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칼럼니스트 이용재가 찾은 맛] 전남 구례 농부 홍순영

자녀들과 함께 순환농법으로 농사짓지요

점심 밥상에 다가앉다가 벽에 걸린 사진에 눈길이 닿았다. 벼가 잘 익어 고개를 숙인 황금물결을 배경으로 그와 그의 처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품에는 잘 익은 벼를 한 아름 안고 있다.

“군청 다니는 동생이 ‘형님, 제가 드릴 건 없고 사진이나 한 장 찍어드리겠습니다’ 해서 찍었습니다. 그림이 좋지요? 저럴 때 오셔도 좋을 텐데요.”

농부 이야기라면 결실의 계절 가을이나 햇살 아래 곡식이며 과일이 익어가는 여름, 그도 아니라면 본격적인 모내기철인 늦봄쯤이 오히려 ‘좋은 그림’에는 더 제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사는 생명을 가꾸는 일, 단지 좋은 그림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더 큰 명분으로 사계절 내내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차라리,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이야기를 더 담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도 차가운 4월 말 새벽 공기를 가르며 새로 뚫린 순천-완주 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마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농부 홍순영. 구례에서 나고 자라 오십이 꺾이도록 농사를 지었다. 열아홉에 처음 땅을 샀는데, 그때 목표는 ‘나이 오십에 머슴 둘 둬 농사짓게 하고, 흰 두루마기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생일에 개량 한복을 좋은 걸로 한 벌 맞췄는데, 뭐 그냥 그렇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머슴은 과거 시제가 되었지만, 어쨌거나 농사를 잘 짓겠다고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말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농사의 특성 때문인지, 취재 요청도 “오는 것은 말리지 않지만 이야기하는 시간을 따로 내기 위해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단서와 함께 응낙한 그였다.

고백하자면 이번 취재는 ‘팬심’에서 비롯되었다. 눈밭에 서 있는 그와 ‘경비실장’인 백구 진순이-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새끼가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다-의 사진을 다른 매체에서 보았을 때, 마침 필자의 집에는 쌀이 똑 떨어진 상황이었다. 사진의 느낌이며 나고 자란 곳에서 쭉 머물며 흙과 함께했다는 그의 이야기에, 머뭇거림 없이 그의 홈페이지를 통해 쌀을 주문했다. 바로 다음날 받은 쌀로 지은 그 밥의 달고 구수한 냄새는, 여태껏 맡아온 것들 가운데 최고였다. 이후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쌀이며 밥을 푸대접하며 식당에서 멀쩡한 밥 한 공기 먹기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요즘, 한 해의 쌀농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향이 좋은 쌀, 즉 향미를 30에서 50대 1의 비율로 섞어 파종합니다.”


해도 채 뜨기 전 도시인으로서는 호들갑에 가까운 부지런을 떨어 나섰지만 ‘흙손’이라며 내민 그의 손과 악수를 나누던 시각, 농부의 하루는 이미 여섯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인사 대신 밥 냄새 이야기를 하자 그가 설명을 덧붙인다. 막 일군 고랑에 조심스레 내리는 모판에도 바로 그 향미가 섞여 있으리라. 한 해 벼농사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과정이니만큼, 오늘은 근처 여수에 사는 큰딸 미화도 합류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요리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수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친정 근처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친정 일에 보태려는 그녀의 손에는, 집 앞 갯벌에서 캐왔다는 바지락이 들려 있었다.

홍순영의 농사는 철저한 ‘패밀리 비즈니스’다. 핵심에는 넷째 딸 진주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작부터 아버지의 오른팔 노릇을 해온 그녀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정직원으로, 농사를 돕는 한편 주문을 포함한 홈페이지의 운영을 책임진다.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찾았던 쌀의 판매 창구를 홈페이지로 단일화한 것이 4년 전 일이다. 막내인 아들 기표도 농업대학의 과수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합류했다. 여기에 그의 처까지 전부 다섯 식구의 손발이 착착 맞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5녀 1남 모두가 어릴 때부터 도왔던 집안일일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집 주변에는 온갖 덩치 큰 농기구가 가득하다. 도시의 문외한은 트랙터와 지게차까지는 맞힐 수 있었지만, 그 나머지의 임무는 딱히 헤아릴 수 없었다. “쉽게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그가 지금까지 농기계에 투자했다는 비용을 들으니, 입이 딱 벌어진다. 이날 벌어진 못자리 준비도 그렇다. 발아에 필요한 흙, 즉 ‘상토’와 볍씨를 전부 함께 담는 예전 방식과 달리, 그가 쓰는 모판은 아주 작은 컵에 볍씨와 흙이 개별적으로 담겨 있는 방식이다. 이 또한 물론 기계의 손으로 담는다. “이 방식을 쓰면 모종의 뿌리가 서로 엉켜 다치지 않아 모내기하기에도 편하고, 모내기를 하고 나서도 뿌리를 빨리 내립니다.” 한 톨의 볍씨가 싹을 틔우면 가을에 평균 580톨의 낟알을 거둘 수 있단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기적이 아니라면 또 무엇일까?

