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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 특공대〉의 속사포 내레이션은 내 목소리!

성우 박기량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금요일 밤, 치열한 텔레비전 시청률 전쟁의 승자는 자극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먼 교양 다큐 프로그램 〈VJ특공대〉다. 2000년 7월 시작한 이래 9년째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다. 방송 관계자와 시청자들은 〈VJ특공대〉의 성공 비결로 속사포처럼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내레이션을 든다.
〈VJ특공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거침없이 쏟아 내는 속사포 내레이션의 주인공은 27년차 경력의 성우 박기량이다. 9년 동안 수십 명의 성우와 아나운서, PD들이 거쳐 간 〈VJ특공대〉. 하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키며 〈VJ특공대〉의 상징이 된 이 역시 박기량이다. 수많은 외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목소리를 연기했고, <인간시대>와 <성공시대> 내레이션을 맡았던 그는 철저히 프로다. 목소리를 위해 술과 담배는 끊었고, 매일 소금물로 코와 목을 씻어 내는 고통을 참아 낸다. 어떤 약속이든 언제나 상대방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기자를 만난 날 역시 그는 10여 분 일찍 도착한 기자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우란 직업이 이제 프리랜서가 됐어요. 과격하게 말하면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과 다를 바 없지요. 저를 선택한 고객을 후회하게 하면 안 돼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을 만족시키는 명품이 되려면 스스로 가혹해지고, 철저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프로 정신이 그를 최고의 성우 자리에 올려놓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성우 박기량이 목소리에 인생을 걸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사춘기 시절 미모의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했어요. 처음 사랑에 빠진 거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특히 선생님과 단둘이 마주할 수 있는 국어책 읽기에 정성을 다했죠. 덕분에 정확한 발음과 호흡을 익혀 나갈 수 있었어요.”

또렷또렷 정확한 읽기 실력은 그를 웅변대회 연사로 변신시켰다.

“국어책을 잘 읽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웅변대회에 내보내셨어요. 반공・멸공이 국시이던 1970년대만 해도 학교는 물론 시, 도, 전국대회에 이르기까지 한 달에 몇 번씩 학생 웅변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상을 타는 게 학교와 가문의 자랑이던 시절이었죠. 웅변 톤의 목소리, 발성, 제스처를 배우면서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탔어요. 이렇게 상을 타니까 목소리에 자신감도 생겼고, 막연했지만 ‘목소리를 살려 뭔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어린 시절 기억에 흥이 났는지 그는 이야기 중간중간 당시 대회에서 했던 웅변 장면을 재현한다.



영화 <별들의 고향> 의 대사에 반해 성우가 되다

학창 시절 내내 목소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박기량. 그가 평생의 업(業)으로 성우를 결심한 건 열일곱 살 때,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용산의 한 극장에서였다.

“당시 흥행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보는데, 이상하게 배우들이 눈에 안 들어오고, 주인공들이 나누는 그 느끼한 대화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거예요. 유치하잖아요. 그런데 자꾸 귀에서 맴도는 거예요. 요즘 말로 ‘뻑’ 갔죠. 그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며 대사를 아예 외워 버렸죠.”

그러더니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 주세요.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라며 주인공 신성일과 안인숙의 대사를 번갈아 한다. 그는 군대 제대 후 성우학원을 거쳐 1982년 MBC 성우 공채에 응시해 정식 성우가 된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아 촌로, 사극 주인공 등을 했다.

“그때 고민 많이 했습니다. 촌로의 느릿느릿한 말투나 사극의 인물은 제 목소리와는 맞지 않았어요. 녹음하면서도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이었죠. TV 외화나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하고 싶었는데 PD들의 생각은 달랐나 봐요.”

결국 3년 만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그 후 아나운서의 전유물이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만들어 간다.

“운이 좋았죠. 마침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이 연이어 있었어요. 스포츠의 역동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경쾌하면서 힘있는 목소리가 필요했고, PD들이 저를 찾기 시작하더군요. 비로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더군요.”

이후 그는 미스코리아 대회 내레이션, TV외화의 주인공은 물론 차분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인간시대> <성공시대> 등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도맡아 하게 된다. 2000년 〈VJ특공대〉를 맡고는 개성 있는 속사포 대사로 시청자의 귀를 사로잡았다. 평상시 그의 말투는 어떨까? 그는 <인간시대>나 <성공시대> 내레이션하듯 차분하게 말한다”고 했다.

“역동적인 스포츠 다큐를 맡은 후 점점 말이 빨라졌어요. 미국 내레이터들을 많이 모니터하는데, 그들 스타일이 한 호흡으로 리듬감 있게 끊임없이 말하는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그걸 〈VJ특공대〉에서 선보였는데, 시청자들 반응이 뜨겁더군요. 저 스스로도 또 다른 목소리를 찾은 거죠.”


지난해 말 12명을 뽑은 한 방송국 성우 공채에 2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억대 연봉, 평생 직업, 마지막 남은 숨은 엔터테이너 등 최근 성우라는 직업이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성우의 길은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어 있지 않다. 박기량이 말하는 성우의 길은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이겨 내야 하는 험난함 그것이다.

“우리나라에 성우만 1700명이 넘어요. 그중 200명 정도 활동하고 또 그중 30~40%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나운서나 연예인들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주인공이 될 수도 없는 게 성우 생활입니다. 성우로 자리 잡는 것은 멀고 험한 길입니다.”

그는 어느 직업보다 빛과 그림자가 극명한 것이 성우라고 말한다.

“라디오 시대 때 전성기를 누리던 성우들이 TV시대로 접어들며 보릿고개를 맞았고, 다시 컬러TV와 동시녹음 영화시대에 접어들자 성우들에게 쓰나미가 덮쳐 왔죠. 이런 과정을 거치며 능력 있고, 전도유망했던 성우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습니다.”

전운, 김무생, 나문희, 변희봉, 전원주, 김용림 등 성우로 출발했지만 성우로 자리 잡지 못하고 배우로 전향하고서야 제자리를 잡은 사람들만 봐도 성우의 길이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우가 되려면 남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나야 하는 걸까? 그는 “꼭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성우 역시 연기자죠. 꾀꼬리 같은 목소리뿐 아니라 거칠고 탁한 목소리, 또 어디서나 들리는 평범한 목소리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우가 될 수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연기력과 함께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순발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남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성우죠. 그 인생을 살기 위해 ‘변화’란 단어는 성우에겐 운명입니다.”

그는 성우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마이크 앞에만 서면 행복하다는 그.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우의 길을 택한 이상, 사람들이 저를 찾는 한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즐겁고, 마음 따뜻해지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진 : 신규철
  • 2009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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