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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낭만과 기원이 담긴 고판화를 만나다

[작은 박물관・미술관을 찾아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고판화박물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치악산 줄기를 바라보며 달리다 꺾어져 좁은 산길을 올라가니 널찍한 터가 나타난다. 치악산 매봉을 뒤로하고 감악산을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한 아늑한 터. 바로 옆에 계곡을 끼고 있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사방을 둘러싼 산의 녹음에 눈이 시원해지고, 물소리에 귀가 청량해진다. 해발 600m인 이 터에 들어서면 이리저리 번뇌에 시달리던 마음도 편안해질 듯하다. 천혜의 절터로 보이는 이곳은 원래 밭이었다 한다. 1998년 한 스님이 이곳에 천막을 치고 설법을 하다 비닐하우스, 컨테이너하우스를 거쳐 사찰을 지었다. 그런데 그 사찰의 모양이 독특하다. 소나무와 황토, 너와지붕을 사용한 팔각 건물인데, 절이라기보다는 전원주택이나 펜션쯤으로 보인다. 너른 마당에 있는 석탑이나 불상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사찰임을 짐작하기 어렵다.

스님은 2004년, 절 옆에 박물관을 지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고판화박물관. 그 곁에 전통판화학교도 들어섰다. 너와집 형태의 명주사, 단순한 디자인의 시멘트 건물로 옅은 흙색으로 칠한 박물관, 서구식 목조주택인 전통판화학교 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물들이 ‘따로, 또 같이’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다. 박물관 곁을 스르륵 지나가는 뱀이 이곳이 인적이 드문 산속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곳에 사는 누렁이는 낯선 방문객을 꼬리를 흔들어 반기며 따라오더니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더니 만족해하는 기색이다.

산속에 들어앉은 이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은 연간 1만여 명. 이곳은 그저 보기만 하는 박물관이 아니다. 관람객은 판화 원판에 먹을 바르고 한지를 덮어 찍어내면서 판화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고, 널찍한 통창으로 싱그러운 녹음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판화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목판화 제작과 전통 책 만들기, 명상체험, 다도체험, 아침산행 등으로 짜인 1박2일, 2박3일 체험코스도 있다. 박물관을 찾은 날도 그는 단체로 찾은 관람객에게 나무판을 조각하고, 먹물을 묻혀 찍어내기까지 판화체험 과정을 직접 지도하고 있었다.


고판화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판화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일본·티벳·몽골·인도·네팔 등지의 고판화 원판과 목판인쇄 서적, 판화 등 25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명주사의 주지이자 고판화박물관 관장인 한선학(韓禪學) 스님은 “가장 아끼는 소장품”이라며 조선 철종 10년(1859년)에 제작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목판을 보여준다. 오륜행실도 활자본은 흔하지만 목판은 공개된 적이 없었는데, 1년 동안 공들여 손에 넣었다 한다. 목판은 일본식 소형 화로의 바깥을 감싸는 장식용구로 변형된 채 남아 있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장식품으로 전락했던 수난사가 담긴 유물이다. 훼손이 심해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스님은 “다른 어떤 소장품보다 마음이 간다”고 말한다. 고판화박물관 소장품에는 유형문화재 4점과 문화재 자료 3점이 있는데, 모두 스님이 발굴해 문화재 신청을 했다 한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그가 이만큼 소장품을 갖춘 것에 대해 그는 “유물도 생명체라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수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열정과 안목이라고.

박물관에는 고려시대 때 제작된 화엄경 변상도 목판, 부적판, 갖가지 문양을 찍어내던 능화판, 편지지에 난초, 파초, 수선화 등을 찍던 시전지판,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있는 호작도(虎雀圖) 목판, 목판 삽화가 들어간 서적 등 한국 고판화 유물과 중국·일본·티벳·몽골의 고판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어 아시아 각국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비교해보며 감상할 수 있다. 한지에 꽃문양을 찍은 후 편지를 써내려가던 조선시대 선비의 여유와 낭만, 새해를 맞으면 호작도를 붙이며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좋은 일만 이어지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기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머리 긴 스님이 열정적으로 수집한 아시아의 고판화들

스님은 어떻게 고판화의 세계에 빠져 열정적인 수집가가 되었을까. 1996년의 일이었다. 군승(軍僧)이었던 그는 신도들과 함께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의 주화산(九華山)을 찾았다. 8세기 신라 왕자였던 김교각(金喬覺) 스님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는 곳으로,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로 꼽히는 곳. 늦은 시간에 도착해 절에 들어갈 수 없었던 스님은 문 앞에서 108배를 올렸다. 그때 기도했던 게 포교에 장애가 되는 곡차(술)를 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신기하데요. 그 후 정말 곡차가 전혀 당기지 않는 거예요. 대신 고판화에 빠져들었지요.”

