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크섬의 비밀〉의 작가 송재정

히트 시트콤으로 세상을 웃겨 온 여자

2008년 7월 서해의 한 낙도로 회사 후원품을 전하기 위해 떠난 일일쇼핑 구매부 직원 8명. 이들이 낙도로 가기위해 탔던 애꾸선장(이외수)의 기분 나쁜 낡은 배. 그리고 끊긴 기억. 정신을 차려보니 깨질 듯 아픈 머리와 크크섬 해변 바닷물에 푹 절은 채 널브러진 동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외친 한마디, “우리 조난당했다!”

황당무계, 웃음작렬, 코믹지존 8인이 펼치는 크크섬 생존기가 시작됐다. 지난 7월 방영을 시작한 시트콤 드라마 <크크섬의 비밀>에는 어릴 적 본 〈15소년 표류기〉나 〈보물섬〉 혹은 미국 드라마 <로스트>처럼 생존을 위해 절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무인도 표류기란 없다. 대신 멀쩡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듯 ‘찌질한’ 남자들과 왈가닥 여자들의 황당함과 괴팍함이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 시트콤의 산파인 송재정 작가의 여의도 작업실을 찾아갔다. 그는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 등을 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트콤 작가. 그에게 〈크크섬의 비밀〉의 탄생에 대해 묻자 “<로스트>의 코믹 패러디”라는 답이 돌아왔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차기작을 구상하다가 〈15소년 표류기〉나 〈미래소년 코난〉 같은 무인도 이야기를 쓰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근데 요즘 무인도 이야기의 대세가 <로스트>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0대, 30대는 물론이고 10대나 40대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보자고 해서 <로스트>를 차용하게 된 거죠.”

〈로스트〉를 패러디한 만큼 처음에는 제목을 〈저스트〉로 할까 하기도 했다. ‘웃기는 게 우리 목적인데, 제목부터 웃겨야 하는 것 아니냐’ 고민하다 인터넷에서 웃기거나 재미있을 때 쓰는 표현인 ‘ㅋㅋ’가 생각났다. 그래서 별 뜻 없이 ‘크크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코믹 어드벤처 스릴러를 내세운 〈크크섬의 비밀〉이란 제목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크크=코믹, 섬=어드벤처, 비밀=스릴러’가 조합된 것이라고 한다. 송재정의 시트콤에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니 독특하다 못해 정상이 아닌 듯 보인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특이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크크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코믹 여전사로 변신한 김선경(김 부장 역), 록스타 테리우스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착하기만 하고 어리바리한 낙하산 무능지존 신성우(신 과장 역), 낙하산 신 과장을 질투하는 비굴한 아부지존이자 코믹폭탄 김광규(김 과장 역), 철없는 초딩 같은 ‘찌질이’ 꽃미남 윤상현(윤 대리 역) 등이 등장한다. 송 작가는 정작 자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들에 대해 “특이하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사람은 없다”며 “코미디를 위해 조금 과장하긴 했지만 어떤 조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 아니냐”고 한다.

“현재 크크섬에 나오는 캐릭터나 과거 작품들에 등장했던 캐릭터 모두 제 주변 사람들에게서 찾아낸 모델들입니다. 그 분들에게 ‘이 사람 모델이 당신’이라고 하면 동의하지 않겠지만요.(하하하) 웃음 코드라는 게 우리 일상과 동떨어진 데서 찾기란 어려워요. 일상적인 사람들의 모습 중 특징을 과장하고 부각시켜 웃음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게 캐릭터가 되는 거예요. 일례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 가족의 가장인 이순재가 몰래 ‘야동’을 보는 장면이 있었죠.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웃음을 폭발시키면서 ‘야동순재’라는 애칭까지 만들어 주더군요. 그런데 다 큰 성인이 몰래 ‘야동’ 보는 장면은 시트콤이 아니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거든요. 비정상적인 인물만 등장한다면 시트콤이 아니라 사이코드라마겠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의 모습에 웃음 터뜨리죠

1996년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원래 교양 프로그램을 맡았었다.

“사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어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는데 공부를 진짜 안 해서 졸업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죠. 꼴에 신문방송을 전공했다고 일은 꼭 방송국에서 하고 싶었어요.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학교 성적이나 시험과 관계없이 방송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작가밖에 없더군요. 드라마 작가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고, 남을 웃기는 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터라 예능작가도 포기했죠. 결국 남는 게 교양작가더군요.”

교양작가로 출발한 송재정이 시트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 방송국에서 알게 된 한 코미디 작가의 눈에 띄면서다.


“우연히 <아빠는 시장님>이라는 시트콤의 아이디어 작가를 할 기회가 생겼죠. 이때 처음 ‘시트콤이라는 게 나하고 젤 잘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1998년. 그는 한국 시트콤 최고의 히트작이라는 <순풍산부인과>(이하 순풍)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방송국 안에서 <순풍산부인과>를 기획한다는 말이 나왔어요. 하던 프로그램 다 접고 <순풍> 팀에 달려갔죠. <순풍>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어요. 이미 <오박사네 사람들>로 시트콤계 미다스의 손이 돼 있던 오지명 씨뿐 아니라 선우용녀, 박영규, 송혜교, 심지어 미달이까지 모두 스타가 되더군요. 덕분에 저도 떠 버렸죠.”

그녀는 <순풍>을 통해 최고의 시트콤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쓴 최고의 작품으로 주저 없이 <순풍>을 꼽는다. 그는 “<순풍>은 한국 시트콤의 원형을 만든 작품”이라며 “쓰는 것마다 히트했지만 <순풍>만큼 자연스런 웃음, 반전, 가족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순풍>에 애착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순풍>을 통해 만난 김병욱, 김영기 PD, 작가들과 최고의 시트콤 사단을 이루며 10년을 동고동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초 안에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시트콤에서 웃음 포인트를 찾는 데 귀재인 감독, 작가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작품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남을 웃기는 일엔 재능이 없다”고 표현하는 그녀. 그래서인지 그녀는 시트콤 작가라는 옷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단다.

“사실 재능이 없으면서 남을 웃기려는 건 아닌가 고민이 많아요. 요즘 10대, 20대의 웃음 코드가 뭔지 종잡기 어렵기도 하고요.”

그의 말을 들으며 무심코 둘러본 작업실. 만화책에서부터 어학과 인문ㆍ사회과학 서적, 심지어 자연과학, 여행서까지 온갖 분야의 책들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고민하며 글을 쓰는지 짐작이 갔다.

“<순풍> 이후 거의 쉬지 않고 써 온 것 같네요. 이제 진짜 제 실력이 ‘뽀록(들통)’날 것 같습니다. 그럼 너무 창피하잖아요.”(하하하)

순간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한마디 농으로 다시금 밝게 만든 ‘희극지왕(喜劇之王)’ 송재정. “웃기는 이야기를 써야 하는 사람들 가슴 한쪽엔 늘 비극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크크섬보다 먼저 비극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살다 보면 시트콤 작가도 당연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겪는데, 그때도 우린 즐겁고 웃긴 얘기로 세상을 그려야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희극적인 면 이면에 비극이 존재하죠. 희극은 지금껏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면인 비극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1998년 이후 한국 시트콤의 전형을 만들어 온 송재정. <크크섬의 비밀>이후 펼쳐질 그녀의 변신도 기대된다.●

사진 : 문지민
  •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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