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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에 이끌려 떠나는 봄철 밥상 여행

은어와 황어가 날래게 몸을 저어 섬진강으로 올라오는 경칩과 춘분 사이, 하동에서 희디흰 매화가 펑펑 터지기 시작하면 구례 쪽에서 맞불이라도 당기듯이 노오란 산수유가 들불처럼 번진다. 봄의 발화점이다. 몸집을 키운 벚굴이 사람 손을 타고, 아침부터 재첩을 잡는 아낙들의 손도 바빠졌다. 강가는 은비늘이 바스락바스락 쏟아지고, 정신없이 터지고 또 터지면서 섬진강의 봄은 우리의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한다. 아직 바람은 삽삽한데 이 꽃사태를 벚꽃이 바통을 이어받을 때쯤 차 농사를 짓는 농부들 맘은 다급해진다. 찻잎들이 순을 내놓기 때문이다. 곧 찻잎 덖는 풋내가 토방마다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싱그러운 야생 햇차를 음미하며 이 봄을 낚을 차례다.
섬진강 재첩

도다리쑥국(사진 유창우).
기실 낭만이라는 것은 오므라졌던 꽃잎 열릴 때, 국수 한 그릇 덩그러니 앞에 놓고 혼자 멀뚱하니 강을 바라보는, 그 하찮은 일상에서 나오는 법이라는 것을 자꾸만 깨우치게 된다. 여행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과 맘이 다 열려 꽃처럼 흔들려도 입이 즐겁지 않으면 여행의 맛은 반감되는 법이다. 이 봄, 어디로 떠나고 어떤 맛을 찾아야 오감이 즐거울지, 당신은 어디에 맘을 담그고 추억을 쌓을지, 선택은 자유다.

말이 나왔으니 섬진강부터 가보자. 구례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 강변 19번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강이 길을 따라오는, 아니 길이 강을 따라가는 이 도로는 벚꽃이라도 날려주면 맘 걷잡을 수 없는 꽃자리다. 하동과 만나는 경계쯤에 허름한 국숫집이 있다. 부부가 트럭에서 간이로 말아 내는데 어쨌거나 이 자리서 20년째다. “재첩국수 한 그릇이요!”를 외치고 몸을 구부려 두어 평 되는 비닐 천막 속으로 들어가면, 섬진강이 한눈에 잡히며 볕이 이렁이렁 들어온다.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금세 둥근 쟁반에 국수를 내온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거뭇거뭇하게 재첩이 제법 많이 들어 있다. 지금 섬진강은 재첩 철이긴 하지만 꼭 섬진강 것이냐고 묻지는 말자.

잘 삭힌 묵은지와 민들레김치를 얹어 먹으니 마치 어머니 밥상처럼 편하다. 맛이야 특별할 것은 없으나 볕 쏟아지는 강가에 앉아 국수 한 저름 하는 일, 이 봄의 낭만이 아니겠는가. 주인이 지난봄 따서 말렸다는 산뽕차가 노란 주전자에 담겨 나온다.


조금 내려가 화개장터나 매화마을 인근 포장마차에서 어른 손바닥만 한 벚굴을 구울 차례다. 민물과 바닷물이 합해지는 지점에서 나오는 이 강굴은 황어와 함께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한번쯤 맛봐야 할 계절 별미다.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불을 피워 타닥타닥 구워 먹는 재미는 더 좋다. 바다 굴보다 싱겁다. 구례 읍내를 기웃거려보면 의외로 맛집이 제법 있다. 구수한 새우국물과 함께 나오는 ‘평화식당’(061-782-2034)의 투박한 육회비빔밥도 좋고, 술꾼들은 바로 옆 선술집 ‘동아식당’(061-782-5474)에서 돼지족탕이나 가오리찜을 시킨다. ‘봉성식당’(061-782-7262)은 현지인들이 손꼽는 돼지머리국밥집이다. 상사마을에 들어가 300년 된 고택 ‘쌍산재’에서 하룻밤 여정을 풀면 어떨까. 댓잎 소리 들으며 머무는 정취는 이곳 구례만의 특별한 감흥이다. 예약 필수.

쌍산재.

통영 도다리쑥국

통영 충렬사 백석자리.
허나 어쩌니 저쩌니 해도 ‘도다리에 해쑥을 더하는 순간 봄의 맛이 완성된다’고 했다. 봄 별미를 꼽자면 그래도 통영의 도다리쑥국이 앞자락에 선다는 얘기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고 하지 않는가. 이즈막 도다리는 겨울 산란기를 끝내 크고 살집이 도톰하게 올라 있다. 게다가 논두렁 밭두렁마다 해쑥이 밀고 올라오니 아낙들은 너도나도 바구니 하나씩 들고 들판에 꽃처럼 나앉는다. 딱 이맘쯤 한두 달 즐기지 못하면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통영에 가면 집집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옆에 도다리쑥국이라는 간판을 함께 내건다. 봄 신호다. 도다리쑥국은 양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쌀뜨물에 된장 한 숟가락 풀어 무와 도다리를 넣고 폭폭 끓이다가 국을 풀 즈음 해쑥을 넣어 숨만 죽인다. 담백하고 시원하다. 영양은 물론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그런가 하면 미나리 우둑우둑 분질러 넣고 맑게 끓인 졸복 맑은탕도 통영 별미다. 서호시장 ‘분소식당’(055-644-0495), ‘수정식당’(055-644-0396)이 이런 탕 종류를 잘 끓여낸다.

