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급 발레단에 입단하는 발레리노 김기민·최영규·한성우

한국 발레의 기량을 “세계 무대에 펼쳐 보이겠습니다”

발레. 그건 지독히도 중독성이 강했다. … 팔과 다리를 그런 자세로 두고 있을 때, 그건 마치 악보와도 같다. 공중에서 멈춰 서 있다가, 휙! 다른 가락으로 넘어간다. … “시작할 때는 약간 몸이 뻣뻣하지만 막상 춤추기 시작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안 느껴져요. 그래요, 마치 내가 공중으로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내 몸 안에 불길이 치솟고 난 거기서 날아가요. 마치 새처럼요.”
- 소설 《빌리 엘리어트》 중에서
사진 왼쪽부터 최영규·한성우·김기민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소설과 뮤지컬 등으로도 제작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빌리는 우연히 발레 수업에 참여한 후 발레의 매력에 푹 빠져 온갖 시련을 딛고 정상급 발레리노로 우뚝 선다. 최근 국내에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세 명이 한꺼번에.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는 김기민,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입단하는 최영규, 영국 로열발레단에 입단하는 한성우(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 4학년) 얘기다.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발레를 접한 후 발레의 매력에 푹 빠졌다. 기민씨는 형, 영규씨는 누나, 성우씨는 여동생을 따라 발레학원에 갔다가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소녀들을 보면서 발레의 아름다움에 눈떴다. 그리고 일찌감치 발레리노를 꿈꾸며 외길을 걸어왔다. 세계 정상급 발레단 입단은 십 수년간 발레밖에 모르고 걸어온 이 연습벌레들에게 뒤따라온 상이었다.

세 사람 모두 웅진예술영재로 3년 전부터 웅진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해외 콩쿠르 참가 지원을 받아왔다. 발레리노들의 장도를 앞두고 마련된 오찬장에서 웅진재단 신현웅 이사장은 “발레의 본고장인 유럽에 K발레가 진출하는 건 상당히 뜻깊은 일”이며 “한국이 K팝뿐 아니라 발레 같은 고급 예술 분야에서도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인정받은 계기”라고 말했다. 오찬장에 참석한 어머니들의 표정엔 만감이 오갔다. 최영규 어머니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웅진 측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남 장성의 새까만 아이였던 영규가 여기까지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내내 울먹거렸다.

오찬이 끝난 후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차에 나란히 앉은 세사람은 영락없는 개구쟁이 대학생이었다. 연습실에서 거의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는 이들은 서로의 장단점을 꿰뚫고 있는 거울 같은 사이다. 세 사람에게 물었다. 발레를 포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지. 셋은 이구동성으로 “한 번도 없었다”고 답했다. 하루 연습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도 이구동성으로 “거의 하루 종일이요”라고 답하고는 서로를 보며 웃는다. 해가 떠 있을 때 집에 간 적이 거의없다고 한다. 이들에게 발레 연습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남자가 무슨 발레’라는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던 시절 발레를 시작한 이들은 어떻게 지금 이 길까지 오게 됐을까. 세 발레리노의 이야기를 전한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 동양인 최초로 입단하는 김기민. 기민씨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마린스키 발레단원이 됐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원래 공개 오디션을 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명망 있는 클래식 발레학교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 학생 중에서 단원을 뽑는다. 그런데 2010년 마린스키 발레단이 내한했을 때, 기민씨의 발레 지도교수는 기민씨가 <라 바야데르>를 공연하는 영상을 마린스키 디렉터에게 보여주었고, 기민씨의 발레에 감명받은 디렉터는 기민씨에게 “내년에 꼭 오디션을 보러 와달라”고 당부했다. 올 4월 단독 오디션을 본 기민씨는 얼마 후 입단 통보를 받았다.

기민씨는 긴 목과 작은 얼굴,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그는 형(발레리노 김기완)과 함께 태권도를 배웠고, 여섯 살 때 검은 띠를 땄을 정도로 습득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학교 발표회 때 음악에 맞춰 태권도를 하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형제의 동작에서 발레를 엿보았다. 춤을 시키면 잘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든 어머니는 형제를 발레학원에 등록시켰다. 기민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입단할 예정인 최영규. 영규씨는 올해 이 발레단에 입단하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내성적이고 몸이 약했던 그는 누나를 따라 전남 장성군의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처음 접했다. 말수 적은 아이는 몸의 언어를 배워갔고, 그 안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다. 성격도 변했다. 발레를 하며 자신감과 건강을 얻은 그는 활발하고 쾌활한 아이로 성장해갔다. 2009년 미국 청소년 국제무용 콩쿠르 2관왕, 올해 5월 개최된 보스턴 국제발레 콩쿠르에서는 금상을 차지하는 등 그야말로 훨훨 날았다. 그는 늘 “도움을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영국 로열발레단에 연습단원으로 입단하는 한성우. 그에게 있어 영국 로열발레단은 간절한 꿈이었다. 꼬마 시절부터 그는 “로열발레단에 갈 거예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그는 어떻게 꿈을 이루었을까. 로마 국제무용 콩쿠르 주니어 금상(2010), 미국 청소년 국제무용 콩쿠르 2관왕(2011)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올 2월에 무용 분야 최고 권위 콩쿠르인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 콩쿠르에 출전, 2위를 차지했다. 이 콩쿠르에 입상하면 원하는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로열발레단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에게 마침 로열발레단 소속의 심사위원으로부터 “우리 발레단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들은 시쳇말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거의 하루 종일 발레 연습을 하면서 부상도 많이 당했다. 허리 통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발가락 골절 때문에 한 달 이상 쉰 적도 있다. 기민씨는 무릎 이상으로 6개월간 쉰 적이 있고, 영규씨는 근육통 때문에 약을 상시 복용한다. 이들은 부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부상 때문에 발레 연습을 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한국 발레는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수준이 됐지만, 이들은 아쉬운 점이 많다. 비인기 분야로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고, 수상 성적이나 입단하는 발레단의 비중에 비해 조명을 덜 받는 것도 서운하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화제 코너 ‘발레리노’ 얘기를 꺼내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발레라는 순수예술 분야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그 프로를 통해 발레리노를 먼저 접하다 보니, 발레리노라는 존재가 희화화될 수 있다”(기민)는 것. 영규씨는 “발레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동을 주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발레리노 복장을 한 이들에게 자신들의 몸이 아름답다고 느끼느냐고 물었다. 이들을 또 한 번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답했다. 기민씨는 “잘 먹고 몸을 만드는 것, 몸의 선을 드러내기 위해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는 것은 모두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새처럼 가뿐히 날아오르는 이들은, 과연 아름다웠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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