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8) | 봄눈 속 매화 향기 날리고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꽃샘추위’라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지, 곳곳에 봄꽃 피었다는 소식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후려치는 눈바람을 맞을 때마다 처음인 듯 놀랍게 겪어 내곤 합니다. 그래서 더욱 눈바람 속에 서서 짱짱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가 거룩하게 여겨지는 걸까요.

나무시장이며 농원에서 한두 그루씩 사다 심은 나무들이 어느새 앞뜰 뒤뜰을 띄엄띄엄 성글게 울타리 치고 있는데, 매화는 두 그루, 그중 현관 앞의 것이 이번 꽃샘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매화도 눈 같고, 눈도 매화 같고’라는 서거정의 시구를 현현한 셈입니다.


지난해 처음 열매 맺은 기억을 알알이 품은 듯 이번 꽃망울들은 하나하나가 각별히 옹골차 보였는데, 어느새 강철같이 단단하고 곧은 가지에 조르르 매달린 씨알 같던 것들이 그 맵차던 눈 속에서 하나씩 터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절경을, 나는 만날 책 보따리 옷 보따리 꾸려 들고 바삐 들락날락하는 탓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요.

“매화꽃이 피었어.”

“어디, 매화가 피었대? 서울 오가면서 진달래꽃 핀 건 봤는데.”

“우리 숲골짜기집 뜰에… 지난해 매실 땄던 그 매화나무가.”

남편과의 통화 끝에 그런 얘길 듣고도 늦은 밤 숲골짜기에 도착해서는 뜰을 가로질러 곧장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매화 봤어?”

“참, 매화꽃이 피었다고… 짐 옮기느라 볼 새가 없었네.”

잔뜩 지친 채 누울 생각만 하고 들어왔다가 매화꽃을 보러 나갑니다.

정말 앞뜰이 환합니다. 어린 나무 한 그루의 꽃 빛이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고, 피로에 찌든 사람의 뼛속까지 환히 밝혀 줍니다. 그 이름난 ‘매향’이 코끝을 스치는 듯합니다.

“단원이 매화음(梅花飮)이라고, 그림 한 폭 팔아 매화 화분을 사서는 친구들을 불러다 놓고 감상하며 술 마시느라 양식 사고 땔감 살 돈을 다 썼다더니… 그럴 만하네.”

“흠, 매화꽃 보며 한잔하자고… 오밤중에… 강원도 산골짜기로… 벗들을!”

어느 해 봄, 글쟁이 친구들과 어울려 남도의 어느 시인 집 뜰 정자에 핀배롱나무 꽃 보러 간다고, 열차 타고 내려가는 중이라고, 대낮부터 한잔한 목소리로 회사에 있는 내게 전화했던 일이 떠올라 혼자 웃습니다.

“참, 매화꽃 찾아오는 새가 있다던대! 그런 새 봤어?”

“새… 그러고 보니 꽃피고 나서 유난히 가까이서 재재거리는 새들이 있는 듯도 하네.”

“그게 아마 휘파람새일 거야… 이야기가 있다니까. 고려 때, 이런 숲골짜기에서 그릇 구워 만들던 사내가 말이야… 혼례를 사흘 앞두고 신부 될 처녀를 잃었더래. 사내가 처녀 무덤에 엎드려 울며 지내는데 하루는 무덤가에 싹이 트고 나무 한 그루가 자라 처녀의 넋이로구나, 여기고 자기 집 뜰에 옮겨다 심고 지극 정성 돌보는데, 그러느라 그릇 빚고 굽는 일은 하는 둥 마는 둥이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내는 호호백발 노인이 되고, 애지중지 가꾼 매화는 거목이 되었는데, 한참 동안 기척이 없어 마을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니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자그마한 도자기합이 하나 있더래. 사람들이 이상해서 뚜껑을 열었더니, 포르르 휘파람새 하나가 날아 나가더래. 지금도 매화나무에 와서 우는 건 대개 휘파람새라네.”

“바로 여기 얘기네… 바로 아래 숲골짜기가 바로 ‘사기막’이잖아, 고려 때 이 숲골짜기에서 사기그릇 구웠다고.”

“정말… 어쩌면 그 시절엔 어디서나 그런 일이 흔했겠지. 사람이 꽃이 되고 새가 되고.”

아침엔 매화꽃과 휘파람새를 한꺼번에 보면서 커피로 ‘매화음’을 즐기리라, 모처럼 향기로운 결심을 합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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