여기에 새싹과 김을 부숴 넣은 멍게젓비빔밥을 곁들이면 입안 가득 향기로움이 마치 봄날의 바다처럼 달고도 쌉싸래하다. 다진 조갯살에 된장과 양념을 넣어 조개껍데기에 올려 굽는다는 유곽을 넣고 생멍게를 비벼 먹는 멍게유곽비빔밥도 통영 명물이다. 근자엔 약식으로 조갯살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어 자박자박 졸이는데, 멍게의 쓴맛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중앙시장에 있는 ‘통영맛집’(055-641-0109)이 알려져 있다. 서호시장에 가면 시래기에 장어를 넣고 고아 내놓는 ‘원조시락국’(055-646-5973)은 꼭 먹어봐야 하고,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오미사꿀빵’(055-645-3230)은 정겨운 추억의 간식이다.


기실 통영은 문화예술인들 정취가 가득한 곳이다. 소설가 박경리의 가슴 아픈 인연이 있는 생가 근처와 백석이 맘에 뒀던 처녀를 그리며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을 듯”이 기다렸다는 충렬사 계단, 청마 유치환의 순애보가 담긴 〈행복〉이라는 시의 근거지 중앙우체국을 두루 둘러봐야 옳다. 맺어지지 못하고 글로 승화된 그들의 애절한 사랑길이 ‘토영 이야~길’로 재탄생했으니 가족 혹은 연인과 손 꼭 잡고 걸으면서 시대를 짚어보는 것도 통영을 다르게 만나는 방법이다.

하지만 봄은 계절의 사춘기답게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맛을 갈구하게 된다. 혀가 깔깔하여 뭔가 향이 있는 산뜻한 맛을 찾는데, 뼈를 발라내 날미나리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쳐낸 멸치회 한 접시면 잃었던 입맛이 바로 돌아온다. 물론 잘 삭힌 막걸리 식초를 넣어야 풍미가 산다. 3~4월, 통영 횟집들은 멸치회를 계절 요리로 내놓지만 인근 부산 대변항이나 남해가 더 유명하다.




부산 멸치가 그물에서 털어내는 것이라면 남해 죽방렴은 뜰채로 건져낸다. 그러니 싱싱함이 더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죽방렴은 10m 이상 되는 대나무와 통나무를 물살 빠른 곳에 V자로 박아 그물을 설치, 고기를 잡는 원시 그대로의 어획 방법을 쓴다. 하여 횟감으로 인기가 높은데, 대개 큰 은멸치 고바를 이용해 갖은 요리를 버무려 낸다. 술꾼들은 통멸치를 시래기와 함께 보글보글 끓여낸 멸치찌개나 고소하게 구워낸 멸치구이를 동동주 한 잔과 곁들이길 좋아한다. 하지만 뜨끈한 흰 밥에 얹어 먹는 잘 삭은 통멸치 젓갈은 공인 밥도둑이다. 멸치회는 선도가 중요해서 현지가 아니면 먹기 힘들기 때문에 그 핑계로라도 남으로 남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다.

남해 지족리에 30년 내공 ‘우리식당’(055-867-0074)은 멸치쌈밥과 갈치요리가 알려져 있다. 부산은 대변항 ‘장군이멸치회촌’(051-721-2148)이 반응이 좋다.

김제보리밭.

청산도 홍어

통영 서호시장 골목.
그런가 하면 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슬로시티 전남 완도 청산도의 청보리밭을 떠올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푸른 보리와 노란 유채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데, 여기가 영화 〈서편제〉 촬영지다. 청산도 당리 마을에서 바라본 풍광이 가장 아름답다. 이맘쯤 홍어가 좋을 때인데 완도 군청 아래 ‘인동초식당’(061-552-5552)이 홍어삼합을 잘한다. 보리싹과 홍어 내장 등을 넣고 자박자박 끊인 홍어앳국(홍어애보리국)은 코끝을 쏘는 매운맛과 시원한 국물 맛이 별미인데, 가능한지 주인장 맘을 떠보길 권한다. 완도 미역도 이 시기가 가장 맛있을 때여서 한 두름 사오면 좋다. 이곳에서는 회를 먹고 난 후 미역을 넣고 싱건탕을 끓여주는 집이 많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오면 고창이나 김제 보리밭도 봄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곳이다. 청보리밭축제는 고창 학원농장(063-564-9897) 일대에서 매년 4월 중순께 열린다.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 같은 징게맹갱 김제평야라고 했다. 수백만 평 김제 보리밭 지평선은 거대한 파노라마다. 도심의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무대로 1만8000매 원고가 고스란히 보관된 문학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따지지 말고 코 힝힝 풀며 짬뽕을 먹어야 한다. 다시마 국물을 내 돼지고기와 청양고추가 고봉밥처럼 올라간 ‘대흥각’(063-547-5886) 매운 짬뽕은 속이 아릴 만큼 맵고 그래서 맛있다. 춘곤기 서해안 어촌 사람들이 즐기던 주꾸미도 제철이다. 충남 서천 마량포, 홍원항 등지에서 맛볼 수 있다. 물론 홀짝홀짝 마시다가 못 일어난다는 앉은뱅이 술 한산 소곡주 곁들이는 일을 잊지 말자.

사진 : 손현주
글쓴이 손현주님은 여행작가이면서 와인칼럼니스트. 여행지의 밥상이야말로 인심과 역사, 사람의 정이 밴 시대풍속화라고 믿는 미식 예찬론가다. 20년간 별일 없이 다닌 신문사를 대책 없이 관두고 2년간 전국을 휘돌아 《계절밥상여행》(앨리스, 2012)을 펴냈다. 저서로 《와인 그리고 쉼》, 《노웨어》(공저) 등이 있다.
  • 201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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