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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빙하기 지구에서 1452년 조선으로 옮겨간 순혈 영화배우

영화배우 송강호

2030년 빙하기의 지구에서 1452년 정쟁의 피바람이 불던 조선으로, 그리고 다시 1980년대 엄혹한 독재 치하의 법정으로. 송강호의 ‘신세기’다. 시공간을 건너뛰면서 여는, 46세 ‘순혈’의 영화배우 송강호의 특별한 시간, 그의 새로운 시대다. 봉준호라는 걸출한 영화작가의 탄생과 송강호라는 ‘괴물’ 같은 배우의 출현을 알린 10년 전 〈살인의 추억〉이 그랬듯이, 배우로서 그가 접어든 새로운 국면은 한국영화사의 또 다른 페이지다. 톱스타 중에선 TV 드라마로의 발길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거의 유일무이한 연기자이므로 마땅히 ‘순혈의 영화배우’라 할 수 있는 송강호. 〈설국열차〉가 일으킨 흥행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지만 극장 바깥엔 가을의 정취가 물씬해진 2013년 9월 초.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의 시계는 1452년의 조선에 맞춰져 있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었던 평범한 사내는 어처구니없이 당대 권력투쟁의 한복판으로 휘말려 들어가 비극을 맞는다. 영화 〈관상〉의 절정은 송강호의 피 끓는 절규다. 울부짖다 목이 쉬고, 눈물마저 말라 피를 토해내듯 꺽꺽거리는 한 사내, 그리고 한 아버지의 울음은 송강호라는 배우가 왜 여전히 ‘당대 최고’인지를 증명한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양옆에 수많은 병사와 군중이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서 연기해야 했던 우리 영화의 클라이맥스죠. 그 장면을 닷새간 촬영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었습니다. 보조 연기자도 많이 동원된 대규모 장면이었죠. 야외 세트에서 많은 이들이 바라보는 한가운데서 찍다보니 ‘인민재판’ 같은 느낌도 들었죠. 정서적으로도 무척 힘든 신이었습니다.”

〈관상〉은 당대 최고의 ‘관상쟁이’로 꼽히는 가상의 인물과 조선 초기 정쟁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계유정난’의 역사적 사실을 결합시킨 이른바 ‘팩션 사극’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유정난’ 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앞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의 시대도 있었지만, 더 드라마틱한 때가 바로 계유정난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 ‘관상쟁이’가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허구의 상상력을 덧붙이니 더 흥미로웠죠.”

극중 역적 집안으로 몰려 아들 ‘진형’(이종석 분), 처남 ‘팽헌’(조정석 분)과 산골에 은거하던 천재적인 관상쟁이 ‘내경’(송강호 분)은 한양의 내로라하는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꼬드김에 “집안을 일으키고자” 장안으로 올라왔다가 서릿발 같은 조종 내 권력투쟁에 엮이게 된다. 병약해 죽을 기색이 역력한 문종은 왕위를 이을 어린 세자(단종)를 걱정해 “역모의 운명을 타고난 자를 가려내고 김종서와 함께 보위를 지켜달라”는 비밀 지령을 내경에게 내린다. 이때부터 ‘호랑이 상’인 김종서(백윤식 분)와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망으로 가득 찬 ‘이리 상’ 수양대군(이정재 분) 사이에서 내경의 두 눈과 세치 혀에 조선의 국운이 달린다. 김종서와 수양이 팽팽한 대결을 이룰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아들을 지키려는 문종과 그를 배신해야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아버지 내경, 조카(단종)를 죽이고 세상을 가지려는 삼촌 수양과 그를 도와야만 조카를 구할 수 있는 삼촌 팽헌이 댓구와 아이러니를 이루며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각 인물을 오가며 이 균형을 허물고 역사가 뒤바꿔놓은 인생사의 희로애락를 보여주는 인물이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이다.

“스타일로 포장한 작품이 아니라, 인물과 드라마의 힘으로 밀고 가는 사극입니다. 내경이란 인물은 그중에서도 아주 극적인 인생을 사는 인물이고, 하나의 신념이나 감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성격으로 삶의 다양한 순간과 감정을 보여줍니다.”


