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58) 황동규 〈풍장 1〉

죽음을 가지고 놀게 해다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1982년 〈풍장 1〉을 월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한 뒤 같은 잡지 1995년 7월호에 〈풍장 70〉을 발표하며 이 연작시편을 끝냈으니,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렸다. 〈풍장 1〉은 70편으로 이루어진 〈풍장〉 연작시편의 맨 앞머리에 오는 시다. 풍장(風葬)은 유해를 땅에 묻지 않고 들판이나 산 따위에 방치함으로써 새나 들짐승이 먹어 치우게 하거나 자연 부패하게 놓아두는 장법(葬法)이다. 한반도 서남쪽에 있는 섬들에는 오랜 유습으로 이런 장법이 남아 있다. 〈풍장〉 연작시편들에서 죽음은 그 유한성에 갇힌 실존의 어두운 조건이기보다는 일상화된 사건들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라는 첫 줄에서 드러나는 죽음을 말하는 어조의 담담함과 초연함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죽음이란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가는 것(〈풍장 2〉)이거나, “몸속 원자들 서로 자리 좀 바”꾸는 것(〈풍장 35〉)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죽음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절박하면서도 황홀하게 살아내는 한 방법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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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일으키는 번민과 괴로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번민이요 괴로움이다. 누구도 죽음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없고, 우리가 죽으면 역시 죽음에 대한 인식도 그것이 만드는 고통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생명을 받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은 화살촉처럼 삶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시간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데려다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분배하고 쓰는 주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간에 휘둘리는 노예이기도 하다. 실은 사람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들이다. “시간은 모든 것이고, 사람은 무가치하다. 사람은 고작해야 시간의 시체일 뿐이다.”(칼 마르크스) 시간은 삼라만상을 변화 속으로 이끄는데, 오직 죽음만이 그 변화와 상관없이 유일하게 영구불변하는 것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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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기어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인은 그것을 갖고 놀기로 작정한다. 그 놀이의 한 방식이 곧 탈골 여행이다. 〈풍장 1〉의 첫 연은 그 여정을 구체적으로 펼쳐낸다. 전자시계를 차고 옷도 입은 채인 유해를 가죽가방에 넣어 군산이나 곰소항에서 통통배에 옮겨 싣고 무인도까지 데려간다. 그리고 무인도에 바람 속에 방치해두면 유해는 풍화되어 뼈만 남는다. 그런 죽음에 이르러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경지에 든다. 시인은 그런 놀이로서의 죽음을 시적 명상을 통해 선험한다.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손목시계 부서질 때”,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라는 구절을 보면 시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타자화시켜버린다. 아마도 이것이 삶에 내재하는 죽음을 내면에서 길들이려는 기획의 일부일 것이다. 죽음을 타자화한다고 해도 사람은 죽음이라는 숙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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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은 벗의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웃는 영정사진을 들여다보고, “달라진 게 없다고” 독백한다. “영안실 밖에 내리는 저 빗소리도/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다 그대로 있다고.”(〈풍장 35〉) 하지만 죽은 벗은 그 자리에 없다.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속에서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와 영안실에서 화투 치는 사람들의 소리와 산 자의 슬리퍼 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은 그 소리들이 가리키는 삶의 생생한 기미들과 더불어 삶을 관조하는데, 불현듯 삶에 대한 관조는 삶 속에 깃든 죽음에 대한 관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 관조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뜻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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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은 인류 전체의 유적(類的) 삶을 균등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실존의 조건이다. 죽음은 인류의 유적 삶을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유한성 안에 가둔다. 죽음이 만든 그 유한성이라는 조건으로 말미암아 삶은 하나의 황홀경으로 바뀐다. “죽음에 관한 명상이자 희롱이면서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라는 〈풍장〉 연작시편들은 죽음을 삶으로서 살아낸다는 점에서 뛰어난 시편들이고, 한국시의 외연을 넓히는데 기여한 작품이다. 시인은 죽음을 갖고 놀음으로써 그것과 소통하고 길들이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의 주검에서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거부한다. 오직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함께 놀게 해다오”라고 소박한 소망을 피력한다. 이 소망을 피력하는 낙천적인 어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자의 천진성마저 엿보게 한다. 삶이란 죽음이 안무해낸 춤이다. 우리는 시간이란 무도장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삶이란 춤을 추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시간의 흐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 이 시간이란 무도장에서는 죽은 우리가 아닌, 산 누군가가 삶이란 춤을 출 것이다.


황동규(1938~ )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황순원이라는 거목이 드리운 그늘을 벗어나 한국 현대시의 거목으로 우뚝 자라났다. 그는 서울대학 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임했다. 19세 때 훗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즐거운 편지〉를 써낼 정도로 조숙했다. 그의 시들은 생의 기미를 드러내는 말들의 풍경을 빚어낸다. 그의 시에서 한국어는 명석하면서도 화사하고 우아한 언어라는 게 분명해진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한국시를 대표하는 시인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1958년 월간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되어 시인으로 등단한 뒤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어로 시를 쓰면서 한국시의 생태계에서 그만큼 제 자리를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인도 드물다. 1995년에 내놓은 시집 《풍장》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은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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