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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재된 아리랑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줄 문화유산이지요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 소장

‘우리의 소리’ 아리랑이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에 등재됐다. 이 일을 누구보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2009년 ‘정선아리랑’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3년 후 우리 아리랑 전체가 세계인이 관심을 가지고 보존해야 할 ‘인류무형유산’ 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되돌아보면 긴 세월이다. 연어가 회귀하듯 그가 고향 정선으로 돌아와 정선아리랑을 채록하기 시작한 것이 22년 전인 1991년. 그는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정선의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오랫동안 그곳에서 터전을 내리고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녹음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중기 이중환이 쓴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 “나흘 동안 길을 걸었는데도 하늘을 보기 어려웠다”고 나와 있을 정도로 첩첩산중 정선 땅에는 정말 골짜기가 많았고, ‘아리랑’에 서린 할아버지 할머니 사연을 듣다 보면 해가 꼴깍 넘어갔다. 그는 자신이 찾은 골짜기들을 지도로 남기면서, 오랫동안 구전돼온 마을과 골짜기 이름, 옛이야기들을 모아 ‘지명유래’ 책도 여러 권 냈다.

“정선아라리는 최고음과 최저음 사이 폭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음이 길게 늘어지고 단조로워 가락만 익히면 누구든 즉흥적으로 자신만의 가사를 만들어 부를 수 있지요. 정선아라리를 그래서 ‘찍어다 붙이면 되는 소리’라고 해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즉흥적인 랩인 셈이지요. 두메산골 정선 사람들은 첩첩 산골에 묻혀 사는 설움, 시집살이의 버거움,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정선아리랑의 풍자와 해학으로 달래며 살았습니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모르나’같이 19금 가사도 많지요.”


아리랑의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定說)이 없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울분을 아리랑 가락에 실으면서 널리 부르기 시작했고, 그중 ‘정선아라리’가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그동안 수집해서 가사사전까지 만든 정선아리랑은 1200여 수. 녹음만 해놓은 것은 수천 수에 이르고, 요즘도 다니면서 녹음할 정도로 무궁무진한 자원이라고 한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에서 태어난 그가 정선을 떠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춘천중학교로 전학하면서였다. 광업소에 다니던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장남이 대처에 나가 성공하길 바랐다. 춘천중과 강원고를 졸업한 그는 장학생으로 인하대 독문과에 입학했고, 영어강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대학원까지 마쳤다. MBC 청소년문학상과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공모에서 시가 당선되고 문예지 〈심상〉의 신인상을 받으면서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그런데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첩첩산골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를 불러들인 것은 ‘그리움’이 아닐까?

옛 물건들이 전시된 ‘추억의 박물관’.
폐교를 활용해 만든 정선아리랑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강원도로 들어서자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선은 아예 눈 세상이다. 눈에 폭 싸인 한적한 풍경이 딴 세상에라도 온 듯하다. 정선아리랑학교는 더욱 그랬다.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터널을 지나가자 자그마한 교정에 빙 둘러 심어놓은 나무들에도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다. 교사(校舍)였던 자그마한 건물은 옛 물건과 교과서, 아리랑관련 자료 등을 모아놓은 ‘추억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이 옛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 함백초등학교 매화분교가 있었어요. 함백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토종자두인 고야를 따러 이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겁도 없이 바위절벽을 뛰어다니던 시절이었죠.”

아이들에게 아리랑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해 1993년 학교를 돌아다니며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그는 1997년 폐교인 이곳을 손질해 아리랑학교를 열었다. 이곳에 1년에 4000명씩 외국인이 찾아와 아리랑을 배운다. 그가 아리랑에 대해 강의하고, 정선아리랑 소리꾼이 아리랑을 불러주며, 함께 배우기도 하는 3~4시간짜리 프로그램이다. 일본의 경우, 매년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가고, 서구문화를 동경했던 소년은 이제 세계인을 고향마을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중학생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혼자 살아서인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각별해진 것 같아요. 전학하던 날, 함께 왔던 아버지가 떠난 후 텅 빈 하숙방에 고구마 한 봉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영어강사로 명성을 얻으면서 많은 돈을 손에 쥐어도, 그 돈을 쓰면서 폼을 내봐도 마음은 헛헛하기만 했다.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독일의 문화운동에서 용기를 얻은 그는 귀향을 단행했다. 그에게는 고향의 모든 것이 소중했고, 연구 가치가 무궁무진한 보물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고향사람들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뭐하려는 건지’ 마땅찮은 눈으로 바라봤다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쯤에야 저를 이해하셨습니다. 고향 어른들도 ‘쟤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고향에 돌아왔지? 정치를 하려는 거야?’라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셨고요.”

