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페스티벌> 연 소설가 김중혁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송은지   책방 ‘유어 마인드’ 이로

함께 책 읽으실래요?

기묘한 경험이었다. 2월 13일 일요일 오후 4시에 열린 낭독회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섰다.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의 100개 좌석은 금방 빼곡하게 찼다. 특별한 형식은 없었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 무대에 올라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5시 30분에 끝나기로 되어 있던 낭독회는 출연자가 한 사람 한 사람 시간을 지연하는 바람에 예상 시간을 훌쩍 넘겨 6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관객 중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100명의 관객이 한 구절 한 구절 함께 집중하고, 반응을 보였다.

“낭랑한 종소리에 제비들이 높이 날아오르면서, 바닷가에 눈부시게 우뚝 선 도시 오멜라스의 여름 축제는 시작되었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모두 돛에 매인 밧줄마다 깃발들이 나부꼈다. 빨간 지붕에 울긋불긋하게 담장을 단장한 집들과 이끼가 곱게 깔린 정원들 사이로 난 거리를 따라,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그늘을 거쳐, 넓은 공원과 관청을 지나 축제 행렬이 나아갔다.”

처음 등장한 박사 씨가 읽은 책은 SF작가 어슐리 K 르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즐거운 웃음, 종소리, 행렬, 경주마들, 북새통 파티로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낙원과 같은 도시 오멜라스. 그 속에는 모두가 외면하는 진실이 감춰져 있었다. 창문도 없이 굳게 잠긴 문 안에 갇혀 있는 아이. 그러나 냄새나는 방 안에 감금되어 있는 정신박약아인 그 아이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도시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전적으로 그 아이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낭독자는 아이의 비참한 처지를 묘사한 구절에서 울음을 꿀꺽 삼킨다. ‘삶을 즐기기 위해,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사회의 다른 한켠에 있는 사람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자 하는 게 SF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자각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낭독을 마친 박사 씨는 “이 소설이 전하는 공포와 전율, 깊은 슬픔을 같이 느꼈으면 했다”고 마무리한다.

‘유어 마인드’에서 열린 낭독회.
다음에 등장한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 씨는 자신이 쓴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옥슨 80의 공연에서 ‘불놀이야’를 따라 부르며 수험생 스트레스를 잊을 정도로 대중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 대학에 들어간 후 그는 학생운동의 물결로 대중음악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에서 방황했다.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대 출신 그룹사운드 ‘갤럭시’의 공연을 저지하던 학생들…. 그 속에서 가치관의 갈등을 겪었던 해묵은 기억을 그는 낭독으로 되살려냈다.

‘장기하와 얼굴들’ 등을 키워낸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고건혁)은 공포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읽어 내려갔고, 가수 호란 씨는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을 소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버스를 타고 자살여행을 떠난 사람들.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을까.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호란 씨는 “진정한 의미의 자살은 스스로 먹는 것을 끊는 아사(餓死)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을 매든 투신을 하든 마지막 순간에는 살고자 몸부림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살고자 하는 동물적 욕구를 넘어설 것은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한다. 이어 뮤지션 이승열 씨는 “가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좋은 글을 보면 훔치고 싶을 때가 많다”면서 소설가 김연수의 책 《청춘의 문장들》 중 몇 구절을 읽었다.

지난 1월 28일부터 2월 13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열린 <제1회 산울림 낭독페스티벌-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은 낭독을 재발견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읽어주고 여러 사람이 몰입해서 듣는, 구전(口傳)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게 개인적인 독서와는 느낌이 달랐다. 혼자서 책을 읽다가도 잡념이 끼어들면 문맥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한 문장 한 문장 귀로 들어야 하니,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100명이나 되는 관중이 한 사람이 읽어주는 이야기에 온통 귀를 기울였다. 낭독자가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면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변화까지 관중에게 전달됐고, 소통이 되는 자리였다.


각계각층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 <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

산울림소극장에서 열린 〈낭독 페스티벌〉.
<낭독 페스티벌>은 지난해 5월 서교동에 문을 연 작은 책방 ‘유어 마인드’에서 시작한 낭독회인 <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을 모태로 시작됐다. ‘유어 마인드’는 일반 서점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소규모 출판물을 만들던 이로(서승협)와 모모미 씨가 만든 독특한 개념의 책방. 이 출판물들을 유통할 판매 루트를 만들기 위해 2009년 8월 온라인 서점을 시작했던 이들은 2010년 5월, 서울 서교동에 오프라인 책방을 열었다. 건물 5층에 자리 잡은 ‘유어 마인드’에 들어서니 책방이라기보다 디자인 사무실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중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개념의 디자인 잡지와 사진집,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희귀한 책과 ‘유어 마인드’에서 소규모로 제작한 책, 잡지들이 함께 있었다.

