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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할리우드에
아시아의 ‘복근’을 새긴 남자

“저에겐 꿈이었는데, 이제 후배들에게는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됐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해 6월 23일, 미국 LA 할리우드의 그루먼차이니즈극장 앞에 선 이병헌(43)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찰리 채플린, 엘리자베스 테일러, 메릴린 먼로에서 조니 뎁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와 전 세계 대중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전설적인 스타들의 핸드프린트 옆에 이날 자신의 손도장을 찍었다. 이에 앞선 지난해 5월 프랑스의 칸. 지중해를 비추는 찬란한 햇살 속에 상의를 탈의하고 멋진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이병헌의 대형 사진이 호텔 벽에 내걸렸다. 검게 그을린 이병헌의 꿈틀대는 근육이 칸의 푸른 하늘과 멋지게 어울렸다. 국제영화제를 맞아 칸에서도 해안가 중심에 자리 잡은 최고급 호텔 칼튼에 걸린 영화 〈지.아이.조2〉의 대형 광고 현판이었다. 이병헌과 나란히 모습이 담긴 브루스 윌리스와 드웨인 존슨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자태가 오히려 빛이 바랬다.

사진제공 : 세계닷컴
한국 영화팬과 아시아의 한류팬들을 대표하는 존재

영화배우 이병헌의 ‘성공시대’가 활짝 열렸다.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지 22년. 청춘스타로서 1990년대를 보냈고, 아시아 팬을 거느린 한류스타로 2000년대를 맞았으며,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세계 엔터테인먼트산업의 메카인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성공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런 비교가 허락된다면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성과와 박지성이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 리그에서 일군 결실만큼이나 찬란한 이정표를 할리우드에 새겨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출연한 〈지.아이.조2〉는 지난 3월 28일 전 세계 동시 개봉해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 5개국 이상의 극장가에서 주말 흥행순위 1위를 기록했다. 한국 배우의 주연작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에선 물론 관록의 톱스타인 브루스 윌리스나 프로레슬러 출신 액션 배우 드웨인 존슨의 출연작으로 더 유명하지만, 작품에서의 비중과 역할을 생각한다면 이병헌의 존재감은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어떤 곳인가. 기대이익이 없으면 밥상에 숟가락 하나도 얹어주지 않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한 비즈니스의 현장이 아닌가. 이병헌의 캐스팅 자체가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그의 영향력과 흥행파워를 면밀하게 감안한 전략이었고, 1편은 미국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일본,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막대한 매출을 올림으로써 보답받았다. 그 결과 2편에선 이병헌이 더욱 극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갔다. 〈지.아이.조〉 시리즈는 미국 특수부대를 모델로 한 완구에서 출발한 영화다. 평화를 수호하는 ‘지.아이.조’ 부대와 세계 정복의 야심을 가진 악당 ‘코브라’ 군단의 대결을 그린 액션 오락물. ‘스톰 섀도’라는 닌자 캐릭터를 맡은 이병헌은 1편에선 ‘코브라’ 군단의 일원이었지만 2편에선 비밀에 싸였던 과거가 드러나며 ‘지.아이.조’의 협력자로 변신한다. 선과 악, 좋은 편과 나쁜 편 사이에서 승부를 가름하는 열쇠를 쥔 캐릭터. 액션 영화 속 기계적이고 전형화된 캐릭터를 답습하는 다른 할리우드 스타들과는 달리 이병헌의 활기차고 개성적인 아시아식 액션과 빼어난 심리, 눈빛 연기가 빛을 발한다. 할리우드에서 더욱 탄탄한 입지, 이병헌은 어떻게 체감할까.

