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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거리에서 그림 그릴 거예요

한국과 유럽 오가며 활동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유인준, 임동주, 메이어홀츠

그래피티화에서 중요한 건 그림에서 느껴지는 포스(힘)예요.
딱 보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거나 뒤흔들어 놓거나 하는 힘이 있어야 해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은 이미지를 끌어내어 대중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
이게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인 것 같아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촌에서 고수부지 쪽으로 나가는 일명 ‘토끼굴’이라 불리는 터널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소리 없는 전쟁터다. 그중 눈길을 확 잡아끄는 그래피티화가 있다. 두 대의 버스를 배경으로 다양한 캐릭터의 인간 군상들이 ‘덤빌 테면 덤벼 봐’ 하는 표정으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는 그림. 불량해 보이지만 가만히 뜯어 보면 코믹한 색채가 더 진한 이 그림이 주는 이미지는 하도 강렬해, 한 번만 봐도 뇌리에 박힌다.

이 국적 불명, 출처 불명의 그래피티화는 ‘Seoulmates(서울메이트)’라는 그래피티 팀의 작품이다. 한국인 두 명과 독일인 한 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독일의 쾰른, 마인츠, 브라운슈바이츠,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지에 거대한 그래피티화를 남기고 다녔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팀 JNJ CREW의 유인준, 임동주 씨와 한국계 혼혈아 메이어홀츠 씨, 이들을 신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메이어홀츠 씨는 독일 방송국의 제안을 받고 며칠 전 한국에 왔다. ‘아르떼’라는 방송국에서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교류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한 것. 세 사람은 8월 중순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래피티화를 남기고, 이 장면은 독일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촬영할 예정이다.

압구정 토끼굴.
이들이 그래피티 화가로 활동할 때는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유인준 씨는 조(Joe), 임동주 씨는 제이(Jay), 크리스찬 메이어홀츠 씨는 모기(Mogi). 모기의 엄마는 파독 간호사 출신 한국인이고, 독일인 아버지는 판사다. 외할아버지가 지어 준 한국 이름은 이윤성. 2001년부터 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와 제이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정도로 잘 통한다. 이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밀리터리 룩으로 입고 나왔는데, 순전 우연이라고 한다. 세 사람의 우정이 시작된 이야기를 모기로부터 들었다. 그는 한국말을 더듬더듬 섞어 가며 영어로 말했다.

“제 몸의 절반에 한국인의 피가 흘러서인지 한국에 관심이 많아요. 외할아버지, 이모, 외삼촌이 다 한국에 계셔서 한국에 자주 오죠. 독일에서 그래피티화를 그리다가 한국에서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이 형들 작품이 제일 멋있었어요. 스타일(그래피티화의 서체)도 좋고. 형들 홈페이지를 찾아서 함께 그림을 그려 보자고 이메일 편지를 보냈죠.”


이렇게 해서 2006년, ‘서울메이트’가 결성됐다. ‘서울메이트’는 모기 씨가 제안한 이름으로 ‘서울(Seoul)’과 ‘소울(Soul)’의 뜻을 내포한 중의적인 표현이다. ‘서울에서 만난, 영혼을 교류하는 친구들’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압구정동 토끼굴에 그래피티화를 남기는 걸 시작으로 2007년 9월에는 독일로 날아가 거리의 화가가 됐다. 가슴속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밤에 뛰쳐나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모기가 사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시작해 한 달 내내 스프레이를 들고 살았다.


JNJ 크루의 그림은 개성이 강해 척 보기만 해도 이들 작품인지 알 수 있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강렬한 형상, 세련된 색감으로 완성도 높은 이들의 그림은 자유분방한 젊음의 에너지를 표현해야 하는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서태지 빅 콘서트, 브라운아이드소울 콘서트, MBC 뮤직캠프의 드렁큰타이거의 무대를 페인팅했고, 빅뱅 1집 앨범 디자인, 윤도현 밴드 6집의 로고 디자인도 해 줬다. 나이키, KT&G와 손잡고 작품 전시회도 했다. 특히 KT&G에서는 ‘편파적이고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직설적이고 때론 공격적인 생각의 표현, 그런 나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깔리는 광고의 모델로 등장해 인지도를 넓혔다.


