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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기의 목표는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연기파 배우 하정우

삼청동의 봄날은 따스했지만 서른 번째 생일을 막 보낸 하정우는 “목감기가 한 달째 낫지 않는다”고 지나가듯 투덜거렸다.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뜨거웠지만 하정우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철없는 짓은 않지 않겠다”며 “영화 한 편 흥행했다고 배우 인생이 좌우되는 것 아니니 냉정을 찾고 객관적이 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심드렁한 대꾸였지만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영화 〈비열한 거리〉의 주연 로버트 드 니로 얘기를 할 때는 목에 분명한 힘줄이 돋았다.

“로버트 드 니로가 편지함에 폭탄을 넣고 돌아 나오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서 보았는 줄 아세요? 열세 번이에요, 열세 번! 대단하지 않아요?”

그는 수십 번씩 되풀이해서 보며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외울 정도로 젊은 영화광이었고 명배우의 고갯짓까지 손꼽을 정도로 탐구정신이 강한 연기자였다. 그렇게 하정우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종교처럼 숭앙하고 연인처럼 사랑하며 놀이처럼 탐닉하고 있었다.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동원한 전작 〈추격자〉의 열광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만 희미한 자취를 남겼다. 〈추격자〉는 막을 내리고 있고, 전도연과 공연한 〈멋진 하루〉는 촬영을 마쳤으며 〈비스티 보이즈〉는 개봉 직전인 4월 초, 그는 〈추격자〉 팀과 푸껫에 다녀왔다. 또 다른 주연배우 김윤석과 나홍진 감독, 최문수 PD까지 각자 사비를 털어 즐긴 ‘자축여행’이었다.

“다들 수염도 깎지 않은데다 인상도 만만치 않아 보이고 배 나온 최PD까지 남자 넷이 연인이나 가족들이 많은 휴양지를 돌아다녔으니 현지 관광객들은 아마 동양의 갱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인터뷰를 위해 하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5년이었다. 스물일곱 살의 그에겐 신인배우의 패기와 뒤늦게 주목받는 자 특유의 사려 깊은 신중함이 교차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잘 알려진 대로 탤런트 김용건(62세)이다. 하정우의 본명은 김성훈으로 2002년 영화 <마들렌> 이후 2005년까지 그 이름 그대로 활동했으나 2005년 연예기획사 싸이더스HQ와 계약하면서 “배우 냄새나는 이름으로 바꾸자”는 소속사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물론 후보에 오른 몇 개의 예명 중 하나를 최종 선택한 것도 아버지였다. 하정우라는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처음 오른 영화가 〈용서받지 못한 자〉였고 이 작품 이후 승승장구했으니 ‘개명’은 성공한 셈이다.


〈추격자〉에 이어 〈비스티 보이즈〉에서 맡은 역도 말하자면 ‘인간 말종’인 셈인데, 철저하게 나쁜 인간을 연기할 때의 기분은 어떤가요?

“두 작품 모두 주로 밤에 촬영해서 현장에 있을 때 이외에는 멍한 상태가 되더라고요. 〈추격자〉는 90%가 밤 장면이었고 〈비스티 보이즈〉도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밤에 잠을 못 잔다는 게 굉장한 스트레스더라고요. 밤새 촬영하고 아침에 집에 들어간 후 오후 4~5시나 돼 일어나서 다시 현장에 가는 생활을 몇 개월씩 했죠. ‘연쇄살인범’이나 ‘호스트’의 생활 그대로였어요. 연기할 때는 그 장면에만 몰입하니까 자신의 감정상태가 어떤가, 객관적으로 잘 못 느껴요. 다만 〈추격자〉에서 지영민이라는 캐릭터는 절대 집에 가져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촬영 현장에 놓고 오려고요.”

하정우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비스티 보이즈〉에선 여성 전용 술집에서 일하는 남자 접대부(호스트)를 연기한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그는 화려한 밤의 세계에 모여든 꽃나방 같은 존재.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일삼으며 여자들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간다. 후배(윤계상 분)를 꼬드겨 호스트로 일하게 하고 자신은 그의 누나와 동거하면서 결국 둘을 파멸의 길로 몰아간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인데 그같이 악한 인간상에도 감정이입이 잘 되나요?

