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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소중한 게 있을까요?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테러범과의 전화통화를
생중계하는 앵커로 열연한 배우 하정우

‘사람’ 하정우의 힘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전날 저녁,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지면용 광고 촬영을 한다던 그가 자정이 다 돼 보낸 문자였다. 촬영을 끝내고, 이번 작품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가끔 모시고 술잔을 기울이는, 하정우의 표현을 빌리면 ‘선배 배우님’과 한잔하다 보낸 글이었다.

“영화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거야.”

<더 테러 라이브>를 본 선배가 후배에게 건넨 칭찬이자 오랜 경험이 묻어나는 영화의 원론이다. 실제로 <더 테러 라이브>는 ‘하정우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화의 긴장감, 속도감, 만족감을 모두 배우 하정우에게 기대고 있다. 영화는 연출부터 배우, 프로듀서, 촬영, 미술, 음악, 조명, 특수효과, 편집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따로 또 같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종합예술이다. 그는 “술을 마시다 이 말을 듣는데 문득 가슴에 와 닿았어요. 사람 위에는 어떤 것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영화 〈추격자〉(2008) 때 하정우를 처음 만난 후 5년여의 시간 속에서 적지 않은 생각을 나눠온 터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간 하정우의 진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정우가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은 영화계에 정평이 나 있다. 인연을 맺기 시작한 선후배, 동료를 살뜰히 챙긴다. 소위 잘나가는 ‘하대세’가 되고도, 각종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 개인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도 틈틈이 시간을 내 술자리를 만들고, 전화로 안부를 묻고, 자신이 출연하든 안 하든 작품에 적합하다 싶은 배역이 있으면 추천한다.


‘배우’ 하정우의 도전


한 차례 쏟아진 비로 청명해진 공기, 그래서 더 따갑게 느껴지는 햇살을 등지고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하정우와 마주 앉았다. 그는 단독 주연답게 〈더 테러 라이브〉 홍보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코감기에 걸려 있었다. 몸은 시원찮은데,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영화는 기자 출신의 잘나가는 국민앵커였지만 이제는 퇴물이 된 윤영화(하정우 분)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마포대교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된다. 테러 생중계를 재기의 기회로 삼으려는 윤영화가 추가 폭파를 경고하는 범인과 벌이는 심리전, 마치 테러 긴급속보를 전하는 듯한 생생한 긴장미가 관람 포인트다. 출세에 눈먼 속물이 생사가 엇갈리는 위기 속에서 인간 본연의 양심과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하정우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 뒤에는 특별한 레시피가 있었다.

“21개의 챕터, 21개의 소제목으로 이뤄져 있어요. 한 번 촬영에 한 챕터씩 찍어나갔습니다. 제가 김병우 감독님에게 제안한 방식인데요, 연극처럼 찍자고 했죠. 한 신 한 신 끊어 찍지 말고 한 챕터를 한 호흡에 찍는 거예요. 그런 방식이 테러 상황을 생중계하는 이 영화에 긴장감과 생생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영화는 컷별로 찍어 잘 편집하는 게 묘미인데, 연극의 라이브한 맛을 영화에 적용하는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김병우 감독은 걱정스러웠다. 과연 원톱 하정우가 한 챕터씩 연속으로 연기하는 체력 소모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촬영 방식이 다르니 배우의 연기법도 달라야 한다는 걸 내다본 우려였다.

“집중력 있게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을 드렸죠(웃음). 보통은 배우가 움직이고 촬영감독이 적절한 방식으로 담아주세요. 이번엔 반대였죠. 촬영감독의 움직임에 따라 제가 라운드를 그리거나 위아래로 움직이며 연기했어요. 카메라 동선에 맞춰 움직인다는 게 기계처럼 딱딱 맞출 순 없어요. 동선이 충돌하고 대사가 씹히기도 했죠. 저는 NG 그대로가 더 신선하고 생동감 있어 좋다고 생각했어요.”


스크린으로 만난 결과는 좋다. 마치 2시간짜리 영화를 서너 시간에 촬영한 듯, 테러 발발 직후 생방송 뉴스를 지켜보는 듯 실감난다. 김 감독의 우려는 기우였을까.

“아니에요. 체력 소모가 대단하더라고요. 스토리와 설정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전력 질주해야 해요. 9시간을 촬영하면 서 있어도 눈이 감겨요. 그거 뭐라 그러죠? 체력 고갈, 그로기 상태? 해보니 7~8시간 몰입도가 가장 좋더라고요.”

