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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권하는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 낸 전석순 작가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시대의 ‘아웃사이더’ 철수가 쓰는 자기 사용 설명서다. 소설은 기승전결의 고리로 이어지는 소설 작법을 과감히 버리고 사용 설명서의 형식을 따라 이야기를 풀어낸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루저(Loser) 문학의 최고 극단” “새로운 소설 활용법의 개발”이라는 평가와 함께 2011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소설의 얼굴을 바꾼 용감무쌍한 작가는 올해 서른인 전석순씨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3년의 습작생활을 거쳐 세상에 내놓은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소설을 낸 지난해 작가는 스물아홉, (남들이 봤을 땐) 백수였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삶은 작품 속 철수의 이야기 같기도, 표준을 비껴난 ‘불량청춘’의 연대기 같기도 하다.

스물아홉의 청년백수 철수. 공부, 취업, 연애 어느 하나에도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그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 사용 설명서는 그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다. 제품 규격 및 사양, 설치 방법에 주의사항까지 꼼꼼히 적어내려간 사용 설명서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과연 그런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식빵 굽는 냉장고와 빨래하는 청소기, 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애프터서비스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용 설명서다. 자격증 시험과 영어시험 공부에 열을 올리지만, 매번 실패하는 청춘에게도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소설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됐다. 전석순씨를 광화문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소설의 주요 부분을 인용해 구성해보았다.


#1. 표준 권하는 사회
텔레비전이든 오디오든 전화기든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중요한 건 철수가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기능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주요 기능이므로 제대로 못하면 무조건 불량 판정이 내려질 터였다.
- 《철수 사용 설명서》, 49쪽

대한민국 청춘들의 ‘주요 기능’은 공부다. 그 기능은 대부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다. 공부하는 기능을 기르는 이유는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사회가 권하는 표준이기 때문이다. 일렬로 줄을 세워 앞에 선 사람만이 취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못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공부 기능을 연마하며 기회를 기다린다.

“회의가 들었어요. 외모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표준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대학 졸업 후, 전석순씨는 취직할 생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작가라는 꿈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아갈 시기라는 마음뿐이었다. 취업을 원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서른 살까지는 취직하지 않고 글을 써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경제적인 지원은 없었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소설을 써나갔다.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했고, 자료조사를 위해 지방 ‘출장’도 다녀왔다. 하지만 표준을 거부한 그에게 붙여진 딱지는 ‘백수’였다.

“동네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제 부모님 속 좀 그만 썩이고 취업해야지’였어요.”

청춘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다.

“20대가 바라보는 청춘은 어렵고 힘든 세대기 때문에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반면 기성세대는 그들이 겪은 20대보다 훨씬 좋은 환경인데 너무 나약하다고 말하죠.” 청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가져올 필요가 있었다. 사용 설명서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조망과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장치다.

“사용 설명서는 차갑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봐요. 그런데 한편으로 사용 설명서를 쓰려면 누구보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죠.”



#2. 부유하는 물음표
철수는 엄마에게 어느 날 갑자기 용도도 전해지지 않은 채 툭 던져진 물건이었다. 그 물건의 주요 기능을 친절하게 소개한 사용 설명서도 한 장 없었다.
- 《철수 사용 설명서》, 45쪽

모든 아이는 물음표로 태어난다. 물음표는 방황을 거치며 느낌표로 바뀐다. 하지만 획일화된 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기만의 느낌표를 찾기는 힘들다. 어린 시절, 작가 역시 자기만의 느낌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손가락이 길다는 이유로 피아노도 쳐봤고 중학교 때는 순정만화 작가를 꿈꾸며 만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곧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만뒀다.

글과의 첫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낸 시 창작 수행평가가 계기가 됐다. 시집에 실린 시들을 짜깁기한 과제물이 선생님의 눈에 띄었고, 백일장에 나가게 됐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수필로 방향을 바꾸고 나간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으면서부터 글 쓰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소재가 바닥나자 글에 조금씩 거짓말을 섞기 시작했고, ‘이럴 바엔 소설을 쓰는 게 낫겠다’ 싶어 고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문제집 대신 소설책을 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말은 “성적도 안 좋은 애가 뭐하고 있니?”였다.




#3. 원하는 한순간
철수는 다른 제품의 사용 설명서가 아니라 철수 사용 설명서를 읽고 사용해야 한다. 사용하려는 게 진공청소기인데 로봇청소기 사용 설명서를 보면 되겠는가?
- 《철수 사용 설명서》, 70쪽

청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열정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청춘은 무기력하다.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경쟁을 참아낼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을 한순간이다. 2001년 6월 1일 오후 7시, 그는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분량도, 이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소설을 쓰는데 기분이 정말 좋은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돈 한 푼 못 벌어도 딱 10년만 써보자고.”

문학 특기자 전형으로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고, 하고 싶은 소설 공부를 마음껏 했다. 대학시절에는 백마문학상, 오월문학상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해 수상하기도 했다. 졸업 후 일명 ‘백수’로 지내던 3년을 그는 “가장 여유롭고 행복했던 시간”이라 표현한다.

“편의점 새벽 아르바이트, 교과서 폐지 제거작업 등으로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소설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기뻤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 부모님은 “이제 쓸 만큼 썼으니 취업 준비해야지?” 하시지만, 그는 평생 글을 쓰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 그랬듯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소설을 계속 써나갈 계획이다. “아직도 저는 습작 중”이라며 웃는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찾아가는 중이다.

“글을 쓸 때 두 가지 기준을 세워요. 몰랐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잘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다른 시선을 제시할 수 있는지. 그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소설을 써나가고 싶어요.”



소설은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철수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끝난다. 철수는 또 어떤 사용 설명서를 쓰게 될까. 철수의 삶은 어떻게 될까. 청춘들만이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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