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키친> 홍지영 감독

사랑하는 부부 사이,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온다면?

이 영화, 참 당돌하다. 한 남자(상인 역, 김태우 분)밖에 모르던 여자(모래 역, 신민아 분)가 사고처럼 다른 남자(두레 역, 주지훈 분)와 한낮의 정사를 벌이고 셋이 한집에서 살게 된다. 사랑의 정점에 이른 신혼부부에게 닥친 일이다. 한집에서 두 남자와 산다는 설정이 대놓고 이중 결혼 생활을 하는 소재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보다 더 발칙하다.
홍지영 감독의 데뷔작 <키친>. 이 영화가 문제인 건 소재 자체가 아니라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통상 ‘불륜’으로 치부되는 소재를 치정극으로 치닫지 않고 한없이 밝고 예쁘게 다룬다. 도덕적인 잣대나 가족 관계 등을 배제하고 오로지 세 배우의 감정 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모든 부적절한 관계는 결핍에서 시작되는 걸까?”
“사랑의 정점에 있는 부부에게도 또 다른 사랑이 사고처럼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랑이란 감정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홍지영 감독을 신사동 ‘수필름’ 사무실에서 만났다.
갈색의 투명한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가녀린 체구에 작은 목소리지만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한 투자자의 동의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 결국 투자가 결렬되면서 회사를 나왔고, 지금의 수필름으로 옮긴 지 1년 반 만에 영화를 개봉했다.

“이 영화를 ‘불륜동화’라고들 하는데, 아직도 불륜이라는 표현을 쓰나 싶어요. 불륜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거잖아요. 과연 감정에 비도덕적이다, 비윤리적이다라는 표현을 함부로 쓸 수 있나요? 누구나 늘 사랑 속에 있고 싶어 하는데, 그 감정이 다른 관계와 생긴다고 해서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이라고 하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를 보고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를 떠올리는 관객이 많다. 일단 요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는 점에서 닮았고, 둘 다 배우 주지훈이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앤티크>는 동성애를, <키친>은 불륜 관계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둘 다 금기시하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금기된 사랑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한없이 밝고 가벼운 톤이 가장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는 부부 감독의 손에서 탄생했다. <앤티크> 민규동 감독과 <키친> 홍지영 감독은 부부다. 홍지영 감독은 민 감독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조감독을, <앤티크>에서는 각색을 맡아 내공을 다졌다.

“민 감독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성향도 비슷하고, 절대 화를 안 내고 조용조용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 등이 비슷하죠. 또 금기된 소재를 다루는 데 편견이나 거리낌이 없다는 점에서도 잘 통하고요.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우린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저는 가능한 한 인간관계를 줄이고 캐릭터에 집중하지만, 민 감독 영화에는 복잡다단한 인물들이 등장해요.”

한사무실을 쓰는 남편 민규동 감독과. 민 감독은 아내의 영화 <키친> 제작 당시, 보수적인 관객이자 투자가 입장에서 조언해 주었다 한다.

〈앤티크〉 민규동 감독과 부부 사이

두 영화는 나란히 베를린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됐고, 나란히 일본으로 수출됐다. <앤티크>는 4월말, <키친>은 5월 30일 일본에서 개봉된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동거한다는 <키친>의 소재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공감대가 더 넓다. 게다가 주지훈의 일본 팬들이 많아 일본 영화사 두 군데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결국 <앤티크>의 판권을 가진 영화사로 낙점되어 두 영화가 나란히 한배급사를 통해 상영될 예정이다.

이 영화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모래가 운영하는 양산 가게의 양산은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었다. 양산은 모래의 심경을 대변하는 중요한 모티프다. 양산 가게를 운영하는 모래는 양산에 둘러싸여 살고, 늘 양산을 쓰고 다닌다. 양산은 햇볕을 차단하는 도구다. 햇볕이 필요하지만 의도적으로 햇볕을 차단하는 도구를 들고 다니는 모래는 결국 ‘햇살이 따가워서’ 낯선 남자와의 한낮 정사를 벌인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햇살이 뜨거워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했듯, 그건 사고다.

여성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신은 단연 정사신이다. 좁은 공간에 낯선 두 사람이 갇히고, 두레의 입술이 모래의 이마에 닿을 듯 말 듯하다. 귀 털에 와 닿는 숨결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키스에 혼몽해진 모래는 양산을 놓치고 햇살이 눈부셔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서로에게 부드럽게 녹아든다. 노출 수위는 높지 않아 15세 관람 가능 등급 판정을 받았다.

“남녀 관객의 반응이 달라 놀랐어요. 남성 관객은 ‘정사했어?’라며 키스신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목젖의 떨림이나 그들이 부딪히면서 느껴지는 세심함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거죠. 여성 관객 중에서 미적인 것에 관심이 많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분들은 ‘<쌍화점>보다 더 야하다’고들 해요.”

왼쪽부터 영화 <키친> 포스터, 프랑스에서 온 천재 요리사 두레(주지훈 분).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모래(신민아 분).
홍 감독과 민 감독은 6년 연애 끝에 결혼해 9년째 살고 있다. 여섯 살배기 딸을 둔 둘은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그런 홍 감독도 “과연 저에게, 그에게 그런 새로운 사랑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라고 반문한다. 그는 출산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를 낳았을 때 느꼈던 공포가 생각나요. 낳자마자 바로 배가 꺼지는 게 아니잖아요. 거울 앞에 섰는데, ‘어? 나 뭐했지?’ 하면서 위기감이 몰려왔어요. ‘내가 연애를 할 수 있는 몸이 아니구나. 아름답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물론 아이도 기쁨이고, 일에서도 기쁨을 느끼지만, 다 빼고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늘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홍지영 감독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영화 평론을 하고 싶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발을 들였고, 이곳에서 민 감독과 단편영화 <허스토리>를 공동 제작하면서 제작자로 방향을 틀었다. 제작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철학 전공자의 시선으로 실체적 사랑과 본질적 사랑의 화두를 놓고 진지한 사유를 거듭했다. 그리고 가볍게 포장했지만 가볍지 않은 영화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사랑이나 부적절한 관계는 다 결핍에서 시작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의 정점에 이른 부부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다른 사랑이 끼어들 수 있어요. 이렇게 잔인한 설정을 해 놓고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지를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른 사랑이 끼어들었을 때 자신이 잠식당한 것 같아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방식은 쉽고 편하잖아요. 끝까지 밝은 톤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들었어요. 이 영화를 또 다른 사랑에 대한 로망이나 여자들의 로망이라고 좁게 말하는데, 그냥 사랑에 대한 로망 아닌가요?”

사진 : 김선아
  • 200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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