귀로에 항저우(杭州) 골동품 시장에서 고판화 목판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인 그는 한동안 중국 목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판화보다 민화가 발달해 고판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의 고판화는 비교적 흔해 수집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중국 판화를 어느 정도 수집하고 나니 한국 고판화도 욕심이 나서 빚을 내서라도 수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수집한 유물들로 명주사 옆에 박물관을 열어 사람들을 맞았다.

“수집가들이 박물관을 여는 것은 자신이 모은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요. 좋아서, 미쳐서 모은 것들인데, 그걸 본 사람들이 감탄하고 감격하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어떻게 모은 것인데’라는 마음에서지요. 저 역시 그랬어요. 무성의하게 돌아보고 나가는 관람객을 보면 속상하고 화가났어요. 관람객으로서는 아는 게 없으니 흥미도 일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우리 박물관은 해설에 공을 들입니다.”


그는 해설로 유물과 관람객 사이 소통을 돕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보시’라고 말한다. 하루에 7~8시간씩 해설하는 게 쉽지 않지만, “한 사람이 감동하면 평균 28명에게 그게 전해진다”는 신념에서다. 유물을 싣고 가서 보여주고 해설하는 ‘이동박물관’도 시작했다. 박물관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하고 공부하다 최근엔 한양대에서 박물관교육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명주사가 보통의 사찰 이미지와는 다른 ‘파격’이듯이 그의 모습이나 말투 역시 보통의 스님과는 다르다. 머리를 기른 채 개량한복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나, 종교적 가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솔직하고 소탈한 말투나 기존 스님의 이미지를 깬다. 스님이 된 것도 ‘우연’이었다고 말한다.


동국대 불교대학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던 그는 군종장교요원으로 선발돼 스님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15년간 군승(軍僧)으로 승승장구했다. 결혼해서 아들딸을 두었고(조계종에서도 군승은 결혼이 허용된다), 뒤처지지 않고 진급해 중령이 되었다. 그대로 있으면 무난히 대령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국방부, 기무사, 육군본부 등에서 법사(法師)로 활동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는 이 땅을 만난 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원래는 농가 주택을 마련하려고 땅을 보러 왔는데, 제가 중이라는 것을 알고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있다’며 이곳으로 안내했습니다. 좁은 산길을 올라가자 탁 트인 곳이 나타나는데, 보는 순간 너무 좋았어요. ‘내 열반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땅을 사두고 1주일에 두세 번씩 달려오곤 했으니까요.”

1998년 군을 나온 그는 이곳 노천에서부터 설법을 시작했다. 소속 종파도 조계종에서 결혼을 허용하는 태고종으로 바꾸었다. ‘포교를 하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그는 “요즘 같은 레저 시대에 명주사를 자연과 문화를 함께 체험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면서 박물관을 세웠다.

“처음에는 신도들 사이에 왜 절에 박물관을 두느냐,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만의 특화된 포교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우리 절이 그 덕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니까요.”


부처님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스님이 여자에 미쳐서 결혼을 하고, 고판화에 미쳐서 수집을 하고, 또 땅에 미쳐서 절과 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제 피가 좀 뜨겁습니다. 행동도 빨라서 뛰면서 생각하는 스타일이지요.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도 미치지 않으면 못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또 집착이 처음부터 없다면 버림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지요. 수집가가 박물관을 여는 것은 자기만의 집착과 희열을 나눔과 보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때그때는 ‘우연’인 것 같았지만,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한 줄로 꿰어져 오늘에 이른 것 같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어릴 적 ‘크면 산에 들어가 중이 될 거야’라고 했다 합니다. 경북 청송이 고향인데, 초등학교 시절 경복고에 다니던 형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 하숙을 했던 곳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선생님 댁이었습니다. 달 항아리에 설탕이 담겨 있고 뒤뜰에 불상이 즐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모든 인연이 이어져 그는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전하는 스님이 되었다. 명주사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본존불은 독특하다. 통나무를 통째로 깎아 조각했는데, 금칠을 하지 않아 원목 느낌이 살아 있어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그가 대학시절 전공을 살려 직접 조각했다는데,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가 그 자신을 닮았다. 스님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면서 “박물관이 자리잡으면 훌훌 털고 조용한 곳에 가서 수행하고 싶다”고 말한다.

“인생을 4기로 나누면 1기는 부모밑에서 성장하는 시기, 2기는 결혼해서 자식을 두고 부양하는 시기, 3기는 자식이 장성하고 난 후 부부가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시기, 4기는 수행을 통해 깨우친 것을 피다 길에서 죽는 것이라 합니다. 4기까지 다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제 홀가분하게 수행에 들어갈 시기가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스님 같지 않은 스님으로부터 ‘삶이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이라는 가르침을 얻은 것 같다.

사진 : 장진영
  • 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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