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은우

“누가 나 좀 말려 줘요” 유행시킨 개그맨의 새로운 인생

“저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잊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익살스럽게 외치던 “누가 나 좀~ 말려 줘요~”란 유행어,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로 시작되는 ‘만리포사랑’ 노래에 맞춘 경쾌한 손장단으로 웃음을 자아냈던 갈매기 춤의 주인공, 김은우는 1980~90년대 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으던 개그맨 1세대다. 이경규, 최양락, 이봉원이 모두 그의 후배. 그보다 앞서 활동한 개그맨으로는 전유성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요즘 골프방송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 골프대회를 누비며 골프 리포터로 활약하고 있는 것. 한때 개그맨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팬들에게 잊혀진 후 새로운 삶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았다는 그를 만났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배우 지망생 김은우, 그가 배우가 아닌 개그맨의 길로 들어선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선배는 물론 동기들까지 모두 텔레비전에 출연하더군요. ‘이러다 내 자리가 없어지겠다’는 불안감에 무조건 텔레비전으로 진출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대학 1학년 때부터 탤런트, 배우, 개그맨 가리지 않고 시험을 봤고, 1980년 TBC 개그맨 콘테스트 본선에 진출했다.

“예선 통과자들 사이에 ‘여자 응시자는 무조건 상을 준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워낙 여자 참가자가 적어서였죠. 학교 친구 중 얼굴 예쁘고 센스 있는 여자를 찾아 나섰죠.”

그때 찾아낸 친구가 동기생인 이성미. 탤런트를 하겠다는 이성미에게 그냥 무대에 서 있기만 해 달라고 간신히 설득했다. 그런데 대상을 받았다.

“수줍음 많고 조용한 친구였는데, 입을 열면 저보다 더 웃겼어요. 우리나라 개그우먼 1호 이성미는 제가 만든 겁니다(웃음).”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개그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80년 데뷔하자마자 TBC가 KBS로 통폐합되며 개그무대가 사라졌다. 콤비였던 이성미도 KBS로 떠났다. 게다가 데뷔한 지 1년도 안 돼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3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개그무대에는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어린이 프로와 단역으로 개그 생명을 이어 가야 했다. 1991년 SBS가 개국하여 겨우 정통 개그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코메디 전망대>에서 “누가 나 좀 말려 줘요~”란 유행어를 낳으며 스타가 됐다. 그러나 전성기는 너무 짧았다.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1990년대 초 이봉원 씨가 ‘형, 골프 배워 둬야 해. 늙어서는 축구 못하니까’라며 권유해서 시작했던 골프가 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줄은 몰랐어요. 케이블TV가 개국하면서 골프 채널들이 생겼는데,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시장으로 보였지요.”

그러나 개그맨 이미지로 골프방송을 할 수는 없었다. 돈 있고 고상한 사람들이 즐기는 품격 있는 스포츠란 이미지와 개그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을 골프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를 알리기 위한 이슈가 필요했어요. ‘개그맨이 프로골퍼래’란 소문이 나면 사람들도 저를 알아볼 거란 기대에 프로골퍼 테스트와 PGA티칭프로 테스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년의 도전 끝에 미국 PGA의 티칭프로자격을 얻었다. 160cm에 57kg, 골프를 하기엔 너무나 작은 체구 덕에 그는 골프계의 마스코트가 됐다.

“골퍼로서는 최악의 조건인데 오히려 그게 사람들한테 강한 인상을 줬어요. 난쟁이 똥자루만 한 제가 넓은 골프장을 발발거리며 누비고 다녔으니까요. 여기저기 사람들이 불러 주면서 골프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지요.


새로운 삶의 의미 찾아 준 장애우들과의 만남

인기의 무상함을 절감하며 삶의 굴곡을 경험했던 김은우. 그의 삶을 바꾼 계기는 장애우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편지 하나를 읽어 줬다. “11년 전 우리 가족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김은우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 18년 전 극동방송 <희망의 구름다리>란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작은 평화의 집’ 원장 장은경 씨가 쓴 이 편지는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SBS 희극인실 실장도 할 만큼 잘나갈 때의 일이죠. 극동방송 MC를 하며 알게 된 ‘작은평화의 집’을 돕고 싶었어요. 마침 SBS 개그맨들이 단체 CF를 찍어 받은 돈이 있었는데 선후배를 설득해 그곳에 기부하고 후배들과 함께 매달 찾아갔죠.”

그렇게 2년을 이어 오다 인기가 떨어지고 자기 삶을 챙기기도 버거워진 김은우는 ‘작은평화의 집’을 자연스럽게 잊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은경 씨에게 “아이들이 여전히 삐삐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다”는 인터넷 쪽지가 와 있었다.

“그걸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났어요. ‘작은 평화의 집’ 아이들은 아이큐가 50도 안 되는 지적장애아들인데 그렇게 오랜 시간 저를 기억해 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변덕 심한 팬들과는 달리 제 인생에 잠깐 스쳤던 아이들이 마음은 한결같았어요. 그때 많이 부끄러웠어요. ‘나는 나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인간’이란 반성과 함께 제 삶을 돌아보게 된 계기였죠.”

그렇게 그들과 다시 만난 것이 4년 전. 재회는 기쁨과 아픔이 교차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돌아보니 더 미안해지는 거예요. 덕우라는 아이가 안 보였어요. 근육이 오그라드는 병이 있었는데, 저를 제일 잘 따르던 아이였죠. 그런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거예요. 얼마나 미안하던지. 저야 잠시 짬을 내 놀아 준 것뿐인데, 아이들은 평생 가슴에 그 기억을 묻고 살아왔을 거란 생각에…”라면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했던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움을 준다는 건 라면박스 들고 찾아가 사진 찍고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아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거예요. 한번 연을 맺으면 늘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그 아이들은 이제 그에게 허물도 감싸 안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는 매년 가을 장애우를 위한 음악회를 열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유명인을 섭외하는 것부터 음악회 기획, 현장진행까지 도맡아 한다. 벌써 4년째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들지만 그는 이때가 가장 즐겁단다. 장애인들에게 골프를 가르치며 재활 치료도 돕고 있다. 그가 하는 봉사활동에 대해 꼬치꼬치 묻자 “그런 걸 뭘 물어보느냐”며 쑥스러운 듯 손을 내젓는다. 그러곤 “어느 날 갑자기 ‘나 봉사하고 삽니다’라며 나타나는 건 좋지 않다”고 하더니 “언론을 통해 (봉사하는) 그런 모습으로 포장돼 비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마지막 말을 건넸다.

“봉사는 다른 의도를 섞지 말고 그저 즐겁게 하면 됩니다. 저는 이제야 그 뜻을 알게 된 겁니다.”

사진 : 문지민
  • 200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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