‘유어 마인드’가 2011년 들어 처음 발간한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11명이 그린 요리그림책 《Cooking Drawing Book》.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부터 고난도 요리, 상상의 요리까지 자신만의 요리를 그림으로 소개해놓았다. 이로 씨가 4호까지 낸 잡지 〈수상한 M〉은 이로 씨가 에세이·소설·콩트·인터뷰까지 혼자 글을 쓰고 디자인해서 만드는 1인 잡지다. 한 번에 100부씩 인쇄하는데, 다음 호를 기다리는 마니아층이 생기고 있다 한다. ‘유어 마인드’는 누구든 1인 잡지를 만들 수 있도록 잡지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공방을 열기도 한다.

“일반 서점에서 판매할 생각으로 책을 만들다 보면, 독자층을 생각해야 하고 일정한 틀에 갇힐 수 밖에 없잖아요. 시장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작가 자신이 내용과 디자인을 모두 책임지면서 책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이렇게 만든 동화책 《여우 모자》는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해외에 판권이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은 ‘유어 마인드’가 고객을 위해 마련한 무료 행사. 인디밴드, 디자이너, 평론가, 기업체 사장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이 원하는 책을 들고 나와 읽는다. 4~6명이 15분씩 읽어,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낭독회인데 복도까지 꽉 찬 사람들이 숨죽인 채 듣는다고 한다. 만화책에서 딱딱한 철학책까지 장르를 막론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낭독 페스티벌>은 그동안 낭독회를 해온 이로 씨와 인디밴드인 ‘소규모아카시아밴드’ 송은지 씨, 소설가 김중혁 씨가 힘을 합해 준비했다.

출발점은 송은지 씨. 산울림소극장으로부터 “극장에 올릴 공연을 알아봐달라”는 청을 들은 송은지 씨는 텔레비전 문화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김중혁 씨를 찾아가 “어떤 게 좋을까요?”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낭독회를 떠올렸다. 송은지 씨는 ‘유어 마인드’의 낭독회에 참여했던 터. 이로 씨까지 세 사람이 모여 ‘유어 마인드’의 낭독회를 더욱 발전시킨 형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출연자 섭외와 행사 준비도 역할을 나눠 착착 진행했다. 무료 공연인 <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과 달리 <낭독 페스티벌>은 회당 1만5000원, 유료 공연이었다. 그만큼 부담도 컸다.

개성 있는 책들이 모여 있는 작은 책방 ‘유어 마인드’.
<낭독 페스티벌>은 각 회마다 다양한 시도로 ‘책읽기의 새로움’을 느끼게 했다. 첫 막을 연 것은 성기완의 시와 김사과의 소설을 읽는 낭송 퍼포먼스. 두 번째 시간은 박완서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 씨》에 실린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를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듯 낭독했다. 극단 작은 신화는 존 콜벤바흐의 희곡 〈러브 송〉을 읽으며 목소리만으로 무대를 꾸몄고, 미술가 차지량과 커뮤니티 세대독립클럽은 영상과 퍼포먼스, 텍스트와 목소리가 만나는 독특한 무대를 선보였다. 시인 이제니와 뮤지션 이아립은 시와 노래를 주고받았다. <낭독 페스티벌>을 준비한 김중혁, 송은지, 이로 씨는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실용적인 글을 읽었다.

“비달 사순의 미용에 관한 글, 조슈아 피븐이 쓴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 중 〈날아오는 펀치 피하는 법〉, 잡지 글 등 실용적인 글들을 편집해서 읽었어요. 정보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던 글들이 읽다 보니 새로운 의미가 생기면서 상징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낭독도 영화나 연극처럼 돈을 내고 오는 공연으로 만들겠다’는 이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뒀다. 11개 공연 중 4개 공연이 매진된 것. 전 회 공연 티켓을 구매한 사람도 20명에 이른다. 세 사람은 매년 <낭독 페스티벌>을 열겠다면서 “내년에는 더욱 새롭고 알차게 준비하겠다”고 말한다. ‘유어 마인드’의 낭독회 <우리 모두의 책 읽는 시간>은 두세달에 한 번씩 수시로 이어진다.

사진 : 원동현
  • 2011년 0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12

201912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2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