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민정연

무한히 자기증식하며 물컹물컹한 이 형태

민정연
1979년 광주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프랑스로 유학, 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 전공.
2004년부터 파리・뉴욕・취리히・서울에서 6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KIAF, 쾰른 아트페어, 아트 마이애미, 아트 두바이, 스코프 바젤, 상하이 컨템포러리 아트 등에 출품.
사치 컬렉션 작품 소장.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 중.
4분. 4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공중전화의 기본 통화시간 3분보다는 좀 길고 출퇴근 시간의 버스 배차 간격보다는 짧은 그 시간. 2009년 발간된 화가 민정연의 도록은 <4분>이라는 작품으로 시작한다. 미용실의 세면대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남의 손에 머리를 맡긴 무방비 상태의 4분. 세면대 위에 뭉실뭉실 기괴한 형상의 숲이 펼쳐진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히 서 있는 종유석 같기도 하고, 살아 있어 꿈틀거리는 생명체 같기도 하다.

화면의 중간에는 블랙홀 같은 소용돌이가 있어 물이 세면대를 넘치지 않는다. 기괴한 형상의 숲은 무한대로 자라날 것 같으며, 그 블랙홀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나에게는 이 그림이 마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작용 자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뇌의 무게는 1500g 내외. 평균 몸무게의 38분의 1인 이 작은 기관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뇌에 내재된 가능성과 그 작용은 그러나 측정이 불가능하다. 민정연의 그림은 이 측정 불가능한 세계의 그림이다. 그것은 부드러우면서도 체계 있으며, 물컹거리는 심연과 단단한 건축물적 구조가 함께하며, 뜨거우면서도 차갑다. 민정연의 작품 세계를 인터페이스 기능을 할 수 있는 그림으로 도록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만하다.

민정연의 독특한 그림은 유럽 미술계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2004년 데뷔 이래 그녀는 파리・뉴욕・취리히를 오가며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얻었으며, 2009년 11월에는 삼청동 공근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영국의 찰스 사치가 그녀의 작품을 구입해 유명세를 탔으며 개인전마다 출품작 전작이 매진되기도 했다. 2006년, 200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좋은 성과를 냈으며, 2009년 5월에도 100호 가격이 4500만 원에 낙찰되는 등 경제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세계 컬렉터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개인전을 위해 잠시 귀국했던 작가는 전시 오프닝에 참여하는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작업실이 있는 파리로 돌아갔다. 2001년 파리 국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 후 그곳에서 8년째 머무르고 있다.

4 minutes(4분) 150x200cm acrylic on canvas 2009
2005년 학교를 마치기 전 민정연은 카사 힐데브란트 갤러리에 전격 발탁된다. 이번 개인전을 가졌던 공근혜 갤러리와의 인연도 2004년 시작된다. 그녀의 가능성을 본 공근혜 대표가 수소문해서 작가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일찍이 안목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전문가들은 이제 갓 서른이 된 젊은 작가의 원숙한 작품을 보며 “한국미술의 세계화 붐, 실력 있는 젊은 작가들의 국제무대 약진”을 기대하고 있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그녀는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행의 결정은 그녀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결정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미국은 현대미술이 강세이고, 신선함은 있지만 역사가 없어서 본질적인 깊이는 없을 듯했다. 어떤 종류의 문화를 흡수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역사적인 깊이, 배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일상이 함께하는 파리는 나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Un aperes -midi amere(어느 씁쓸한 오후) 114x195cm acrylic on canvas 2009

파리 유학 후 미술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거듭하다 나온 작품

길고 검은 생머리에 분명하고 재치 있는 말투. 그녀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심지가 분명한 파리지엔느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파리에서의 학업이 그녀에게 던진 것은 세련됨과 테크닉을 넘어서는 미술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낯선 문화의 충격과 그림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의 과정은 화면에 촘촘히 점을 찍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하루 10시간을 캔버스에 점을 찍어 나갔다. 그것은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그림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며 명상의 과정이었다. 언제나 놀라움을 주는 민정연의 세밀화 기법은 이렇게 태어났다.

당시는 “기계처럼 점을 찍고 싶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기존의 사고방식과 낯선 문화적 충격이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캔버스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이미지로 채워졌다. 그녀의 그림은 대담한 구성과 경이로울 정도로 섬세한 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그녀는 쉽게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자료를 수집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세밀한 필치로 그리기 때문에 1년에 7점, 많으면 10점 정도만을 그릴 수 있다. 시장의 요구가 점점 커져 가는 상황에서 아주 귀하게 나오는 그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il y a pas de verger dans le desert(사막엔 목동이 없지)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09
그녀의 그림에는 나무뿌리 혹은 종유석 같은 기괴한 형태의 사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버지는 화석을 수집하는 데 취미가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원시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민정연의 그림을 통해 새로운 질감과 형태가 미술에 편입되었다. 민정연의 그림에는 종유석, 내장기관, 연기, 구름 등등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태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규정할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무한한 자기 증식만이 존재의 이유가 되고 있다.

혹자는 이 무한히 뻗어 나가는 형태들을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핵심 개념인 리좀(rhizome)과 관련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이 들뢰즈의 사상을 도해한 것은 아니지만, 들뢰즈 연구자들이 그녀의 작품에 대해 갖는 관심은 지대해서 2010년 들뢰즈 연구자들의 세미나에 그녀는 초청되어 있다. 미술과 철학이 나누는 생산적인 대화의 한복판에 그녀의 그림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수평적으로 확산되는 뿌리”인 리좀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다른 것과 접속될 수 있는 무한증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정의된다. 그녀의 그림에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확산의 감정이 이 리좀의 구조와 닮아 있다. 이런 상황을 민정연은 <내 영역을 확장하다>라는 작품 제목으로 요약한다. 그녀가 확장한 영역은 감수성의 측면이나 세상에 대한 통찰의 영역에서도 경계를 없애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나간다.

decombres(파편)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09
“내 그림에는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끊어져 있다. 슬플 것 같지만 매우 화사하고 차갑고 따뜻하다. 이분법적인 것의 동시성을 강조한다. 동시성을 강조하다 보니 공간과 주제가 모호해진다. 그럼으로써 교감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이분법적인 세계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에 대한 사유로 넘어갔다. 공간이 분해되었다가 다시 결합하는 등 공간은 무수히 변형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담은 4차원의 세계가 펼쳐진다. 민정연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가변적이고 어떤 것으로도 변환이 가능한 물컹물컹한 존재다. 프랑스에서 작업하는 한국 작가라는 그녀의 존재 방식 자체가 국경이라는 20세기적인 관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터뷰의 말미에 그녀는 “부모님께 너무 너무 감사하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자주 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한다. 세 살 때 입체적으로 선풍기를 그리는 재능을 알아보고 부모님은 딸이 화가가 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가족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녀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국경을 초월해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녀를 아끼고 응원할 것이다.
  • 201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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