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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44) | 어머니 나팔꽃

글 :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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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원재길
패랭이꽃그림책버스에서 ‘밤새워 그림책 읽고 놀자’ 행사를 마치고, 대구에서 온 도우미 선생님(유아교육과 출신 조카와 친구 셋)들을 태워 숲 골짜기로 들어오니 앞뜰에 아침이 한 상 잘 차려져 있는 겁니다. 배고프더라도 좀 참고 들어오라는 남편의 메시지를 받긴 했지만, 새벽부터 가마솥에 엄나무를 넣고 설설 고았다는 특미 닭백숙을 먹게 될 줄은 몰랐지요. 우렁각시는 있는데 어째서 우렁신랑은 없는 거냐고,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 우렁신랑이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그 소원이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잔뜩 지친 터에 혓바늘마저 돋아서 아침밥 생각은 없고 잠이나 좀 푹 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백숙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정신이 번쩍 납니다. 그러고서야 여름 뜰이, 무슨 영화 장면처럼 두 눈 그득히 펼쳐집니다.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라고 했던 김수영의 그 ‘여름 뜰’이로구나, 생각하며 새삼 둘레둘레 무성한 초록을, 나름대로 짙고 옅기가 저마다 야릇이 다른 초록을 더듬고 있는데 남편이 거실 창을 가리킵니다.

“나팔꽃, 보여요?”

백숙 그릇 물린 지 얼마 안 되어 병구 씨네 강원도 명품 옥수수를 맛나게 먹고 있던 대구 팀의 시선이 바위 계단 위 거실 창으로 쏠립니다. 지난해 어머니가 심고 매었던 그 자리 그대로, 남편이 창틀 위까지 맨 줄을 타고 보랏빛 나팔꽃이 피어 있습니다.

“어, 진짜 나팔꽃이네예!”

“아침이라서 활짝 피었네예!”

“어릴 때 보고, 처음 보는 거 같아예!”

“어릴 때 본 것도, 혹시 책에서 본 거 아이가?”

싱그럽고도 재미난 대구 억양 감탄사가 여름 뜰을 누비는데, 나는 그들과는 또 다른 빛깔의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뜁니다. 이번 주말에 오실 어머니를 떠올리면서요.

“세상에, 대체 쟤들이 어머니 오실 줄 어찌 알고 저렇게 핀 거야?”

그 얘기 듣고 보니 놀랍다는 듯, 남편도 새삼스런 눈길로 나팔꽃을 올려다 봅니다.

“어머니께 전화해야지!”

아가씨 선생님들이 개울에서 물놀이하느라 자기네 유치원 아이들이나 다름없이 까르륵대는 웃음소리 낭자한 여름 뜰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설거지감을 나르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어머니께 나팔꽃 소식 전할 궁리를 합니다. 그러나 어수선하지 않은 때에, 고즈넉한 마음으로 조곤조곤 얘기할 때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들이 물놀이를 마치고 샤워하고 정자에 올라가 도란도란 얘기 나누다 한숨씩 자고 일어나길 기다려 점심을 먹인 다음, 시내 터미널까지 배웅하고 돌아와서야 전화기를 듭니다.

어느새 나팔꽃이 오므라든 어둑한 저녁, 초저녁잠 주무실 채비를 하고 계실지도 모를 시각에, 어머니 오실 날에 맞춰 나팔꽃이 피었다고, 아범이 어머니가 하신 그대로 줄을 매어 나팔꽃이 예쁘게 올라가고 있다고, 그런데 어머니가 오실 날을 나팔꽃한테 미리 일러주었냐고, 나팔꽃 전설이 있는데 들은 적 있으시냐고….

이제 어머니는 이 보따리 저 보따리 꾸리며 숲 골짜기 오실 준비에 바쁘시겠지요. 만날 받기만 하는 나도 모처럼 어머니 오실 날에 맞춰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들려드릴 나팔꽃 유래담이며 전설을 짬짬이 모으는 겁니다. 가장 화소(話素)가 뛰어난 것은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나팔꽃 전설, ‘허무한 사랑’이라는 꽃말의 유래담다운 비장미가 적잖이 어머니를 사로잡을 듯합니다. 문제는 맛깔스런 구연인데, 이건 내 전공인 ‘그림책 읽기’와는 완전히 다른 능력이라 좀 자신이 없습니다. 통째로 삼키듯이 이야기를 자기 몸에 담았다가 완전히 자기 목소리로 다시 풀어내야 하거든요. ‘밤새워 그림책 읽고 놀’았던 전날 밤에 이어 긴긴 하루를 보내고 난 이 여름밤, 백숙 보양한 기력으로 나팔꽃 전설을 베껴 씁니다. ‘옛날옛날 중국에, 그림 솜씨 뛰어난 화공이 살았는데….’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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