“1편 때는 제가 나오는 장면의 촬영 스케줄이 어떻든 간에 무조건 오전 6시에 현장에 도착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번 2편을 찍을 때는 달라졌죠. 제 촬영 스케줄에 맞춰 현장에 도착하면 바로 찍었습니다. 오전은 제끼고 아예 오후 몇 시까지 나오라고 할 때도 있었죠.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가 직접 저를 몰래 불러서 제작 중인 트레일러(예고편)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홍보영상은 공식 릴리즈(공개)될 때까지는 배우와 스태프에게도 비밀이거든요. 마케팅 책임자는 저에게 조언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병헌은 여느 할리우드 스타들과는 다른 감성과 연기력을 지닌 ‘매혹적인 한국 배우’이기도 하지만, 아시아의 영화시장을 움직이는 스타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영화팬과 아시아의 한류팬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미국 영화사 관계자들과 스태프들도 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갔을 때 그 친구 대단하더라, 일본에서도 인기던데, 그런 소문들을 들었나봐요. 저한테 한국과 일본에서의 반응을 자주 물어보기도 하더군요. 영화 프로듀서와 관계자들은 저에게 ‘이런 음악을 한국 관객이 좋아할까?’ ‘이런 장면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등의 질문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배우가 있고, 카메라가 있고, 스태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고, 디렉터스 체어에 앉은 감독이 ‘레디’ ‘액션’ ‘컷’ 하는 풍경이야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를 리가 있을까마는, 촬영장을 한 걸음만 벗어나도 한국 감독과 배우들이 체감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 시스템은 무척 다르다.

“여기는 무조건 정해진 스케줄대로입니다. 영화 촬영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정표 그대로죠. 하루, 이틀 정도의 오차도 거의 없습니다. 매일 오전 6~7시에 시작해서 촬영시간은 12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주 5일 근무를 철저히 지키고요. 직장인과 똑같죠. 배우들의 경우 일단 작품 촬영에 들어가면 다른 약속은 아예 꿈도 못 꾸는데, 여기선 충분히 계획된 자기 생활을 할 수 있어요. 물론 할리우드 시스템이 너무 합리적이어서 무섭다고 느껴지고 정이 안 갈 때도 있지요.”


촬영을 앞둔 어느 날 매니저가 이병헌에게 “숙소인 호텔 냉장고에 뭐가 있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더란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을 이야기했더니 이번엔 “물(생수)은 어떤 브랜드의 것이 좋으냐”고 질문했다. 이병헌이 “왜 그러냐”고 반문했더니 계약서에 명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할리우드에선 촬영장의 숟가락 하나까지 챙긴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엔 이병헌을 비롯해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잇따라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 올해 차례로 선보였다. 김지운 감독은 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주연으로 기용한 액션영화 〈라스트 스탠드〉로 미국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었고, 박찬욱 감독은 미아 와시코브스카, 니콜 키드먼, 매튜 굿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한 〈스토커〉로 역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지난해 미국에 체류하며 영화 촬영에 임한 시기가 겹쳤다.


이병헌과 김지운, 박찬욱 감독은 이미 한 차례 이상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봤거니와, 개인적인 친분도 돈독하다. 이병헌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등 김지운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고, 박찬욱 감독과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공포영화 〈쓰리, 몬스터〉에서 만났다. 사석에선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들이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셋이 뭉쳤다. 영화 촬영도 ‘주 5일 근무’ 를 엄수하는 할리우드의 시스템 덕에 주말을 이용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모두 미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촬영을 했죠. 서로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어요. ‘아이고, 죽겠다. 너는 어떠냐’ 이런 내용들이었어요. 하루에 너댓 번씩은 서로 문자를 교환했죠. 그러다가 셋 모두 촬영을 마치고 LA에서 만나 식사와 커피를 함께 했습니다. 저하고는 달리 두 분은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미국영화에선 프로듀서의 힘이 워낙 막강하고 투자자의 힘이 엄청나서 한국영화계에서 감독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거든요. 서로 고충을 토로하고 위로했어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내심 한국 감독과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함께 뭔가를 만들어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무명’에 다름없는 할리우드행을 고집한 이유

만일 한국의 배우와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로 만난다면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굉장하고 근사한 장면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병헌에 앞서 만났던 김지운 감독도 욕심을 내비쳤다.

