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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자연, 맑은 선비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독서당 ‘충재’. 이 마을을 개척한 권벌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 자리 잡고 있는 경북 봉화군. 영남 최북단인 이곳은 전체 면적의 83%를 산림이 차지하고 있어 ‘산골 오지’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인구 밀도도, 땅값도 전국 최하위권인 이곳이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백두대간 관광열차인 O-train과 V-train이 이곳을 지나면서다. O-train은 중부내륙 3도(강원・경북・충북)를 하나(one)로 잇는 순환열차, V-train은 봉화군 분천역에서 출발해 양원역・승부역을 거쳐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을 오가며 낙동강 상류 협곡(valley)을 지나가는 열차다. V-train의 시발점인 분천역은 한국-스위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 결연을 맺고 역사(驛舍)를 스위스 전통 목조가옥 양식으로 꾸며 더욱 인기다.

그런데 봉화를, 역에 잠깐 내려 경험하는 것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봉화는 산 깊고 물 맑은 청정 자연,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담긴 고택과 정자, 옛집에 깃든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봉화군에 남아 있는 정자는 103개로, 자연을 향유하는 선비문화가 얼마나 풍성하게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봉화로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봉화읍까지 자동차로 3시간여. 2001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오지였던 이곳이 한결 가까워졌다. 먼저 봉화읍 유곡1리 닭실마을을 찾았다. 실학자 이중환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이 마을이 경주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경상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4대 길지(吉地) 중 하나로 나와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다 암탉 형태의 나지막한 산이 알을 품듯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다.

‘충재’와 연못 안 바위 위에 지은 정자 ‘청암정’.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沖齋) 권벌(1478~1548) 선생이 자손들이 오랫동안 살아갈 터전으로 개척한 마을로,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나지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지금은 마을 앞으로 국도가 지나가지만 예전에는 낙랑장송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는 동안 그곳에 마을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다. 《택리지(擇里志)》는 이곳을 “깊은 두메로, 병란과 세상을 피해서 살 만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요즘도 마을 형태와 고택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권벌은 1526년, 자신의 집 서쪽에 독서당인 충재(沖齋)를 짓고, 다시 그 서쪽 커다랗고 넙적한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지어 청암정(靑巖亭)이라 했다. 정자 주위는 물길을 내 연못을 만들었다. 권벌이 시끄러운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할 때였다 한다.

청암정 마루에서 본 바깥 풍경.
독서당인 충재는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모습이 기품 있는 조선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돌다리를 건너 청암정에 오르니 탁 트인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난다. 고개를 돌리는 대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 정자 주위의 꽃과 나무들이 액자 속 풍경화처럼 담긴다. 건물 자체의 화려함보다 그 건물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보이는 풍경, 자연과의 조화에 더 마음을 썼던 옛 사람의 심미안과 마주하는 듯 마음이 뭉클했다. 독서당에서 글을 읽던 선비는 돌다리를 건너 정자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바람을 쐬며 머리를 식혔으리라. 퇴계 이황도 이곳을 찾아 “… 가득하게 보이는 경치는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가 남긴 바람이 향기로와, 나 같은 사람은 공의 거두어줌에 힘입어서,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읊으니 그 회포 한이 없어라”라며 〈청암정〉이란 시를 남겼다. 청암정 옆 ‘석천정사 가는 길’ 이정표를 보고 논길을 지나 호젓한 숲길을 따라 들어가자 별유천지로 들어간 듯 계곡이 나타나고 계곡 옆에 권벌의 큰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보인다. 문이 잠겨 있어 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바깥 경치를 보면 기암괴석과 소나무, 맑은 물줄기가 한 폭의 산수화였으리라. 자연을 만끽하며 책을 읽는 선비들의 이상향을 실현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천계곡 옆에 지은 석천정사.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 100여 가구 중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독립유공자만 17명이 나올 정도로 독립운동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다. 그중 만회고택은 조선 순조 때의 문신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1919년 3・1운동 직후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유림들이 모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곳이다. 만회고택을 기웃거리다 이 집을 지키고 있는 만회의 7대손 김시원씨를 만났다. 그는 사랑채 명월루로 오르라고 선뜻 권하더니 “이곳에서 선비들이 바깥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쓰고, 세상을 논하고,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이야기한다. 선조들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낙향했다는 그는 일제 때 조상들이 받은 편지를 보여주며 “길림에 가서 누구를 만나라는 등 구체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이를 정리해 역사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은 세 차례나 어사를 지내며 강직함과 청빈으로 이름 높았던 계서 성이성이 살았던 집. 그는 남원부사를 지낸 아버지를 따라 열세 살 때부터 5년간 남원에서 살았는데,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화에는 곳곳에 이렇게 유서 깊은 고택과 정자들이 많은데,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꼿꼿하게 살아간 선비들의 이야기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정자 앞에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있는 도암정.
봉화에 갔다면 빼놓지 않고 찾아야 할 곳이 청량산과 청량사다. 봉화군과 안동의 경계에 있는 청량산은 해발고도 870m로 높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흐르고 산세가 수려해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린 곳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특히 청량산을 아꼈는데, 주자학의 성지로 불리는 중국의 무이산에 비유해 ‘조선의 무이산’이라 불렀다. 퇴계 선생은 수시로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학문에 정진했는데, 후학들도 이를 따라 수많은 선비들이 청량산 유람록을 남겼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아담하지만 안으로는 층층이 깎아지른 기암절벽을 갖춘 청량산의 모습이 퇴계 선생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을 닮았다고도 한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古刹). 청량사 주차장에서 청량사까지는 20~30분 거리인데, 가파른 급경사라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 절경을 만나게 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가 연꽃처럼 둘러쳐진 한가운데, 꽃술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청량사에서 청량산을 둘러보니 수려한 산속에 폭 안긴 듯 포근한 느낌이다. 청량산은 맑고 단정한 기운이 느껴져 ‘옛 선비들이 왜 이 산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가 갔는데, 청량사 역시 정갈하면서 고요한 분위기였다. 가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청량사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리는데, 올해는 10월 5일 오후 7시에 열렸다. 소리꾼 장사익과 가수 BMK, 정수라, 심진 스님과 청량사 어린이합창단 등이 무대에 올랐다.