하정우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느낌을 권투 시합 출정에 비유했다. “감독님이 ‘자, 갈게요’ 해서 제가 세트로 걸어 들어갈 때는 권투 시합 하러 가는 느낌이에요. 제 컨디션에 따라 오래 촬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NG 거의 없이 통째로 가니까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도전 의욕이 생겨요. 그렇게 맘을 다잡고 촬영하는 거죠.”


‘화가’ 하정우의 우주


지난겨울 하정우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577 프로젝트〉에서 본 얼굴들, 〈롤러코스터〉로 보게 될 배우들과 마루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제 집인 양 술과 안주가 떨어질 때마다 누구랄 것 없이 하정우의 부엌살림을 뒤지는 모양새가 자연스러웠다.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여기저기 놓여 있는 그의 그림들이었다. 분명 사람 얼굴, 한 송이 꽃을 그린 것인데, 그 속에서 우주가 보였다. 여성의 머리카락 한 올에, 꽃받침 잎사귀 하나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선과 점들이 우주로 보인 건 왜일까. 봄이 지나고 여름이 한창일 때 그림 얘기를 꺼냈다. 그림에서 우주가 보였다고 하자 그가 “정말 보이더냐”며 반가워한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 건물, 차, 사람이 모두 작은 선과 점으로 보이잖아요. 그 속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선과 점으로 보이죠. 우주는 그렇게 점과 선이 아닐까 싶어서, 일테면 눈동자 속에도 우주를 그리게 됐어요. 평소 구글 맵을 자주 보는 이유도 비슷해요.”

그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걸 언제 알았을까.

“글쎄요. 소질이 있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은 일이 있고, 낙서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있지만 보통의 어린이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야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대학 졸업 후예요. 신인배우 시절이라 할 일도 별로 없고 남는 게 시간뿐이라 마음 둘 곳을 찾아 시작한 거였어요. 마음이 선선해지고 좋더라고요. 요즘 국내외 갤러리에서 전시회 제안을 받고 있고, 관심을 받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본질은 지금도 같아요.”

하정우는 직장인이 일하듯, 직업 배우로서 쉬지 않고 일한다. 바쁜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본질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니 선뜻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다.

“네(웃음). 영화 〈황해〉랄지 〈군도〉랄지, 지방에서 그것도 아주 산골에서 촬영을 하면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어 할 일이 없어요. 비라도 와서 촬영이 비는 날이면 방에서 그림을 그려요.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그림 얘기가 연기로 옮아간다.

“그림 그리는 것이나 연기하는 거나 표현하는 도구만 다르지 제게는 같은 작업이에요. 저는 끊임없이 저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고, 그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드로잉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지만 그림을 계속하는 것이고요. 부족해도 그걸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리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해지는 것 같아요. 자신 있게, 솔직하게! 드로잉에 제 진심이 갇히지 않도록 표현하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연기의 원리를 그림을 그리며 더욱 깨닫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이다


인터뷰 말미, 사람 좋아하기로 유명한 그에게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부담스럽거나 지치지 않는지 물었다.

“저는 ‘동지’라고 생각해요. 현재 시점에서 제 인지도가 높을 뿐, 똑같은 조건에서 성장한 배우들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달라지든, 또 그들이 어떻게 달라지든 계속해서 사적으로나 일적으로 함께하고 싶어요. 물론 그들이 저와 같은 입지로 얼른 올라온다면 금상첨화겠죠. 재미있는 일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부담 같은 건 전혀 없어요. 되레 재미있어요. 위로와 도움도 엄청 받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건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 같아요. 배우로서 여러 가지 재료를 물려주셨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것도 보고 배운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 감사할 일이 참 많네요.”

하정우의 아버지 김용건은 항상 “교만한 거 아니냐” “너무 장난스러운 것 아니냐”며 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인터뷰할 때 선글라스를 써도, 사람들은 너를 보고 싶어 하는데 예의가 아니라고 나무라신다. 서로 다 큰 성인이 되고도 한지붕 아래 사는 동생, 배우 차현우도 하정우가 경계의 끈을 놓지 않도록 긴장감을 주는 존재다.

가족이건 친구건, 선배건 후배건 하정우 곁에는 늘 사람이 북적인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을 즐겁게 할 영화를 만드는 하정우. 그가 만인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된 이유를 알겠다.
  • 2013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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