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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가득 찬 정오의 이면에는?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16)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세계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정오의 희망곡〉의 시적 어조는 다소 우울하고 다소 명랑하다. 〈정오의 희망곡〉은 한 라디오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도 그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겠다. 먼저 정오라는 시각에 주목하자. “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소음들〉) 그 오전 열한 시와 정오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대다. 정오는 밝아 오는 새 아침의 상쾌한 시작이 거덜이 나고, 사방에 빛이 넘치는 한낮에 도달하는 시각이다. 아침은 정오를 향한 전주곡이다. 정오에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오고 그림자가 가장 짧아진다. 정오는 무지몽매의 표상인 어둠을 몰아내고 마침내 도달한 무오류의 시각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니체는 말한다. “한낮,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장.” 삶은 무오류가 아니다. 따라서 정오는 무오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오류와 진리를 강요하는 잔혹한 고통의 순간이다. 정오에 이르러 하늘의 천장 한가운데 오게 된 태양은 사람들에게 그 분신인 듯 그림자를 선물한다. 그림자는 마치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오류처럼 정오가 지나면서 점점 길어진다. 하나가 둘이 되고, 그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오류성을 되새기는 정오는 그런 맥락에서 “영혼의 최저 고도”다. 그 최저 고도에 넘실거리는 “정오의 희망곡”이라니 ! “정오의 희망곡”은 희망을 정오의 시간마다 송출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그것으로 우리 삶에 내장된 무수한 실패와 오류들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명랑하고 달콤한 가짜 희망들이 라디오가 켜진 모든 곳에 전달될 때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되씹을 때다. 보라, 그 “정오의 희망곡”이 배달되는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정오의 희망곡”이 도처에 넘실거리는 바로 그 시각에도 사랑을 잃는 비극은 되풀이되고, 어디서나 줄넘기를 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줄넘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의탁했던 제 존재를 되찾으려는 기획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가짜 구원자 노릇하기다. 내가 당신의 가짜 구원자 노릇하기를 그칠 때 사랑은 깨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짜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악마이다. 이는 하루에도 열 번씩은 벌어지는 일이다.”(베르트랑 베르줄리) 아울러 사랑이란 상대방 영혼을 식민지화하기, 한없는 수동성에 빠뜨려 무단으로 전유(專有)하는 방식이다. 달콤한 애무조차도 사실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공격이며 비열한 함정이다. 애무의 본질은 “그가 나에게 던지는 시선과 자유를 포기하고 나에게 몸을 던져 오도록 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파 놓은 함정이다. 수동성으로의 초대. 욕망의 대상을 자신의 끈끈한 살에 붙여 놓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은 상대의 시선 아래에서 살지 않으려는 기도이다.”(알렝 핑켈크로트) 그런데 왜 하필 줄넘기일까? 물론 배드민턴을 치거나 역기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배드민턴은 상대가 필요하고, 역기는 너무 무겁지 않은가? 그러니 왜냐고 묻는 것은 너무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뜻이다. 시의 화자는 한사코 줄넘기를 한다. 당신이 사랑을 잃었다면 나도 언젠가는 사랑을 잃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사랑을 잃을지 몰라. 그 불행한 예감 속에서 한낮은 기울고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정말 세상은 순조롭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모든 순조로움은 그 안에 순조롭지 못함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분식(粉飾)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는다. 모든 것이 속절없이 종말의 시간을 향하여 흐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과연 불행의 예감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인생은 잔걸음으로 빠르게 인파 속으로 걸어가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와 같다. 나와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완벽하게 뒤집어진다. 전반부와는 상황이 정반대로 뒤집어지는 역전(逆轉)이 일어난다. “나는 사랑을 잃고 / 당신은 줄넘기를” 한다. 중국 도자기는 언젠가 깨지고, 잡상인은 끊임없이 닫힌 문을 두드리며, 화병의 꽃은 이내 시들기 마련이다. 한번 사랑을 잃은 자는 영원히 사랑을 잃는다. 이것이 나,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생각이다. 빛으로 차고 넘치는 정오라고 공허와 암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오는 모든 공허와 암흑을 제 이면에 가둔다. 정오의 태양은 이글거리며 모든 사물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누군가는 이빨을 닦고, 누군가는 똥을 싸고, 누군가는 동료와 잡담을 나누고, 누군가는 살인 충동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사랑을 잃고, 누군가는 줄넘기를 하고,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법안을 기안할 때, 이 그림자가 짧아지는 정오의 시각 위로 김 빠진 맥주처럼 “정오의 희망곡”이 쏟아진다. 모욕이나 욕설처럼. 삶이란 근본에서 사소한 비밀들을 지닌 채 살려는 노력이다. 냉소적인 자들은 우리가 지닌 그 사소한 비밀들을 추궁하고, 그것을 빌미로 모욕하고 처벌하겠다고 협박한다. 이 가을 아침에 나는 희미해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줄넘기를 한다. 당신의 얼굴은 표상이 아니라 내 명령을 피해, 내게 흡수되기를 거절하고 간신히 도망간 바로 그 실재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내게서 도망간 수많은 얼굴들이 내 안에서 사소한 비밀들을 배양한다. 그 얼굴들이 배양하는 사소한 비밀들을 간직한 채 나는 오늘 줄넘기를 한다.


이장욱(1968~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가 태어난 해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한다. “1968년이 오자 /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 김수영이 죽었다”(<좀비 산책>)고 쓴다. 그해 연습생 신화를 쓴 프로 야구선수 장종훈과 가수 신해철이 태어나고,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과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 2세, 그리고 헬렌 켈러가 죽었다. 그해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10월 12일에는 제19회 멕시코올림픽이 개막했다. 그해 1월에 내가 살던 동네로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피습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때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에 있었다. 그해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는데, 그해 태어난 사람 중 하나가 시인 이장욱이다. 나는 이장욱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재기발랄한 이 시인은 시에서 비평으로, 그리고 소설로 제 문학의 외연을 확장해 간다. 내가 아는 ‘이장욱’은 오로지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난 이장욱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있고, 갖가지 용의자들이 활보하고, 누군가는 복권을 사는 국가에서 태어나 “개인적인 관계로 가득”한 오늘에 불시착한다. 그는 녹색연합 회비를 자동이체로 내고, 진보정당인 민노당을 지지하고, 아이들과 자가용을 혐오한다. 기압골이 이동하고 그 이동에 따라 흐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다. 날씨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데, 그의 시에는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그는 고백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 나에게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결정>)라고. 오늘을 낯선 시선으로 전생(前生)의 날처럼 바라보는 그의 시를 읽는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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