“그렇지 않고는 연기를 못 하죠. 저는 제가 맡은 인물을 충분히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대사 한마디 못해요. 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죠. 〈비스티 보이즈〉에서 맡은 인물은 전형적으로 ‘빈 수레’라 요란한 타입이죠. 내면에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의리 있는 척, 사랑하는 척, 달콤한 척, 자신 있는 척, 센 척. 그런데 이 인물은 어느 장면에 나오든 지루하지 않아요.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한 존재고요. 이것이 배우에게는 오히려 큰 매력과 자유를 주는 것 같아요. ”

2005년 이후 TV 드라마 2편과 영화 9편을 했는데, 흥행보다는 작품성에 초점을 맞췄고 저예산영화나 독립영화, 예술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도 꽤 되는데요. 하정우 씨 정도의 스타로 뜨면 으레 미녀 스타와의 말랑말랑한 로맨스영화나 수백억짜리 대작영화를 하던데, 그런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 불러 주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연기파 배우’의 콘셉트에 맞춘 선택인가요?

“만약 제가 연기파 배우라는 이름을 얻고자 그런 선택을 했다면 아마도 금방 ‘뽀록’(들통) 났겠죠.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이 연극배우 시절 저를 2년이나 지켜본 뒤 불러 주었던 작품이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숨〉 〈시간〉)나 뮤지컬 〈구미호〉는 소재가 워낙 신선했어요. 10년 전쯤 뉴욕에서 영어 공부하던 시절 ‘이곳에서 꼭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김진아 감독의 영화(〈두 번째 사랑〉)에서 출연 제의를 해왔어요. 저를 꼭 필요로 하는 작품이나 저를 흥분시키는 영화를 선택합니다. 저예산영화나 예술영화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중영화만 출연한다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죠. TV 드라마는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TV를 틀면 볼 수 있는 배우가 된다는 것은 중장년층 신뢰를 받는 연기자라는 뜻이거든요. 요새는 〈대장금〉이나 〈대왕세종〉 〈주몽〉 같은 사극을 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왕 역할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하하”

이제까지의 연기를 보면 힘이나 감정을 쏟아 붓기보다는 오히려 절제된 느낌이 강한데, 연쇄살인범이나 비열한 호스트 같은 인물처럼 무게가 많이 실릴 것 같은 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은‘단순하고 정확하게’ 입니다. 그 장면이나 인물이 전체에서 맡은 기능에만 맞추어 연기하려고 합니다. 딱 설명된 부분만 표현한다는 거죠. <대부>의 알 파치노를 보면서 왜 사람들이 열광할까, 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대사를 쓰는데 왜 알 파치노는 연기파 배우라는 평을 듣고 상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답은 하나더라고요.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무자비한 연쇄살인범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도 마찬가지예요. 굉장히 평이해 보이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대니얼 데이루이스를 보면 영화 전체에서 대사의 억양 패턴이 비슷한데, ‘예스’(yes)라고 말하는 부분에만 힘을 줘요. 단순함이 오히려 관객들에겐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장면이나 인물에 모든 걸 쏟아 붓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관객은 저 배우가 또 어떤 것을 보여줄까를 기대하면서 영화를 보거든요.”

<노인을…>이나 <데어…>는 최근작인데 영화를 많이 보는 것 같네요.

“집에 DVD가 800장 정도 있어요. 지난번에 미국 가서도 그동안 구하기 어려웠던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초기작을 사왔죠. 한창 DVD 가게들이 문을 닫을 때는 한꺼번에 왕창 사곤 했어요. 때로는 저 나름대로 연기를 하면서 배우에 대한 오마주(예술가나 작품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특정한 장면이나 대사 등을 인용하는 것)를 한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자면 〈추격자〉에서 망치로 피해자를 내려치는 대목에서 제 연기와 표정은 〈좋은 친구들〉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차 트렁크에 있는 피해자를 발로 가격하는 장면에 대한 오마주죠. 어지간한 영화광 아니면 잘 모를 텐데 나홍진 감독은 대번에 알아차리더라고요.”

가족들과는 잘 못 만나겠어요. 아버지는 자주 뵙나요?

“만나진 못하고 통화는 자주 해요. 얼마 전에는 1시간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지금 일산에 계시고 저는 잠원동에 살고 있는데, 내년에는 다시 합쳤으면 하세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저, 동생이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해서 두 아들을 끼고 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동생(김영훈)하고는 두 살 차이인데요, 역시 연기를 하고 있어요. 아직 영화나 드라마는 하지 않았고 연극하고 단편영화만 했는데요, 꼭 자신만의 힘으로 크게 될 친구입니다. 소속사도 저하고 달라요. 나무 액터스(김태희, 문근영 등이 소속된 연예기획사)에 있죠.”

