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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임수정의 모든 것’ 보여주다

임수정, 성숙해가는 여배우의 초상

임수정(33)을 처음 본 것은 대개의 팬이 그렇듯 약 10년 전인 2003년 6월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의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였다. 임수정은 스물세 살이었지만 유난히 앳된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도 여고생 역할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데뷔해 드라마 〈학교4〉에서도 그랬고, 영화 첫 출연작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도 교복을 입었다. 〈장화, 홍련〉 다음 작품이었던 〈…ing〉에서도 극중에서만큼은 미성년자였다. 〈장화, 홍련〉은 임수정의 출세작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이름보다는 CF의 브랜드명이 더 기억에 가까운 신인이었다. 한 여성용품과 커피음료 제품 CF에 앳되고 청순한 얼굴을 내밀어 주목받고 있었지만 연기로는 알려지지 않았던 때다. 인터뷰에선 2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라는 게 전혀 믿기지 않는 소녀 같은 이미지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화, 홍련〉은 영화도 걸출했고, 임수정과 문근영의 연기도 괄목할 만했지만 적어도 인터뷰에서 임수정은 아직은 배우라기보다 연예스타가 더 되고 싶은 ‘지망생’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요새같이 연예계 데뷔가 빠른 세태에서 10대 후반은 물론이고 20대 초반의 가수나 배우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후 영화 개봉에 맞춰 한두 번 더 말을 섞었고 처음 만난 지 10년 후인 지난 5월 다시 임수정을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벌써 잡지 모델로 데뷔한 지 14년이 흘렀고, 연기 경력 12년차가 된 여배우로서였다. 사실 인터뷰를 해보면 데뷔 1년 때나 10년 때나 신인이거나 스타가 된 뒤나 좋게 말해서 늘 그대로 한결같은 연예인이 있고, 나쁘게 말해서 사고나 내공이 항상 그자리에서 맴도는 배우, 가수가 있다. 임수정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다. 단답형이었던 말은 조리 있고 내용이 풍성한 대화로 발전했고, 가끔 말머리를 잃고 미로를 헤매는 듯하던 사고는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피라미드의 벽돌처럼 굳건하고 정연해졌다. 가끔은 화제를 스스로 던질 정도로 임수정의 세계는 외연도 넓고 커졌다. 세월이 가고 작품이 쌓일수록 끊임없이 옛 허물을 벗고 새로운 눈과 촉수를 갖게 되는 배우가 있다면, 임수정이 바로 그렇다.

“어느덧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네요. ‘내공이 생겼다’ ‘성장하고 있다’는 평만큼 기분 좋은 게 없죠.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예전에는 가리는 것도 많고 뭐든지 조심스러웠는데,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거침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툭하고 나를 내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어요.”

내공은 연기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장화, 홍련〉부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거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행복〉 〈전우치〉 〈김종욱 찾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까지, 다양한 장르와 함께 인물의 변주는 더욱 능란해지고 표현의 세기와 밀도는 숙성해갔다. 최근작인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은 가히 ‘임수정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농익은 연기를 보여준다. 아침마다 건강주스를 대령하고 저녁마다 푸짐한 요리상을 내며 쉼 없는 대화로 남편(이선균)과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아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부조리는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시비를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궤변, 독설가 타입의 여성. 그러다가 믿었던 남편에게 ‘하루빨리 헤어지고 싶은 아내’가 되고, 남편이 ‘작업’을 의뢰한 희대의 카사노바(류승룡)의 미끼에 걸려드는 여자. 속사포 같은 언변을 보여주는 인물인 만큼 다른 작품 주연의 서너 배는 되는 대사를 소화해야 했고, “말을 더 빨리”를 입에 달고 산 감독의 채근에 시달려야 했다.

임수정은 “혀가 꼬이고 말이 씹히고, 단어가 지들끼리 붙고 섞여 통제가 안 될 지경”이라며 요샛말을 들어 “멘탈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고 했지만 작품과 인물에 대한 해석은 진지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제가 전작에 이어 유부녀를 연기했지만 정서와 감정만큼은 생물학적인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이었어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지인들과 두 선배(이선균, 류승룡)로부터 결혼생활에 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지만 결혼 유무를 떠나서 남자든 여자든 관계가 익숙해지면 상대에게 소홀함이 생기는 법이죠. 자신은 남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이 돼야죠. 예전엔 ‘결혼 꼭 해야 돼?’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결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변화예요.”

