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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 최초로 美 프로볼링 풀시드 선수 돼다

프로볼러 정태화

프로볼링에서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국 프로볼링(PBA・Professional Bowlers Association). 한국 무대에서 10승, 일본 무대에서 6승으로 한・일 프로볼링계를 평정한 후 미국 무대로 진출해 우승을 꿈꾸는 한국인이 있다. PBA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풀시드 동양인 선수로 이름을 올린 정태화(42) 선수다.

“매년 전 세계 수십 만 명의 볼러가 도전하지만 풀시드를 받을 수 있는 이는 불과 60여 명뿐이죠. PBA에서 미국인을 제외한 이방인이라곤 저와 유럽선수 단 한 명뿐이에요. 밟아 보기 힘든 만큼 볼링하는 모든 이들의 꿈의 무대가 PBA입니다.”

지난 9월 미국, 일본, 동남아 등 세계 각지를 돌며 대회 일정을 소화하느라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정태화 선수가 PBA 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아시아 최고의 볼링선수로 꼽히지만, 초・중・고와 대학 시절 그는 단 한 번도 운동을 배운 적이 없다. 대학 1학년 때, 군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따라 처음 볼링장을 갔고, 그와 술값 내기 볼링을 한 게 볼링과의 첫 만남이었다.

“운동선수가 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볼링도 가끔 친구들과 동네 볼링장을 가는 정도였어요.”

학창 시절 공부나 운동보다는 장사에 눈과 귀가 쏠리던 청년 정태화. “원래 공대를 가고 싶었지만 원예과에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보다는 데모나 노는 데 바빴다”며 입을 연다.

“집이 좀 여유롭게 살았죠. 또 아버지가 제가 하는 일은 많이 후원해 주셨어요. 그러던 차에 머리 좀 굵었다고 장사가 눈에 들어왔지요. 학교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1986년 겨울엔 후배가 군대 가면서 넘겨준 포장마차를 했죠. 대전시 한복판이라 나름 명당이었는데 망했어요. 포장마차의 포장이 얼어 부서지고, 소주병이 터져 나갈 만큼 추운 해라 손님이 없었어요. 18년 만의 혹한이었다고 하더군요. 다음 해엔 대전 변두리의 논을 빌려 스케이트장을 열었어요. 그런데 세 달 중 딱 15일 얼음 구경을 했을 만큼 따뜻한 겨울이 오더군요. 매년 날씨가 저를 죽였던 거죠(하하하). 장사를 좋아했지만 장사 운은 별로 없었어요.”

아버지의 후원으로 원 없이 일을 벌이던 그에게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닥쳤다. 1991년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부족함 모르고 살아오던 그는 지하 단칸 사글세방으로 내몰렸다.

“부모님은 그 후 2년 동안 누워만 계셨어요.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죠. 여섯 달 동안 사기꾼 잡겠다고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집안의 몰락은 태화 씨가 볼링 인생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여자 친구가 기분 전환시켜 주겠다며 데려간 곳이 볼링장이었어요. 스트레스 풀 곳이 없던 차에 한두 번 하다보니 재미가 있더군요. 내친김에 동호회에 가입하면서 꾸준히 볼링을 하게 됐죠. 한번은 볼링장에서 상금으로 금 다섯 돈을 걸고 이벤트 대회를 열었어요. 금 다섯 돈에 혹해 참가했는데 우승을 했지요. 알아보니 주변 모든 볼링장에서 이런 이벤트 대회를 열더라고요.”

그는 상금이 걸려 있는 이벤트 대회마다 쫓아다니며 참가했다. 우승은 예외 없이 그의 몫이 됐다.

“다른 사람들은 재미로 참가했지만, 저는 절박했죠.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1등하는 데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대회에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어요. 생존을 위해 누구보다 독하게 볼링을 쳤던 거죠.”