아버지와 비교할 때 배우로서 성장속도는 누가 더 빠른가요?

“아버지께선 (당시 30대 중반인) 1980년부터 방영한 <전원일기>로 유명해지셨고 〈서울의 달〉로 인기를 누리셨으니 제가 좀 더 빠른 셈이네요. 〈비스티 보이즈〉는 영어 제목이 〈문라이트 오브 서울〉(Moonlight of Seoul)인데 〈서울의 달〉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예요. 당시 한석규, 최민식 선배의 캐릭터나 두 사람 사이 관계가 저와 윤계상이 연기하는 인물에 투영돼 있죠.”

처음 연기로 돈을 번 때를 기억하나요?

“대학 재학(중앙대 연극영화과 97학번) 중이던 1998년 ‘베스킨라빈스’ CF에 출연해 150만 원을 받은 것이 처음이죠. 장편영화는 군 복무 중이던 1999년 출연한 국군홍보영화 〈크레파스〉가 처음이에요. 이종수와 출연했는데 지금도 군에서 틀어 준다네요. 휴가비조로 30만 원쯤 받았어요.”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주목받기 전 긴 무명 시절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배우가 될 생각을 했나요?

“어릴 때부터 집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많이 놀러오셨거든요. 아버지도 배우고, 아버지의 친구도 배우니까 자연스럽게 나도 탤런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생겼죠.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수능을 망쳤어요. 한 대학 인문학부와 연극영화과를 놓고 고민했는데, 어머니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극영화과를 추천하셨어요. 연기학원에 보내주셨는데 그때 강사가 (이)범수형, 조교가 김상경 씨였죠. 수강생 중에 김강우도 있었어요. 연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일광욕을 하는 자의 망상’이라는 주제로 5분간의 극을 짜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한 것이 수강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죠. 그렇게 대학도 무난히 합격하고 뭐 자신감도 넘쳐 있었죠. 다 잘될 줄 알았는데 2학년 때 치른 방송국(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서 똑 떨어졌어요. 그때 합격했으면 송일국 씨와 같은 기수인데, 정말 자존심이 상했죠.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께 ‘군대나 보내주세요’ 했더니 정말 다음날 병무청에 가셔서 입영날짜 받아오시더군요. 제대 후엔 주로 연극 공연을 했고 영화, 드라마 오디션도 많이 봤어요. 그러다가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잠복근무〉, 드라마 〈프라하의 봄〉으로 얼굴이 알려졌죠.”

술을 즐기는 것 같은데요, 잘 마시나요?

“소주 두세 병을 마시면 딱 기분 좋고 그걸 넘어가면 취하는 정도? 〈비스티 보이즈〉를 촬영할 때도 주말이면 일주일을 결산하며 거하게 마셨죠. 요새는 고량주를 좋아해요. 〈멋진 하루〉를 촬영하면서 스태프들과 어울렸죠. 전도연 씨랑도 술을 가끔 마셨는데(전도연과는 〈프라하의 연인〉 이후 두 번째 공연이다), 결혼하더니 달라졌어요. 시간이 되면 ‘먼저 간다, 누나’ 하며 칼같이 일어서더라고요.”

아버지와 같이 출연 제안도 많이 받을 것 같은데요.

“CF가 특히 많이 들어와요. 아파트부터 밥솥광고까지, 화목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겠죠. 광고는 목돈을 벌기에는 좋지만 배우에게는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배우에게는 마이너스가 될 때가 많으니까. 아버지와 언젠가 같이하고 싶은 마음은 있죠. 연극 무대 같은 것도 좋겠어요. 아버지가 최주봉 선생님하고 친하시고 저도 최주봉 선생님 아들(탤런트 최규환)이랑 잘 아는데 그렇게 한번 같이 무대에 서도 재미있겠다, 이런 생각도 하죠.”

하정우의 다음 개봉작은 〈멋진 하루〉다.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이 메가폰을 쥔 작품으로 오랜만에 경쾌한 영화를 한 셈이다.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추격자〉와 〈비스티 보이즈〉의 밤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밝은 기운과 에너지를 되찾았다”고 말했다. 헤어진 여자친구(전도연)로부터 빌려간 돈을 당장 갚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 만에 거액의 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란다. 6월 말부터는 한일합작영화인 〈보트〉 촬영이 있다.

사진 : 이창주
  • 200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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