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구본창

작은 물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 무無의 도정道程인가, 무명인無名人의 발자취인가? 시간의 목소리가 여행을 이야기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시간의 목소리, 시간의 기억을 기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시간의 목소리를 따라 여행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이런 ‘기억’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사진가가 된 것 같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사진가 구본창 교수(58・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를 만났다. 비누 오브제를 소재로 한 전시회 <책과 사물 Books&Objects 구본창+야마구치 노부히로 Koo Bohnchang+Yamaguchi Nobuhiro>가 열리는 신세계갤러리에서 만난 그와의 대화는 ‘시간과 기억’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했다. 2006년 국제갤러리, 교토 카히츠칸 미술관, 2007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2010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는 ‘백자’ ‘탈’ 등 시리즈를 통해 한국적 여백의 미와 격조 높았던 그러나 점점 잃어가고 있는 한국적 미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책과 사물전> 역시 그간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드러나지 않아 하찮은 존재” 그래서 “하잘것없는 것의 아름다움”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을 담았다.

<책과 사물 : 구본창 + 야마구치 노부히로> 전시회는 8월까지 이어지는데,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야마구치 노부히로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구본창의 사진과 소품, 야마구치 노부히로의 그래픽 작업과 소품을 포함한 약 50점으로 구성된 전시로, 인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과 간결함, 절제, 그리고 단아함이 묻어난다. 야마구치 노부히로는 디자이너이자 아트디렉터로 일본의 전통적인 종이접기를 현대 생활에 접목시키고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일본에서 출간된 구본창의 작품집 《백자》를 계기로 만나 지금까지 다양한 작업을 함께 해왔다. 《백자》를 출간했던 2007년, 출판사 대표와 야마구치 노부히로는 구본창의 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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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집 구경을 시켜주다가 우연히 서랍을 열어 이제까지 모아둔 비누를 보여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러면서 이것도 책으로 진행하자고 하더군요. 출판사에서 ‘일상의 보석’이라는 제목을 붙여 책으로 내게 됐죠. 저는 물성으로서 비누가 주는 역할, 점점 사라진다는 의미를 더 부각시키고 싶었는데 책을 쓰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죠.”

그가 비누를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된 것은 매일매일 얇아지면서 사라지는 느낌,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태 때문이었다. 노란 비누, 살구색 비누에는 어떤 향기가 날까, 냄새를 맡고 만지고 하면서 향기와 감촉을 즐겼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비누는 ‘미향’ 혹은 ‘향미단’이라는 이름의 비누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까지 쓰던 장미꽃이 새겨진 비누였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우리 집 목욕탕 어느 구석에 있던 비누도 기억이 나요. 1990년대 영국에 살았는데, 오묘한 색깔의 수제 천연 비누를 일상적으로 쓰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지금은 슬로라이프가 유행하면서 천연 비누가 인기지만요.”


지난 4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그의 수집가적인 취향이 잘 드러났다. 사진 작품과 함께 그의 감성을 짐작케 하는 수집품과 그간 작업해 온 사진 속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던 것.

“어릴 때 서울 신당동의 적산가옥에서 살았는데, 흔한 물건 중에서도 나 혼자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었어요. 서랍 속이 왜 쓸데없는 물건들로 꽉 차 있느냐고 핀잔도 많이 받았죠. 집의 정원 한쪽을 파면 일본인이 묻고 간 것들이 나왔어요. 그곳에 살던 사람이 우리 유물을 모았었는지 조개비도 나왔고, 실로 꿰어 파이프처럼 연결한 팔찌도 있었죠. 백자도 나왔고요. 아직도 눈앞에 보는 것 같은데,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이런 애틋한 기억들을 기록하려다 보니 사진가가 된 것 같아요.”

그는 야마구치에 대해 “일본 사람이지만 저와 성향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책을 네 권이나 함께 낸 게 일맥상통하는 미감이 있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전 독일에 살 때 한국이 중국・일본과 어떻게 다른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1980년대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사물놀이 레코드판을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물어봤죠.”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항상 관심 대상이라고 한다.

“비누는 거품이 되어 없어지죠. 해가 나면 사라지는 눈처럼요. 비누에 대한 그런 느낌이 사진을 찍게 된 동기였어요. 백자도 깨질지 모르는 운명을 안은 채 몇 백 년 동안 살아남았어요. 백자에 스크래치나 세월의 흔적이 남는데 그게 우리의 자화상 같아요. 삶은 상처의 연속이니까요. 우리 삶에 깊은 균열은 없다 해도 소소한 스크래치들을 안고 살지 않나요?”

그에게 사진 작업은 영혼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인물 사진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담고 있는 얼굴을 찾아서 촬영하고 싶어요. 자신의 히스토리를 담고 있는 얼굴을요. 인물 사진을 촬영할 때는 대상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봐줄 때 비로소 자기다움이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끌어내는 것은 촬영할 때만이 아닙니다. 프린트할 때 어두움과 밝음을 조절하다 보면 영혼이 서서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는 앞으로 우리의 전통 ‘종이꽃’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 한다. 생명력이 다해 색깔이 바랜 그 존재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그래서 ‘찾아보려고 애써야 하는 그 무엇’을 던져줄 모양이다.

사진 : 김선아
촬영협조 : 신세계갤러리
  • 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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