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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축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남자

안익수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

지난 7월 11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제25회 유니버시아드 대회 여자축구 결승전. 독일·러시아·프랑스 등 우승 후보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돌풍을 일으킨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숙적 일본을 4대 1로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1991년 세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한국 남자축구가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세계무대 정상에 오른 후, 남녀 통틀어 두 번째로 정상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기적 뒤에는 안익수(45)라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자축구와 연을 맺은 지 3년, 여자축구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지 만 2년 만의 쾌거다.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우리 아이들(여자축구 대표선수들)이 받아야 할 인사”라며 수줍게 웃는다. 안익수는 성남일화 창단 멤버로 1993~1995년 3년 연속 팀의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끈 주역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 1994년과 1998년 베스트11에 드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지만 축구팬들에게 안익수라는 이름은 화려함보다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각인돼 있다. 현역 선수시절 그라운드에서 궂은일은 도맡는 수비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축구와 연을 맺는 과정이 그를 노력과 성실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안익수 감독은 축구에 관한 한 모든 면에서 늦둥이다. 고2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고, 20대 중반에야 프로선수가 됐고, 남들은 은퇴를 고민하는 서른 살에 국가대표가 되었다.

“우리나라 축구판에서 저는 그 흔한 파벌도, 줄도 없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란 말로 그의 축구 이야기가 시작됐다. 1983년, 문일고 2학년 때 안익수의 축구 인생이 시작됐다.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 축구부에 넣어달라며 박화덕 감독님을 며칠 동안 따라다녔어요. 감독님이 테스트하시더니 덜컥 축구해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축구선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 편하게 축구를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운동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해서 몰래 시작한 것.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적이 곤두박질친 데다 햇볕에 몸이 까맣게 그을린 아들이 이상해 학교를 찾았던 아버지에게 딱 걸렸다. 아버지한테 ‘장마철에 먼지 나게’ 맞았지만,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아버지를 설득해 기어이 허락을 받아냈다. 처음에는 마음처럼 축구가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축구 명문 문일고에 스카우트돼 온 친구들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박 감독님이 숭실고 축구부에 자리를 알아봐 주셨어요.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에 고3 때 전학했어요. 자존심은 사치였죠. 학교 앞 분식집에서 고1 후배들에게 라면을 사 줘 가며 패스, 리프팅, 킥을 다시 배웠어요. 선후배 위계질서가 확실한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거죠.”

고등학교 졸업 때 그를 받아 주는 대학과 실업팀은 한 곳도 없었다. 재수 끝에 중앙대 체육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교 축구팀을 찾아갔지요. 그런데 ‘축구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은 안 받는다’며 거절당했어요.”

그는 자신을 받아 줄 대학 축구팀을 찾아 인천전문대로 옮겼다.

“최추경 교수님이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는지 받아 주셨어요. 눈만 뜨면 미친 듯이 축구를 했어요. 실력도 꽤 늘었죠. 그 결과 2년제 전문대 팀이 전국대회 4강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어 냈어요.”


축구장을 떠난 후에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시키고 싶어요

1998년 선수 시절, 유상철(왼쪽)의 문전 대시를 포항 스틸러스 안익수(오른쪽)가 태클로 저지하고 있다.
불과 2년 만에 그를 원하는 곳이 생겨났다.

“졸업할 때는 상무 김영배 감독과 프로팀 현대 김호 감독이 서로 자기 팀에 오라고 했어요. 어차피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상무로 발길을 돌렸죠.”

제대 후 그는 천안 일화(현 성남 일화)의 창단 멤버로 프로선수가 된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그는 늘 후보였다. 시즌 시작 후 아홉 달이 지나고야 첫 게임을 뛸 수 있었다.

“주전이 경고 누적으로 게임에 나가지 못할 때였어요. ‘땜빵’으로 국가대표 공격수 노수진 선배 마크맨을 했어요.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죽어라 뛰었죠. 감독이 눈에 들었는지 이후 줄곧 주전이 됐습니다.”

이후 승승장구했다. 서른에 늦깎이 국가대표로 미국월드컵 무대도 밟았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누비던 프로무대, 1998년 2년을 더 뛰어 달라는 포항 팀의 제안을 물리치고 은퇴를 결정했다.

“더 뛰고 싶었죠. 하지만 꽤 오래전 친정인 성남 일화의 코치직을 수락해 놓은 상태였어요. 돈이나 조건은 포항이 좋았지만 신뢰가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은퇴한 겁니다.”

코치를 하는 7년 동안 팀이 세 번이나 정규리그 우승을 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가 2005년 영국으로 축구유학을 결정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꾸어 놓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행기 타기 1주일 전 쯤 스승들께 인사를 다녔어요. 대교 여자축구팀 감독이던 최추경 교수님에게도 인사를 갔어요. 영국에 가는 이유를 설명 드렸는데, 듣고만 계셨어요. 그리곤 마지막에 ‘안군, 내가 맡고 있는 팀 감독으로 오지 않겠나?’ 하시는 거예요.”

고민이 됐다. 아무도 받아 주지 않던 그에게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은인이자 스승인 최추경 교수의 부탁이었다. 영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까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대교 여자축구팀 감독을 1년만 하기로 했어요. 스승님이 아이처럼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6개월 후에 알았죠. 제가 감독을 맡고 딱 6개월 후에 스승님이 암 수술을 받으셨고, 다시 6개월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스승님이 만든 팀을 아무에게나 물려주기 싫으셨나 봐요. 저 외에는 누구에게도 팀을 맡기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2006년, 그렇게 여자 축구판에 뛰어들었다. 스승의 뜻을 잇고 싶었던 그는 프로팀 코치 시절보다 더 많이 연구했다. 그리고 2007년,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이 됐고, 올해 한국 여자축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여자축구팀이 초·중·고 총 66개, 대학과 실업을 합해 6개뿐인 나라에서 이룬 성과입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 축구사에도 없는 기록일 겁니다.”

안익수 감독은 한국 여자축구 선수들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을 들어 이야기한다.

“우리 아이들(여자축구 국가대표)을 보며 선수 시절 항상 가슴에 품고 뛰었던 ‘가능성’이란 말을 매일매일 발견합니다. ‘무한질주’ 그 자체인 아이들이에요. 훈련장에서 제가 주문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그라운드에서 그 이상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나 한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이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이렇게 흥미롭고, 신비로운지 알게 해 준 고마운 아이들입니다.”

2009년 7월 9일. 유니버시아드 대회 준결승전. 프랑스를 승부차기에서 꺾고 결승 진출을 확정한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환호하는 모습.
얼마 전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또 다시 승전보를 알렸다. 대만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4연승을 거두며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안 감독은 제자들이 축구병기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축구선수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며 말을 이었다.

“축구는 전체 삶 중 한 부분입니다. 축구선수로서 은퇴한 후의 삶도 준비할 수 있어야지요. 인격적인 성장이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 기술도 함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장뿐 아니라 사회에 나가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아이들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런 마음은 여자 대표팀을 변화시켰다. 훈련 시간을 줄이는 대신 집중도를 높였다. 제자들은 그 시간에 컴퓨터를 배우고 각종 자격증을 따면서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40대의 젊은 감독임에도 그는 덕장(德將)이라 불린다. 선수들에게 큰소리 한 번 치지 않지만 최고의 팀을 만들었다. 여자축구를 두고 흔히 비인기 종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설움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은 저도, 제자들도 넘어야 할 산”이라고 표현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제 인생이 그걸 증명하잖아요. 저를 통해 선수들,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노력, 의지로 뭉친 성실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사진 : 신규철
  •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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