“이병헌과 같이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죠. 할리우드에서도 주연급 배우잖아요.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저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이병헌 같은 배우와 함께 한다면 이상적이겠죠. 이제 할리우드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니까 저는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에 대해서도 관심과 호기심이 많아요. 예를 들자면 브래드 피트나 라이언 고슬링, 제이크 질렌할, 조셉 고든 레빗, 조쉬 브롤린 같은 스타들 말이죠. 만약 그런 배우들하고 이병헌이 함께 등장한 한국과 미국 배우들의 연기 대결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짜릿하겠습니까?”


이병헌은 많은 관심 속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해 성공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지만, 처음에는 우려 섞인 시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악역’과 ‘액션’이라는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아계 배우의 전형적인 역할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로선 격에 맞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었다.

“팬들이나 주위의 걱정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갈등과 고민이 있었어요.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누구인지 알려지지도 않은 곳에서 제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기대할 수 없었죠. <지.아이.조>라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발판 삼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여전히 저는 ‘할리우드에선 어떤 시나리오가 올까’ 기다리고 선택받는 입장이죠. 언젠가는 여기저기서 저를 찾고, 저는 그중에서 제가 원하는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고르는 입장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이고요.”

그래도 이병헌이 고집한 것은 있었다. ‘스톰 섀도’는 닌자 캐릭터로 원래 중국이나 일본 출신으로 설정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병헌이 고집해 한국인으로 바꿨다. 이병헌은 극 중 주로 칼을 쓰는데, 제작진이 그에게 건넨 연습용 칼에 한글로 ‘폭풍그림자’라고 쓰여 있어 놀란 적도 있었다. ‘스톰 섀도’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아시아에서의 안정된 스타덤을 뒤로하고 ‘신인’이나 ‘무명’에 다름없는 할리우드행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 이병헌은 한마디로 답했다.

“배우로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죠. 그것 말고 뭐가 있을까요?”


이젠, 일도 사랑도 모두 중요하다

올해로 데뷔 22년째. 이병헌은 그동안 40편 가까운 TV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데뷔 초 〈내일은 사랑〉이나 〈바람의 아들〉의 풋풋하고 반항적인 청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가슴 따뜻한 남자, 〈공동경비구역 JSA〉의 해맑은 군인,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바람둥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에서 선악의 기로에 선 킬러, 그리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대이자 왕.

특히 관객 1000만 명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은 조선시대, 기생의 치맛자락이나 붙잡고 웃음과 음담패설이나 팔던 천출의 광대에서 ‘허수아비’ 가짜 왕이 돼 진정한 군주의 역할에 눈뜨는 인물을 절정의 연기로 보여줬다. 설득력이 강한 저음의 목소리에 걸리는 환한 미소, 그리고 쉼 없는 작품 활동으로 세공한 연기력이 이병헌을 지금까지 끌고 온 힘이다. 미남 청춘스타로 으레 따라붙는 각종 스캔들과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들,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의 부침 속에서도 이병헌은 ‘중심’을 놓지 않았다. 지난해 같은 소속사의 후배 연기자 이민정과의 열애를 인정하면서 무수한 소문 속에 시달렸던 그의 사랑도 결실을 준비해가고 있다.

그는 이민정과의 열애를 공개한 이후 언젠가 자리에서 “이젠 일도 사랑도 모두 소중하다”고 말했다. 흔한 말이지만 마흔세 살의 남자에게 그 무게는 남다르다. 이병헌은 데뷔 초 ‘한국의 제임스 딘’이라는 수식어가 심심치 않게 따라붙었다. 2010년 프랑스 칸 해변에서 만났던 흰 페도라의 이병헌은 절로 ‘아시아의 알랭 들롱’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지.아이.조2〉의 존 추 감독은 “아시아의 톰 크루즈”라고 했다. 액션과 심리 묘사에 모두 뛰어난 연기력과 한국 및 아시아에서의 흥행파워를 생각하면 제격인 비교다. 크지 않은 체구가 뿜어내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에너지,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 이미 영어가 입에 착 붙은 이병헌에게 차기작인 할리우드 영화 〈레드2〉도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서 충분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배에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 선명한 ‘식스팩’을 새겨가고 있는 중이다.
  •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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