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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다!

이진숙이 만난 화가 | 작가 정보영

정보영
1973년생 홍익대학교 회화과,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7년부터 현재까지 12여 회의 개인전, 상하이아트페어, 라인아트페어 등 세계아트페어에 참여. 2003년 대학청년비엔날레 ‘청년미술상’, 2005 송은미술대상전 미술상, 2007 문예진흥원 예술창작 및 표현활동 부문 지원대상 선정. 현재 고려대학교 회화과 강사. 전업작가.
텅 빈 공간을 가르는 조용한 빛의 흐름이 음악처럼 흐른다. 작품 은 빛이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건물 안으로 들어와 그 부드러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보인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보이지 않던 벽면의 흔적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마침내 실내의 다른 공간에 차려진 화사한 테이블이 선물처럼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그림에는 묘한 트릭이 담겨 있다. 순서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시간상으로 볼 때 세 폭의 그림은 #3, #2, #1이 제 순서이다. 그런데 그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눈은 역순으로 그림을 보게 되어 일순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순서에 따르면 빛은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고,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는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 빛은 저녁 빛이 아니라 아침의 빛으로 길게 들어왔다가 짧게 흘러가는 빛인지도 모른다.

staying #1, #2, #3 / 2006, oil, 72.7x60.6cm.
그러다 이게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그림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정보영의 그림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접점으로 형성되는 ‘지금/여기’라는 한순간의 문제가 무한한 흐름으로 해체되고 있다.

“제 작품들은 시공간과 회화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여기’라는 단일한 중심 설정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방향에서 빛이 오거나, 빛과 어두움이 현격하게 대비되는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을 그립니다. 빛의 변화는 곧 시간의 변화를 담게 되지요.”


차분하고 조용한 어투로 그녀가 드문드문 말을 잇는다. 맑은 얼굴색과 조용한 몸가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한 가지 일만을 조용히 해 온 사람 특유의 단정함과 단단함이 느껴진다. 산본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정보영은 자신의 그림만큼 정적인 사람이었다. 1년 넘게 이 아파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녀가 화가라는 것을 이웃들은 알고 있을까?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입구를 그리기도 했다. 평범한 아파트 입구가 그림의 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대상이 되었다.

certain view / 2008, oil, 227x112cm.
정보영의 작품은 쉽고 감성적인 그림들이 대세를 이루는 한국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지적인 작품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온한 그녀의 화면은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된 원근법이라는 화면 구성의 원리를 물으며 회화라는 것, 그리기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미술사가 노성두는 그녀를 “원근법이라는 형식에 대해 사유하고 해체하면서 이미지화하는 화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신비로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의 그림들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 가는 과정의 산물들이다.

another looking(우), another looking(좌) / 2007, oil, 91x116.8cm.
“이론가들은 몇 년간 연구해 답을 찾은 후 한 편의 논문이나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논의를 종결지어야 하는데, 화가는 매번 그리면서 체험하고 증명하니까 더 남는 장사 같은데요”라고 말을 건네니 여전히 조용한 웃음만이 답으로 돌아온다.


일상에 낯선 느낌이 찾아올 때 그리기 시작합니다

미술계에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패거리들이 있게 마련이다. 늘 새로운 뉴스거리와 호사가들의 입담이 넘치는 시끄러운 동네이다. 그러나 정보영은 다소곳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의 길을 걸어왔다. 1997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번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만 천착해 왔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방법이자 전유의 방법이다. 그녀가 택한 것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였다. 실제로 그녀가 자신의 전시 도록 서문에 쓰는 글들을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어느 평론가 못지않은 수준급임을 보여준다.

변형된 공간과 드라마틱한 빛의 대조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17세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의 공간에 인물들을 제거하고 무수히 많은 사과들을 그린 <벨라스케스의 아틀리에>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이야말로 회화가 가장 빛나던 시대이니, 그녀는 제대로 맥락을 짚고 있다. 그림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원근법을 넘어서기 위해 그녀는 자유로운 시선의 유희를 택했다.

bright room / 2008, oil, 194x130.3cm
그녀의 그림 속에는 거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화면 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물과 공간을 암시한다. 화가는 관람객과 마찬가지로 한 쪽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의 뒤에 펼쳐진 공간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에 비친 반대편 공간을 암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거울과 창문, 문 뒤로 가 다시 열리는 다른 공간을 보임으로써 세상의 무한함을 그려 내고, 그림이 하나의 구체적인 ‘지금/여기’를 넘어서도록 만든다. 이런 요소들은 화면에 묘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배경에 정보영이 푸른 복숭아를 그린 <상상의 질서>라는 작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still looking / 2007, oil, 130.3x194cm
“초현실주의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것은 제가 기본적으로 일상을 소재로 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이면서도 낯선 느낌이 날 때, 일상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때 그림이 시작됩니다.”

작은 브로콜리를 커다란 나무로 표현했던 작품 역시 일상을 낯선 것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러한 낯선 느낌은 원근법을 해체하는 시선의 자유에서 가능했다. 다면경에 비친 오르골 인형은 시간의 흐름과 시선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얻어진 장면이다. 고요한 화면 안, 넘어진 의자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그림의 내용을 만든다. 최근 그녀가 그리는 공간은 청주에 있는 스페이스 MOM 미술관인데, 드라마틱한 빛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조용한 행보는 이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작품이 매진되며 호평을 받았으며, 올 12월에는 ‘아트 인 아시아’에 초청받아 그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사진 : 신규철
  •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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