발전된 기술이며 여러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기계가 노동력의 측면에서 부담을 덜어주는 덕분에 사람은 세심한 판단을 바탕으로 한 보살핌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그걸 홍순영은 ‘애착’이라고 정의한다. “모두 생명이다 보니, 마음 주는 것을 다 압니다. 매일 아침마다 땅을 죽 돌아보는데, 혹 상갓집에라도 다녀온 날에는 건너뛰지요.” 이러한 애착은 바로 그가 고집하는 친환경 농법인 ‘순환농법’의 정신적 바탕이다. 잡초 제거며 영양 보충을 위해 그는 제초제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농산물이 자라는 바로 그 땅에서 나는 각종 식물에 산소를 더하지 않고 태워 증류한 액체-그가 ‘물질’이라고 부르는-를 희석시켜 뿌리는 한편, 농사지은 쌀을 도정하고 남은 쌀겨에 쇠똥을 섞어 산에 두는 방식으로 ‘토착 미생물’의 손을 빌려 만든 퇴비를 둔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씁니다.” 마을의 모임 공간으로 쓸까 싶어 최근에 증축했다는 그의 집 2층 공간 한쪽 벽에는 담배나 감초, 다시마나 파인애플과 같은 낯익은 이름부터 까마중, 소리쟁이처럼 다소 낯선 이름의 식물로 만든 50여 종 ‘물질’의 표본이 효능이며 용례가 적힌 이름표를 달고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세월을 거듭하며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이 물질들의 쓰임새를 파악하고 있다. 매실 등도 〈농부 홍순영〉의 브랜드로 생산하지만, 홍순영표 순환농법의 대표 주자는 쌀과 감이다.

“대부분의 쌀이 97.8% 이상 익었을 때 수확하는 데 반해 우리 쌀은 85~92% 익었을 때 수확합니다. 쌀의 단백질 함량이 낮을수록 밥맛이 좋은데, 그 시기가 최적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백미는 물론 찹쌀, 찰현미, 도정하지 않았을 때 붉은색을 띠는 홍진주쌀이 주요 품목인데, 자연 발생한 식물성 오메가-3의 높은 함유량을 검증받았다. 밥을 지으면 알알이 지나치게 달라붙지 않고 잘 살아 씹는 맛이 있다.

한편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름난 품종인 대봉감은 반쯤 말린 ‘반건시’로 주로 판매하는데, 건조 과정에서 벌레가 꼬이지 않도록 통상적으로 쏘이는 유황을 쓰지 않는다. 입에 넣으면 씹을 필요 없이 사르르 녹으며 잘 균형 잡힌 단맛을 선사한다.

“감이 맺히기 시작하면 양분을 몰아주기 위해 솎아줘야 합니다. 나뭇가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들여다보고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해줘야 하는데, 그래서 농사가 어렵습니다.”

분봉해 감나무에 붙은 벌-감꽃 수정을 위해 키운다-을 떼어내 벌통에 담다 말고, 그가 이제 막 여린 잎이 나기 시작하는 감나무 가지를 뒤집어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농사에서 ‘애착’은 천생 ‘정성’의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큰딸이 손수 캐온 그 바지락에 애호박, 그리고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을 넣고 끓인 찌개가 중심을 단단히 잡은 밥상을 놓고, 필자는 안주인에게 밥 짓는 비법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도 충분히 맛있지만, 혹시라도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비법이랄 게 뭐 있나요. 무농약 쌀이니 두어 번 씻어 압력밥솥에 지어 먹지요. 딱히 불리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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