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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형상이 가진 색과 형태의 조합에 이끌려 그리죠

이진숙이 만난 화가 | 정수진

정수진
1969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석사 졸업. 1999년부터 3회의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티라나 비엔날레, 상하이 비즈 아트센터, 국제갤러리 등에서 국내외 주요 단체전에 참여. 현재 서울에서 전업작가로 활동 중.
정수진은 강렬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반짝거리는 유리구슬처럼 자기 안에 완결된 세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세상에 자신을 설명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작품을 구매하는 컬렉터만이 아니라 평단에서 안목 있다 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녀의 현재 위치가 그러하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계획하고 설명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홍대 앞의 바와 카페가 즐비한 골목의 한 건물 6층에 위치한 그녀의 작업실에는 그녀가 이 캔버스에서 저 캔버스로 부지런히 작업하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이야말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그녀 자신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나은 직업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프로필은 심플하다.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미국에서 유학했고, 전시를 했다. 2000년 사루비아다방에서 있었던 <뇌해 The Brain Ocean>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서 그녀는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05년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발탁되어 2006년 개인전을 가졌다.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에 곁가지로 나간 적이 없다.

그녀는 화가로서, 자기 작품의 창조자로서 화면 위에서 최고의 자유와 권력을 행사한다. 입체주의, 야수파, 다다이즘 등 20세기 초반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미술운동의 일부는 추상화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등이 새로운 시도로 그린 그림은 추상화의 원리를 정립시켰다. 추상화가 등장한 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화가들에게 더 넓은 활동의 장이 열린 셈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하면서 회화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새롭게 제기하고 해결해 왔다.

정수진의 작업 역시 이런 미술사적인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그림이다. (2007)에서는 바다가 있는 넓은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배경과 인물들의 배치에는 사실주의 회화의 기본인 원근법과 인물 간의 내적인 필연성이 고의적으로 파괴되어 있다. 인물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인물들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동일한 인물의 모습이 두 번 이상 때로는 다섯 번씩 반복된다. 어떤 인물은 한쪽 팔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화면 중앙에 붉은 가방을 들고 있는 여자의 흰색 숄이 세 번 반복해서 그려지기도 한다. 더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호두, 양파, 빵, 토끼 머리 등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 넣고 있다. 이런 것들은 그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의 재미를 누구보다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People in landscape / 2007, Oil on canvas, 150x200cm
“내가 그리는 모든 것은 색과 형의 조합으로서의 이미지다. 그 조합을 펼쳐 놓는 것이 내 작업이다. 나는 사실 형상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색과 형의 조합에 매료된다.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그녀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의 다른 옷과 동작을 가진 ‘색과 형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어떤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림 속에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들 사이에는 어떤 이야깃거리도 없으며, 인물 각각의 개성도 없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어떤 이야기를 읽어 내려는 시도는 명백한 오류라고 한다. “읽지 말고 보라”가 그의 주장이다.

Room / 2006, Oil on canvas, 92x104.5cm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2006)라는 작품의 경우 테이블 주변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인물들 간 내적인 필연성이 없다. 인물들과 음료수, 빵 등이 정성껏 그려졌다 싶지만 이 인물들의 머리 위에 뜬금없이 분홍색의 물감이 죽 흘러내린다. 정성껏 그린 그림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망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입체적인 구성과 사실적 묘사라는 구상화의 기본적인 원칙을 스스로 배신하고 비틀면서 느꼈을 작가의 쾌감이 보는 사람을 전율하게 한다. 더 나아가 죽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으로 이루어지는 추상화에의 충동을 ‘흘러내린 물감을 그리는 것’으로 대체한 것이니 이는 추상화의 원칙조차 배신한 것이다. 그림 보는 즐거움이 두 배로 쏠쏠하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그림

그는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넘어서 흥미를 끄는 요소를 그림으로 그려 나간다. 붓질 등 순수 회화적인 요소, 즉 추상적인 것을 베이스로 작업하다가 사실주의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직접적인 사실주의적 요소로 시작해서 추상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작업을 할 때도 있다.

“어떤 이미지에서 촉발된 모호한 감정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이미지가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기분 좋은 지점에서 작품은 끝난다.”

시작도 끝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녀는 전시 도록이 완성되고, 작품을 전시장에 걸고 나서까지도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웰렘 드 쿠닝이 그랬고, 미하일 브루벨이 그랬다. 자신이 어떤 조화에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치며 계속해서 그렸다.

Pink Falls / 2006, Oil on canvas, 180x200cm
이렇게 추상과 구상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들며 그림을 그리지만, 그림에는 ‘어떤 답을 가진 보편적인 체계’, ‘그림을 이루는 근본적인 구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너무도 근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림에서뿐 아니라 삶에서 그녀가 꿈꾸는 것은 완벽한 구조와 조화다.

Human in landscape / 2007, Oil on canvas, 130x160cm
“하나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제들이 동시에 해결될 수 있는, 전체적으로 평등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완성되는 그런 완벽한 구조가 있다고 믿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Dinner / 2006, Oil on canvas, 150x200cm
그녀의 작업실이 위치한 홍대 앞은 그런 완벽한 사회구조를 꿈꾸는 몽상가들에게 어울린다. 어른 키만큼 커다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방에서 넘쳐나는 빛으로 충만한 작업실에는 오는 9월 루이비통 주관으로 열리는 한국 작가 10인전에 출품할 작품들이 완성되어 있었다. 서도호, 이불, 김혜련, 함진 등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작가 10인에 선정되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전시예요?”라고 되물을 지경이다. 그림 그 외의 일은 그녀의 관심 밖인 듯하다. 유리구슬이 아무리 주변 세상을 비추어도 자신은 물들지 않듯이, 그녀에게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보다 중요한 게 없다.

사진 : 신규철
  •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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