보잘것없는 인물이 거대한 사건과 만날 때


〈설국열차〉의 ‘남궁민수’도 그랬거니와 〈관상〉의 ‘내경’ 역시 송강호를 위한, 송강호가 아니었으면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다. 그는 영화에서 대개 체제의 주변이나 바깥에 있는 인물이었다가 때로 떠밀려, 때로 무심코 권력이나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서면서 희극성과 비극성을 자아내는 인물이 된다. 보잘것없는 힘과 지능을 가진 이가 국가마저 포기하거나 오판한 거대한 적을 상대로 홀로 싸우자고 나섰을 때 관객들은 우스꽝스럽고 측은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물의 감정에 동화된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고, 〈괴물〉이 그랬다. 약에 취해 정신 놓고 살던 ‘열쇠공’이 본의 아니게 반란의 최전선에 선다거나(〈설국열차〉), 동네 사람들 머리나 깎아주던 이발사가 청와대로 불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거나(〈효자동이발사〉) 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평범하거나 보잘것없는 사내가 모종의 거대한 흐름이나 사건에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희비극이 송강호에겐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때마다 관객들은 기꺼이, 열광적으로 송강호가 구현하는 인물을 받아들였다. 보잘것없는 이의 사소한 인생사와 역사나 사회의 거대하고 특별한 사건이 부딪치고 맞물렸을 때, 권력이나 집단의 운명은 거창한 외피를 벗고 우스꽝스러운 본질을 드러내거나 개인의 삶에 드리워진 본래의 비극적 속성이 베일을 벗는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개인은 갈팡질팡하다 기력이 쇠해 결국 허탈한 웃음을 웃거나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도리밖에는 없다. 〈관상〉에서 송강호는 몸이 약해 다리를 절고 영특하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아들을 구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남겨진 문종의 유지를 거스를 수도 없다. 일개 관상쟁이일 뿐인 내경은 당치도 않게 아들을 구하랴, 종묘사직을 지키랴, 역사의 대세를 따르랴 갈팡질팡하다 험한 꼴이란 험한 꼴은 다 보게 된다. 송강호는 “그것이 삶”이라고 했다.

“바꿀 수 없는 운명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신념이든 개인적인 인생사든 도도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무너지든, 순응하든 해야 한다는 비극적인 인식을 보여주죠. 삶은, 역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농담 던질 여유 없이 질주했던 〈설국열차〉에서도 송강호가 가진 희극성은 ‘김밥 옆구리 터지듯’ 삐질삐질 새어 나온다. 송강호의 존재 자체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설국열차〉의 제3의 대안적인 노선을 상징했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가리켜 “김밥(열차) 옆구리 터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전반부에선 송강호의 능청스러운 유머가 빛을 발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다양한 장르의 표정으로 육화하는 송강호 얼굴의 바탕엔 평범한 인생살이의 근본적인 소시민성이 깃들어 있고, 그래서 관객에겐 그의 얼굴 자체가 ‘극적인 설득력’이 된다. 돌이켜보면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은 스크린의 전면을 차지한 ‘송강호의 얼굴’이었다. 얼굴의 상에 나타난 운명을 소재로 한 〈관상〉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의 얼굴에서 관상전문가들은 무엇을 읽었을까.

“제가 ‘구렁이 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영화 티저 예고편의 자문을 맡았던 관상전문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짝눈에 구렁이 상은 남을 속이며 살 팔자인데, 마술사나 연기자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직업을 선택한 셈이죠.”