군대에서 만난 조와 제이는 부대의 벽에 처음으로 그래피티화를 그렸다. 부대의 요청으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군인, 훈련받는 군인, 총을 겨누는 군인 등 ‘군인들’을 그렸는데, 이때 거대한 벽을 캔버스 삼는다는 매력에 빠졌다.



한독 혼혈인 메이어홀츠의 제의로 ‘서울메이트’ 결성

세 사람은 저마다 캐릭터가 있다. 조의 캐릭터는 입이 달린 창 모자를 쓰고, 스피커로 된 얼굴에 후드 티를 뒤집어쓰고 있는 악동이다. 소리를 상징하는 스피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벙어리 이미지가 풍긴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음악으로 풀어 내야 하는 조의 갑갑한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제이의 캐릭터는 악랄한 인간이다. 크고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음흉하게 웃으면서 건방진 포즈로 앉아 있는가 하면, 광기 어린 눈빛으로 술병을 들고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다. 조의 캐릭터가 깜찍하다면 제이의 캐릭터는 섬뜩하다.

“사람들은 제 캐릭터를 보고 악랄하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사랑스러워요. 디테일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을 그리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잔인한 본능이 있잖아요. 마음속에는 있지만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잔인한 형상을 이끌어냈을 때 희열을 느껴요. 낙서는 인간의 본능이에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식의 자기 고백적 낙서는 세계 공통이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은 이미지를 끌어내어 대중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 이게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인 것 같아요.”(제이)

“그래피티화에서 중요한 건 그림에서 느껴지는 포스(힘)예요. 딱 보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거나 뒤흔들어 놓거나 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이의 그림은 대단해요. 제이의 캐릭터가 잔인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잔인한 이미지라는 게 있나요? 편견의 산물이죠. 이 친구의 그림은 파괴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아요. 그림을 보세요. 가만히 앉아 있거나 담배를 피우는 식이죠.”(조)

이 친구의 내면 어디에서 저런 캐릭터가 나오는 것일까? 제이는 “해 보고 싶었으나 못 해본 것들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쳤다. 특기할 만한 사건 하나 없이 살다 어느덧 어른이 돼 버린 생. 청춘과 젊음의 특권인 일탈과 반항 한 번 없이 자신을 꾹꾹 누르며 살다 보니 분출되지 못한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7개월짜리 아들을 둔 아빠이기도 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분출 욕구가 더 커진 그의 그림은 앞으로 더더욱 포스가 강해질 것 같다.

모기의 캐릭터는 악어 옷을 입은 작은 인간이다. 악어의 이빨이 과장돼 코믹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에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작은 체구에 대한 열등감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더 크고, 더 강하게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 안에 있는 연약한 사람이 바로 모기다. 또 그는 “나는 독일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악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그의 캐릭터는 이런 내면의 표출이다.

‘모기’라는 이름은 작은 곤충 ‘모기’ 뜻 그대로다. 체구가 작은 그가 세계 2위 장신국인 독일인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생긴 별명인데 어감이 좋아 이름으로 쓴다고 했다. 엄마의 나라에 오면 남자들의 덩치가 자신과 비슷해 마음이 편하단다.

삶의 방식도, 스타일도 다른 이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셋 다 2001년에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됐고, 죽을 때까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살겠다는 것.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얼핏 상상이 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흔하다고 한다. 제이는 “할아버지가 돼서 수전증에 걸리더라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조는 “미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며 “평생 그래피티를 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기는 이렇게 말했다.


“70대가 되어서도 계속 벽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래피티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삶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요. 그래피티화는 인종과 나이, 언어의 벽을 뛰어넘은 소통 수단이에요.”

사진 : 문지민
  • 200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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