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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이런 하루가 없었는가?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38) 강기원, 〈어떤 하루〉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홀로
하루를 보낸다
설렘 없이
울렁증 없이
슬픔 없이
그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 뿐이다
그런 마음이다
견디는 바 없이 보내는
이런 드문 하루는
가볍고 가볍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가을이
눈동자만큼 깊다
아침이었는데
벌써
저녁이다

하루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여름 불볕더위가 끝나면 돌연 가을이 당도한다. 홀연히 어느 아침에 도착한 가을은 ‘나’의 살아있음을 기적(奇蹟)으로 되돌려준다. 도처에 웅크리고 있던 습기는 증발하고, 수목의 녹색도 다소 옅어져 순해 보인다. 하늘은 투명하고 그 아래 알 수 없는 장소들을 향해 뻗어 있는 길들은 밝고 환하다. 세상의 불운과 비관들은 줄고 투명함과 낙관들 속에서 기쁨과 평화의 부피들이 공기 안에서 그 비중을 조금씩 늘려간다. 가을은 내 안의 주파수를 진동시킨다. 수많은 진동 속에서 나는 가을의 주파수를 포착하고 가을의 기척을 느낀다. 한 시인은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박성룡, 〈과목〉)라고 쓴다. 홀연히 닥치는 모든 사물과 존재의 물적 전환이야말로 기적이다. 이 가을은 많은 기적을 품은 우주적 가을이 아닌가!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홀로
하루를 보낸다

가을의 어느 하루가 우주적인 것은 ‘나’는 그 “무엇”도, 그 “무엇”에도 포획되지 않은 채 온전히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은 자유로 제 몸을 바꿔 ‘나’의 현존으로 속속들이 스며든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운 존재다.

설렘 없이
울렁증 없이
슬픔 없이
그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 뿐이다

당신에겐 이런 가을의 하루가 없었는가? 아무 사건이 없는 하루. 건조하고 무미하게 보낸 하루. 어떤 윤리적 회의도 없이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타자에게서 오는 공포나 절망도 없이 “그저 담배 한개비”에 기대어 충족감을 느낀 하루는 그 안에 내재된 진부함들 때문에 역설적으로 다른 날들과 구별되고 성화(聖化)한다. 이제 “가을[은] / 눈동자만큼 깊다”. 눈동자만큼 깊다는 것은 얕다는 것인가, 아니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가을의 깊이를 눈동자와 연결시킨 이 구절은 묘한 울림을 준다. 문득 혼자로 돌아간 이 시의 화자를 둘러싼 조용한 고립과 유폐는 “아침이었는데 / 벌써 / 저녁이다”라는 시구에서 돌올하게 새겨진다. 우리는 여름을 견디고 살아 있고, 가을 저녁에는 “하루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사소한 의문들을 품는다. 가을이 와도 당신의 손톱은 자라고 머리칼도 자란다. 가을의 초입에서 나는 자란 손톱을 자르고 머리칼을 자른다. 어젯밤엔 눈썹 몇 올이 빠지고 도자기를 떨어뜨려 깨는 꿈을 꾸었으니, 내일은 삼청동에 가서 점찍어두었던 골동품을 사고, 저녁에는 혼자 여름내 그을린 수족과 건강을 자축하며 일본술 몇 잔을 마실 것이다. 인간 류(類)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런 것. 〈어떤 하루〉는 가을이 품고 있는 허허로움과 낙관성을 통해 ‘나’는 곧 나에게로 이르는 길과 다른 것임이 아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그것이 무상의 선물임을 각인시킨다.