생활고로 볼링 시작한 후 도전, 또 도전

주변 볼링장과 동호회에 그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도 통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6년, 내친김에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 이변을 만들어 냈다. 단 한 번도 정식 볼링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동호회 출신 정태화가 초・중・고・대학에서 볼링만을 쳐 온 선수들을 물리치고 6명을 뽑는 국가대표에 최종 선발된 것이다. 스물아홉, 그는 첫 태극마크를 달았고, 볼링을 친 이후 처음 제도권 선수가 됐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긴 했지만 그는 태극마크를 달 수 없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운동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고, 합숙훈련에 참가할 수도 없었다.

“국가대표라는 명예와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절실했죠.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그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한국 프로볼링 3기생으로 프로볼러가 됐고, 1998년 동양매직컵 우승을 시작으로 한국 무대를 평정해 간다. 1999년, 한국이 좁은 것 같았다. 볼링계 선배 유청희(현 프로볼링협회 이사) 씨가 미국이라는 더 큰 세계를 알려 줬다. 유 이사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미국행 재원을 마련했고, 두 사람은 유 이사가 장만한 중고차로 미국 전역을 돌며 미국 프로 볼링계에 도전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조금 건방졌던 게 사실이었어요. ‘뭐 다 사람 사는 곳인데, 큰 무대라고 해봐야… 내가 최고다’란 자만심도 있었죠. 미국에서 첫 시합을 했을 때 본선에 오르며 31등을 했어요. ‘진짜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두 달 반 동안 아홉 번의 대회에 나가 모조리 예선 탈락했다. “한두 번 떨어질 땐 체력 탓을 했는데 실력의 문제였어요. 제 한계를 처음 느꼈습니다. 이때 이론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미국 무대는 겸손이라는 걸 알게 해 주더군요.”

이들은 점차 미국생활에 지쳐 갔다.

“한 시합을 끝내면 다음 시합을 위해 24시간 동안 2500km를 꼬박 운전해 가야 했어요. 그리고 다시 2800km를 운전해서 다음 대회를 찾아갔어요. 마치 무전여행을 하는 것 같았죠. 씻지도 못하고, 완전 노숙자처럼 미국을 떠돌았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볼링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일본 무대인 JPBA에 먼저 도전했다. 미국에서 마신 쓴잔이 도움이 됐다. 일본 땅을 밟는 순간 욕심을 버렸다. 진출 첫 해, 일본 최고 권위대회인 일본오픈 결승에서 만난 일본 선수에게 1점 차 신승을 하면서 첫 해외 우승을 만들어 냈다. 이후 일본 프로무대 6승. 한국과 일본에선 그의 적수가 없었다.

다시 미국 무대에 도전, PBA 풀시드를 따냈다. 그가 미국 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본 무대만 해도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예요.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친 선수도, 경기가 열릴 때면 구름떼처럼 몰려와 열광하는 관중도. 그런데 미국 무대는 또 일본 무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전 세계 최고의 선수 중 선택받은 60여 명이 겨루는 곳입니다. 볼링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삼박자가 있다고 하지요. 경기 당일 컨디션, 볼링 이론, 레인 적응능력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무대의 경우 이 중 하나 정도가 부족해도 우승할 수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셋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무대입니다. 이 세 개가 완벽히 갖추어진 후 운(運)을 만나면 우승할 수 있는 곳이죠.”

미국 무대에 적응 중인 정태화. 10년만에 다시 밟은 그곳에서의 승부가 쉽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레인에 기름을 바른 게 아니라 부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한국과 일본에 비해 어렵게 설계된 코스입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찾는 것도 볼을 컨트롤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죠. 한 프레임(한 번의 투구), 한 프레임이 제게는 실전이자 적응 훈련인 셈입니다. 다행히 금 다섯 돈을 따려고 매일 밤 대전의 수많은 볼링장들을 헤매며, 전혀 다른 레인에서 연습도 없이 실전을 펼치던 것이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 같습니다(하하).”

한국뿐 아니라 일본 선수와 팬들이 그에게 보내는 기대치를 알기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승부욕이 생긴다는 정태화.

“아이고, 아직 멀었습니다. 히딩크의 말처럼 저 역시 아직 배가 고픕니다. 하면 할수록 해야 할 게 너무너무 많습니다. 2년 후쯤 저도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선수로 성장해 있고 싶습니다.”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볼링코리아
  •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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