천작은 늘 필수 관람 1순위 작품들이다. 영화 속에서 두 번이나 그의 아버지 역할을 했던 송강호의 〈변호인〉도 물론 봤다. 고아성은 감상을 이렇게 전했다.

“한 작품을 하기 위해서 송강호 선배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얼마나 고뇌가 큰지 지켜봐왔고 잘 알죠. 사실 〈설국열차〉를 하기 전만 해도 송강호 선배 정도 되면 이제는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그렇게 고뇌하는 게 감동적이었어요. 선배가 어떻게 영화작업을 하는지 잘 아는데, 〈변호인〉 같은 작품을 했으니…. 작품 자체가 뜨겁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는 제가 못 일어났어요. 온몸의 힘이 풀려서요.”

고아성은 〈설국열차〉로 베를린영화제에 갔다가 홀로 프라하행 비행기를 탔다. 〈설국열차〉 촬영 때 묵었던 곳을 다시 찾아 3박4일을 지냈다.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며칠간을 객지에서 오롯이 홀로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이번 여행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경험이었다”고 고아성은 덧붙였다. 스물두 살 여배우 고아성은 보고, 듣고, 쓰고, 겪고, 그리고 연기한다.

“평소 작품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자신의 근황을 알려준다거나 ‘셀카’를 공개한다든가 하는 일은 싫다, 대중에게 알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배우를 벗어나면 개인으로선 조용히 살고 싶다”고 다부지게 말할 정도로, 고아성은 배우로서의 삶과 자연인으로서의 일상을 구별하고 균형 잡고, 똑같이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아성의 연기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숙성한 사유와 일상의 숨결이 삼투돼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그 증거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가 왜 이 젊고 영리한 여배우에게 기대를 품어도 좋은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일 것이다. 쉽게, 조금 가볍게 말하자면 고아성은 한국영화계의 김연아가 아닐까.
  • 201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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