〈어떤 하루〉를 제대로 읽으려면 식육과 흡혈의 상상력으로 가득 찬 《바다로 가득 찬 책》을 읽어야 한다. 시인은 사람살이의 본질이 먹고 먹힘에 있음을 밝혀낸다. 나를 썰고 익혀서 먹이는 일은 ‘너’의 허기에 ‘나’를 바쳐 충족시키는 이타적 윤리의 탄생이 아니다. 차라리 그건 ‘나’를 의문시하는 타자에게 나-타자의 동일성을 입증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하는 우발적 사건이다. 《바다로 가득 찬 책》 도처에서 “노릇하고 바삭하게 구워진 나”를 “그대만을 위해 내어 드”리는(〈베이글 만들기〉) 자기 희생의 흔적들, “더 이상 우려낼 무엇도 없어질 때까지 / 푹푹 고아 / (중략) / 설마 / 나인 줄은 모르게 / 감쪽같이 뽀얘져서 / 고추 후추 듬뿍 뿌려 / 나인 듯 아닌 듯 / 자 드세요”(〈곰국〉)라는 청유들, “내 끊어진 애와 / 벙어리 가슴과 / 텅 빈 아기집도 들어내 / 한 말 굵은 소금에 절여 볼까 / (중략) / 그게 나인 줄도 모르고 / 삼켜”지기를(〈절여진 슬픔〉) 바라는 애절한 갈구들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랑이란 내 몸을 사랑하는 너에게 먹이는 행위다. 그 역도 성립할 터다. 허기진 네게 나를 먹이기, 또는 허기진 내가 너를 먹는 일은 사랑이 타자의 내입임을 말해준다. 강기원의 시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식육의 상상력은 한 철학자가 제출한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에 속한다”(들뢰즈, 《감각의 논리》)라는 명제와 겹쳐진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고기”라면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먹고 씹고 삼키고 들이킬 수 있게 된다. 사람은 “고기”일 뿐만 아니라 피와 체액으로 채워진 말랑말랑한 존재다. 그리하여 액체인 우리는 액체로써 흘러가고 서로의 살을 뚫고 삼투한다. “내가 네게로 흘러간다 / 네가 내게로 흘러든다”(〈흡혈〉,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이 흘러듦으로 우리는 차오르고 비워지며, “만발하고 시든다”(〈흡혈〉). 타자를 욕망함을 생래적으로 타고난 사람에게 상상세계에서의 이 식육과 흡혈 행위들은 실은 타자 살해의 무의식적인 몸짓이다. 사랑함이란 날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작은 살인들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 저지름은 우리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소통의 욕망을 드러낸다. 존재는 소통이고, 소통의 욕망함 그 자체다! 이 죽임이 말하는 것은 역설인데, 타자는 결코 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원죄는 타자들의 세계 속에 우리가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곳에 닿고자 함에 있다.


강기원(1957~) 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자기의 길을 찾는다. 1997년에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등의 작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강기원도 그런 예일 터다. 첫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2005)를 펴낸 뒤 2006년 〈바다로 가득 찬 책〉 등의 작품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강기원의 시세계는 ‘몸’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존재에 대한 언어들을 엽기적이고 잔혹한 상상력으로 발효시킨 1990년대 한국 시의 흐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기원의 상상력은 멀리는 한 세기도 더 전에 나온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1868)나 가까이로는 김언희가 《트렁크》(1995)에서 보여준 잔혹한 상상력과 유사하면서도 여기서 더 나아가 척수와 오장육부를 해체하고 피와 체액들을 분리하면서 존재의 기미들을 드러내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부를 만한 상상력까지 밀고 간다. 《바다로 가득 찬 책》의 시적 화자에 대해 서동욱은 아주 섬세한 시집 해설에서 “척추 혐오자이고 도살의 광적인 팬이며 렉커 박사의 분신이자 요리광”(《바다로 가득 찬 책》, 해설)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제 심장과 오장육부, 얼굴, 팔과 다리를 잘라내고, 뼈와 체액까지 분리해내 요리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로 대접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내놓는다. 끔찍하지만 매혹적인 강기원표 사랑 노래는 그런 식육의 상상력에 기대어 활짝 피어난다. 복수와 살육에나 어울릴 법한 피비린내 나는 식육의 수사학에서 사랑의 존재태를 찾아내고 욕망의 현전을 투시해낸 것은 희유의 일이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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