20대 중반까지 여고 세일러복이 썩 잘 어울렸던 배우는 서른 살이 넘어선 미혼임에도 유부녀를 연기했다. 현빈과 공연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선 어느 날 문득 남편에게 이별을 통고하는 여인이었고,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선 결혼 7년차, 남편이 지겨워하고 무서워하며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존재가 됐다. 임수정이 여인으로서 성숙했고, 배우로선 연기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남편(이선균)은 이혼을 위해 이웃에 사는 희대의 카사노바(류승룡)에게 아내의 유혹을 부탁한다. 임수정이 맡은 인물 정인은 도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자기 생각을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멋진 여성이다. 임수정의 해석이다.

“그녀의 언어는 일상적이기보다는 논리의 언어죠. 옳고 그름에 대한 엄격한 시선으로 세상을 봅니다. 정인의 눈으로 읽은 세상에 공감하는 것이 이번 작품 연기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직설적인 면모는 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한두 번 심사숙고하고 했던 말들이 이제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오기도 해요.”

서른을 넘고 경력이 붙어가니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도 바뀌고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변했다.

“20대 초・중반에는 딱 봐도 나와 닮아 연민이 가는 인물에 정이 가고 끌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한테 과연 이런 모습을 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물음표가 생기는 작품과 캐릭터에 적극적인 도전의식이 생겼습니다. 임수정은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인물은 김지운 감독의 공포영화 〈장화, 홍련〉에서 ‘수미’를 꼽았다. 계모 밑에서 불안과 망상에 시달리며 어린 동생(문근영)을 이끌어야 하는 여고생 역할이었다. 스스로의 방어벽을 깨뜨리고 연기에 눈을 뜨게 한 작품과 역할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바닥을 쳤죠. 당시 저의 한계까지 도달했던 것 같아요. 저를 다 던진 작품이었고,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은 영화였죠. 그 어떤 캐릭터보다 아직까지 저에게 그림자가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 바로 수미죠. 제 실제 모습과 가장 닮아 있어요. 차갑고 어두우며 건드리면 깨질 것같이 슬픔이 많은 아이죠. 공식 일정 외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는 〈장화, 홍련〉의 수미 같죠. 다만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오래전 벗어놓았던 옛 허물은 성장의 증거이기도 하다. 10년 전 인터뷰를 들춰내보니 그때도 단어는 달랐지만 뜻은 같았다. 당시 임수정은 “실제 나도 장녀로 극중 수미와는 닮은 점이 많다”며 “차갑고 건조하지만 가족과 동생에 대한 책임감이 있고 복잡한 내면과 외로움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임수정은 〈장화, 홍련〉을 끝내고 나서도 1년여간 작품과 배역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임수정은 “그때처럼 극중 인물에 미친 듯이 빠져서 1년 동안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역할을 맡고 싶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꼭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도연 선배처럼 더 내공을 쌓아야겠죠?”라고 물었다.

임수정은 고교 재학 중 한 대학의 연극 워크숍 〈리어왕〉을 보고 전율이 일어 연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신인 시절 털어놓았다. 연기 공부뿐 아니라 어학・미술・음악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초심은 잃지 않았을까.

“노래가 될 때도 있고, 책이 될 때도 있어요. 기타 사운드나 미술 작품, 연극, 뮤지컬 등 다른 장르의 예술이나 지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요. 무용 공연장이나 갤러리도 자주 다니려고 노력하고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도 자주 만나고자 해요. 새로운 세계에 열려 있고, 새로운 자극에 깨어 있고 싶습니다.”

임수정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대중 예술가의 삶, 위대한 여성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과 전설적인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전기 영화 〈라 비앙 로즈〉를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첫손에 꼽았다.

“실존 인물의 삶, 위대한 스타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그들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회를 위해선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임수정의 말이다.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재클린 케네디나 오드리 햅번 같은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임수정은 최근 유홍준 교수의 책들을 손에 들었다. 얼마 전 <서도호 전>이 열린 리움미술관을 찾았는데, 유 교수의 책 속에서 만났던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임수정은 “김환기 화백이 파란 점을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와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임수정은 촬영이나 행사가 없을 때는 웬만해선 바깥바람을 잘 쐬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그 시간의 일부는 기타와 함께다. 2년째 치고 있다. 최근 즐겨 연주하는 곡은 비틀스의 ‘블랙버드’와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케이먼 인 아일랜드’다.

“다른 분야의 예술과 작품을 통해 나도 놀라울 정도로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해요. 이러다가 연기 안하고 다른 길 간다고 할까 봐 회사(소속사) 사람들은 손을 내저어요. 하하.”

사진 : 김현철
  • 201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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