송강호는 〈설국열차〉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다시 한 번 흥행돌풍의 주역이 됐다. 〈살인의 추억〉 이후 꼭 10년 만이고,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1302만 명)인 〈괴물〉 이후 7년 만이다. 7월 31일 개봉한 〈설국열차〉는 한 달여 만에 9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할리우드 톱스타인 크리스 에반스와 영국의 국민적인 여배우 틸다 스윈튼을 비롯해 에드 해리스, 제이미 벨, 존 허트, 옥타비아 스펜서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영어 영화이자 다국적 프로젝트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각국의 잘못된 대응으로 모든 생명체가 절멸한 2030년의 빙하기,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영원히 달려야만 하는 ‘열차’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모든 사물이 꽁꽁 얼어붙은 설국의 지구, 영구엔진으로 달리는 설국열차의 각 칸은 탑승객의 계급에 따라 구획됐다. 꼬리 칸은 헐벗고 굶주리고 머리 칸의 상류층은 호의호식한다. 완전한 계급사회인 이 열차를 지배하는 힘은 무엇일까? 비밀을 알기 위해 꼬리 칸의 탑승객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서 송강호가 맡은 역은 열차의 보안설계자. 반란군이 앞 칸으로 진격하기 위해 감옥 칸에 갇혀 있던 송강호를 꺼내고, 그는 딸 ‘요나’(고아성 분)와 함께 반란군을 도와 잠긴 앞 칸의 문을 하나씩 열어간다. 반란에 동의하는 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마약인 ‘크로놀’을 얻고 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반란군 편에 서게 되지만, 결국은 스스로 인류의 미래를 열어줄 ‘열쇠’가 된다. 한국에서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꼽히는 그를 외국 배우들은 어떻게 봤을까. 틸다 스윈튼이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송강호는 현존 최고의 영화 예술가(one of the best contemporary cinema artist) 중 한 명입니다. 게리 쿠퍼 같은 위대한 배우죠. 송강호가 등장할 때마다 저는 촬영장에서도 모니터를 뚫어지게 봤어요. 다음 연기는 어떻게 할까, 늘 궁금증을 일으키는 배우죠. 같은 배우로선 최고의 동지(comrade)죠.”

틸다 스윈튼의 내한 기자회견 당시 동석했던 통역가는 ‘동지(comrade)’라는 표현에 대해 “전선에서 같이 싸우는 동료의 의미”라고 덧붙였다. 이런 극찬이나 ‘할리우드 진출’ 따위에 대해 송강호는 특유의 무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한다.

“외국 배우들의 문화가 남을 배려하고 장점을 극대화해 칭찬해주고 하기 때문에 나온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유일한 한국 배우고 주연을 하고 있으니까 덕담을 해준 거죠. 외국 배우들이 내한하거나 한국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저와 함께하고 싶다거나 제 이름을 거론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제가 출연한 박찬욱・봉준호・이창동・김지운 감독의 작품이 해외 영화인들 사이에선 워낙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으니까 덩달아 제 얼굴과 이름도 알고 있는 거죠. 뭐 말하자면 한국 영화배우 중에선 알 만한 사람이 별로 없는데다, 워낙 대단하신 감독님들의 작품에 출연했으니까 그때마다 저를 거론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국영화를 찍거나 할리우드 진출에 대해서도 손사래를 친다. “할리우드이건 어느 나라 영화이건 배우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다, 연기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늘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파워로 꼽혔던 그이지만 〈설국열차〉 개봉 직전까지만 해도 영화계 안팎에선 “송강호의 시대도 저무는 것이 아니냐”는 설왕설래가 적지 않았다. 〈푸른 소금〉 〈하울링〉 등의 성적이 저조했고, 그와 경쟁할 만한, 걸출한 40대 배우들이 잇따라 각광을 받으면서 상당히 설득력을 얻었던 의견이었다. 하지만 〈설국열차〉와 〈관상〉으로 송강호는 세간의 비관적 의견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여전히 송강호는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드는, 한국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에 대해서도 그는 역시 무심한 편이다.

“연기는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이 인생이고, 한 개인으로서의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배우의 연기가 아닐까요? 20대에는 20대에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있고, 50대엔 그때가 돼서야 할 수 있는 연기가 있죠.”

송강호의 차기작은 연말 개봉 예정인 〈변호인〉이다. 1980년대 한 인권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담을 예정이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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