폐교를 활용해 만든 정선아리랑학교 마당. 학교를 둘러싼 산에도, 나무에도 눈이 쌓였다.
역사를 공부한 아내가 그에게 가장 큰 지원군이었다. 녹음기를 들고 함께 골골마다 다니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리랑 가락을 녹음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다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발 담그고 놀았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죠.”

그는 “시골생활을 겁내지 말라”면서 “반찬할 푸성귀를 텃밭에서 가꾸고, 쌀 한 포대만 사놓으면 살림 걱정이 없으니 한 달에 20만원이면 거뜬하다”고 말한다. 열심히 원고를 써서 모은 돈 대부분은 아리랑 연구에 쏟아부었다. 정선아리랑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와 일본에 사는 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까지 그의 연구 분야는 넓어졌다.

“1993년부터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찾아 아리랑을 채록해왔습니다. 흑룡강성 최고의 소리꾼이라는 분도 만났지요. 중국이 조선족의 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것에 대해 ‘우리 아리랑을 뺏기게 되었다’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하나로 해석하려 하는데, 이는 잘못 이해한 겁니다. 조선족 예술가들이 아리랑을 보존,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형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한 것이거든요.”


조선족 사이 아리랑의 위상은 우리보다 훨씬 높다. 연변가무단이 공연하는 대형 오페라 형식의 ‘천년아리랑’이 2007년 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에서 1등을 하면서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더욱 커진 결과라는 것이다.

“연변예술극장에서는 200명이 출연하는 대형 가무극 ‘천년아리랑’을 매일 무대에 올리고 있습니다. 2002 월드컵에서 경험했듯 아리랑에는 이념과 진영의 논리를 뛰어넘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습니다. 아리랑을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유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대에 맞는 새로운 공연 형식, 타 장르와의 접목 등 다양한 시도가 필요합니다.”

그는 “아리랑을 통해 세계인에게 우리의 에너지를 전할 수도 있다”고도 말한다.

“중앙아시아의 아리랑을 채록하러 떠나면서 일부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타슈켄트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습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의 설움을 간접경험하고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정작 그곳에서 고려인을 만난 후 묵직한 마음으로 왔던 것에 대해 ‘내가 오버 액션했구나’ 하고 멋쩍어졌지요. 그분들이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유라시아를 누비고 있겠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이게 바로 아리랑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리랑은 한과 설움에 주저앉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걸 해학으로 풀어내고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노래이지요.”

아리랑에 담긴 이 정신이 지금 바로 현대의 세계인이 갈급해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경제위기에 짓눌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계인들을 위로하고 힘을 줄 자원을 그는 자신을 키워낸 고향에서 찾은 것 같다.

사진 : 김선아

함백역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에 있는 철도역으로 1957년 개역, 5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용객이 줄면서 2006년 철거된 것을 주민들의 힘으로 2008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진용선 소장은 “청량리역에서 밤 10시 반 열차를 타면 함백역에 새벽 1시 반에 도착했다”고 옛 시절을 추억한다. “근처 탄광이 하루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에 근무를 끝내고 나온 광부들로 함백역 주변 대폿집들이 훤히 불을 밝히고 있었지요. 그래서 한밤중에 내려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대폿집에서는 니나노 장단과 아리랑이 흘러나왔고요.” 하루 이용객이 900명에 달했던 이 역은 탄광산업과 쇠락을 함께했다. 역사가 부수어져 폐허가 된 것을 보고 자신의 과거가 만신창이가 된 듯 가슴 아팠던 그는 함백역 복원을 위해 사비 2000만원을 내놓았다 한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배경으로도 등장한 곳이다.
  • 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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