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탐험가 채바다 씨

우리 조상이 일본의 고대 문명 만들었다는 것 증명하려 목숨 걸고 항해합니다

1996년 5월, 초로의 한 사내는 해병대원 다섯 명을 이끌고 떼배에 올랐다. 통나무 몇 개를 엮어서 만든 너비 3.5m, 길이 6.5m의 원시형 떼배. 사내는 모터 하나 달지 않은 이 허술한 배 한 척에 몸을 맡기고 제주에서 일본까지 목숨 건 항해를 떠났다. 바람이 미는 대로, 해류가 이끄는 대로 그저 배를 맡길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탐험. 성산포 앞바다에서 출발한 떼배는 6일 밤낮을 떠내려가 일본 고토열도에 닿았다. 1997년 10월에도, 2001년 2월에도 사내는 같은 방법으로 탐험에 나서 모두 성공했다.
해양탐험가 채바다 씨. 사람들은 그를 바다에 미친 사나이라고 부른다. 부모가 지어준 채지웅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로 개명까지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안고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하는 것일까? 그의 떼배를 보러, 그의 속내를 들으러 제주도로 향했다. 서귀포시 성산읍 바닷가, 제주올레길 1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그의 집이 있다. 연수원을 개조해 만든 그의 집과 그가 2005년에 만든 바다박물관은 태풍 말로가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하다. 지하 자료실까지 바닷물이 들이차 책들은 물에 퉁퉁 불었고, 노기가 남아 있는 바람은 이파리 울창한 나무에서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끌어냈다. 하늘도 온통 잿빛이다. 바다박물관에서 이어진 갯벌에는 그의 떼배가 다음 항해를 기다리며 정박 중이다.

바다박물관 내부
채바다 씨가 반갑게 맞는다.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전사의 눈빛을 연상케 했다. 망망대해에서 오랜 시간 사투를 벌이며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자의 그것이었다.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그에게서는 시인다운 관조와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공돌이 출신이 무슨 시를 알겠어요. 탐험이라는 험난한 환경에 처해 있다 보니 부드러워지려고 시를 쓰기 시작한 거죠. 시는 나의 거친 삶을 잠재울 수 있는 보완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파도가 바람인들 어쩌겠느냐》 《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 어머니 눈물은 아니시겠지요》 《일본은 우리다》 등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일본은 우리다》는 시집의 형태를 띤 논문에 가깝다. 그는 항해하는 절박한 이유를 이 시집에 녹여냈다. 역사에 대한 자료와 함께. 그의 시 한 편을 보자.

백제가 일본으로 어찌 갔는지/ 가야가 열도로 어찌 갔는지, 신라가 어찌 갔는지/ 거기에 그들 분국들이 어찌 생겨났는지/ 나는 알겠소/ 그들이 노저어 간 뱃길/ 그 후예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나는 알겠소/ 그들이 숨쉬고 있는/ 그 언덕 그 강가 나는 알겠소/ 천수백 년 넘는 비바람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그들의 숨결이 와닿는 것을/ 내가 어찌하겠소/ 내가 어찌하겠소
-〈내가 어찌하겠소〉 전문


바다박물관 입구.
그가 목숨을 건 뱃길 탐험을 나서는 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고대 문명을 만들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기술력이 없던 그 옛날 조상들이 만들었을 배, 그 배를 타고 갔을 바닷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보시오! 바로 이 루트를 통해서였소”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 번째 탐험이던 2001년 항해 때 그는 백제 왕인 박사가 《천자문》 《논어》 등 열 권의 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길을 따라 떠났다. 전남 영암군 대불항에서 출발해 진도 울돌목, 완도, 거문도를 거쳐 일본 사가 현에 이르는 경로. 그의 이 항해는 〈요미우리〉 〈아사히〉 등 일본 주요 일간지와 TV 뉴스를 통해 보도됐다.

“당시에는 목적 항해가 아니라 닿는 데가 목적지였습니다. 해류와 계절풍의 방향 때문에 제주도에서 배를 띄우면 일본에 닿게 돼 있어요. 우리 조상들이 바로 이런 루트를 통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겁니다. 일본으로 가장 많이 건너간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백제가 멸망한 7세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꾸준히 건너가서 일본의 고대 문명을 만들었어요.”,

그는 목숨 건 항해를 열 번쯤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고, 결국 그 주장을 믿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 믿는다. “1000년 전에 왕인 박사가 《천자문》 등을 가지고 가서 일본 고대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불과 100년 전에 벌어진 독도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국가가 흥하려면 도전하는 젊은이가 많아야

2003년 그는 떼배를 타고 남북평화축전 성공을 기원하는 제주일주 항해를, 2007년 6월에는 제주시 화북항을 출발, 여서도와 청산도, 완도를 거쳐 마량항에 이르는 150km의 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런 탐험정신으로 그는 2008년 국토해양부 장관상인 ‘장보고상’을 수상했다. 그가 2005년에 개관한 바다박물관은 바다에 대한 그의 열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의 뱃길 탐험 사진, 모형배 등에서부터 뜰채, 해녀의 도구 등 그가 하나하나 모아다 전시한 것들은 어느 하나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게 없다. 한・일 뱃길탐험 때 탔던 떼배는 현재 천지연 입구, 제주해녀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다.

그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도 뱃일을 했다. 범선을 타고 만주로, 일본으로, 부산으로 다녔다. 어릴 적부터 총기가 있었던 그는 늘 우등생이었고, 한양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화학 기자재 실험기구 판매 회사를 차려 돈도 꽤 벌었다. 하지만 이 길이 아니다 싶었다. 마음은 고향 바다로 향했다. 일본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빨려들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힘이 나를 바다로 이끌었다”고 했다. 40대 중반, 그는 안정된 직장도 버리고, 아내와 자식 둘도 뒤로 하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때 이름도 ‘바다’로 개명했다.

늦둥이 막내인 그는 어머니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에게 어머니는 종교다. 어릴 적 자다가 눈을 뜨면 냉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탐험에 보이지 않는 힘을 주었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94세까지 사셨다. 하지만 그의 첫 항해 직전 눈을 감았다. 그는 앞으로 최소한 한 번은 더 목숨 건 항해를 떠날 예정이다. 그는 스스로 “점점 더 미쳐간다”고 한다.

“일본 문화에 빠질수록 점점 더 미쳐갔어요. 보일 것이다, 보일 것이다 하다가 진짜 보이면 사람 미쳐요. 우리 민족의 50%만 이 사실을 안다면 내 목숨 하나 던지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본 문화의 뿌리와 우리 문화와의 연관성을 증명한다면 백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연수원을 개조해 만든 자택(왼쪽)과 바다박물관(오른쪽).
그의 나이 65세. 환갑이 넘었지만 그의 도전정신과 이글거리는 눈빛은 20대 청년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종종 특강을 다닌다. 강연 주제는 ‘국가경쟁력, 하멜과 네덜란드를 만나면 세계가 보인다’. 그가 강연에서 강조하는 것은 도전정신이다.

“하멜이 탐험을 떠난 게 23세였어요. 동승자 중에는 10대 소년도 있었어요. 얼마 전 열네 살짜리 네덜란드 소녀가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기사가 났죠. 유소년 축구가 시작된 것도 네덜란드입니다. 자원이 없고 척박한 환경에서 도전정신이야말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가장 큰 경쟁력입니다. 도전하는 젊은이가 많을수록 국가는 융성합니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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