청량산의 품 안에 안긴 듯한 고찰 청량사.

낙동강 상류를 따라가는 협곡열차 V-train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분천역이 생긴 것은 휴전 직후인 1955년,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이 개통되면서였다. 영암선은 광복 후 우리의 힘으로 만든 첫 철도로, 백두대간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산맥을 뚫고 가느라 55개의 교량을 세우고 33개의 터널을 뚫어서 만든 철길이다. 영암선과 철암~묵호를 연결하던 철암선, 묵호~경포대를 연결하던 동해북부선이 통합해 영동선이 되면서 영동선의 작은 간이역이 됐던 이곳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올봄부터 이곳이 협곡열차인 V-train의 출발점이자 O-train과 V-train이 만나는 환승역이 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말마다 북적이는 것이다.


협곡열차는 분천역에서 철암역까지 총 27.7km를 시속 30km 속도로 1시간 10분가량 달린다. 천천히 달리면서 백두대간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기 위해서다. 태백 황지연못에서 발원해 봉화・대구・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낙동강 상류를 굽어보면서 가는데, 낙동강 양쪽의 깎아지른 절벽들, 기암괴석을 뚫고 뿌리내린 소나무들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동차로 갈 때는 볼 수 없는 경치.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 열차로는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자동차로는 돌아서 가느라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한다. 진홍색 객차는 커다랗게 창을 내고, 창을 향해 좌석을 배치해 협곡의 절경을 즐기도록 했다. 협곡열차는 냉난방 설비가 되어 있지 않아 더울 때는 창문을 열어 계곡의 바람을 맞고, 추울 때는 난로를 피우는 친환경 열차다.


분천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트레킹을 하려는 승객을 위해 오지마을이 있는 비동역에서 잠시 정차하고, 양원역에서 10분간 정차했다. 양원역은 주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역. 주민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직접 역사(驛舍)를 지은 뒤 철도청에 ‘기차를 세워달라’고 요청, 1988년 임시승강장으로 시작했다 한다. 기차가 양원역에 서니 주민들이 찐 감자와 고구마, 돼지껍데기와 막걸리, 잔치국수, 효소음료와 각종 산나물 등을 들고 나와 팔고 있었다. 점심때라 출출했던 승객들에 의해 음식은 동이 나고, 주민들은 떠나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승부역에서도 5분간 정차.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에 있는 승부역은 사실상 이용객이 전무했는데, 1999년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역이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봉화군 경계를 넘어 강원도로 진입한 후 철암역에 도착하면 을씨년스러운 탄광도시의 풍경을 접하게 된다. 철암역은 태백지역의 무연탄이 집산돼 전국으로 나가던 곳. 분천역으로 돌아오는 협곡열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으면 태백시티투어 버스나 30분 단위로 차를 빌릴 수 있는 카 셰어링을 이용해 태백지역 관광에 나설 수도 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동마을에서 양원역까지 2.2km의 체르마트길을 걸을 수도 있다. 양원마을과 비동마을 주민들이 걸어 다니던 길로, 분천역과 체르마트역이 자매결연을 하면서 새롭게 명명되었다. 비동역에서 내려 분천마을까지 약 4.6km를 걸을 수도 있는데, 너른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라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에 좋다.

tip

봉화에는 아직 숙박할 곳이나 식당이 다양하지 않다. 숙박은 만산고택, 권진사댁 등 고택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청량산이나 분천역 주변에 펜션 등 숙박업소가 모여 있다. 봉화는 양양과 함께 송이버섯 주산지. 송이돌솥밥·송이전골·송이전 등과 산채비빔밥이 먹을 만하다. 시골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도 맛있다. 개발바람에서 비껴나 있던 봉화는 그 덕에 청정한 자연과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난개발로 들어선 건물들이 고즈넉한 옛 마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색다른 관광 콘텐츠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봉화가 옛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서서히 발전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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