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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뉴요커

로버트 콜러 영문 월간지 편집장

“사진기자로서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편집장으로서 배울 게 많고,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요.
우리 잡지가 더 발전할 부분이 아직 많습니다. 이 좋은 도시를 홍보할 좋은 잡지가 있는 게 마땅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한옥이 즐비한 종로구 화동에 자리한 ‘서울셀렉션’의 로버트 콜러 편집장은 빛 고운 붉은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풍덩하게 걸쳐 입은 한복이 흰 피부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에게 “한복이 잘 어울린다”고 인사를 건네자, “옷장에 한복파케(밖에) 없어요. 열 펄(벌)도 넘어요” 한다.

주한 외국인을 위한 영문 문화 월간지 편집장을 3년째 맡고 있는 로버트 콜러 씨(35세). 그는 한국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전파하는 문화 전령사다. 늘 개량한복 차림에 카메라를 메고 팔도를 누비면서 곳곳에 숨어 있는 관광명소를 소개하는가 하면, 매주 1회 4000여 명의 주한 외국인들에게 온라인 뉴스레터도 발송한다. 또 서울셀렉션 영문 편집부장을 맡아 이곳에서 발간하는 단행본, 브로슈어, 광고 등 모든 영문 간행물을 감수한다.

“체(제) 펼명(별명)이요? 개고기를 잘 먹는다고 ‘도그 킬러’, 하얗고 뚱뚱하고 털이 많다고 ‘백곰’이에요” 하며 “헤헤헤헤” 개구쟁이처럼 웃어 대는 로버트 편집장. 한국 생활 12년째인 그는 마감이 끝나면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회식을 하고, 신년 인사 때 “새해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 사랑에 푹 빠져 있다.

스케줄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얼마나 있을까. 뉴욕 주 출신의 로버트 편집장은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국제정치에 뜻을 둔 명문대 출신의 그가 한국에 발을 붙인 건 우연이었다. 아프리카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 3학년 때 탄자니아를 다녀왔고, 졸업 후 보람 있는 일을 찾아 아프리카 평화봉사단에 가입했다. 그런데 자리가 꽉 찼다며 일 년을 기다리라고 한 것. 그때 한국이 떠올랐다 한다. 급속한 근대화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성장 모델이었다.

한국에 온 그가 처음 정착한 곳은 경북 문경시. 한국행을 결심한 그는 한국의 가장 작은 마을에서 살고 싶었고, 당시 영어강사가 필요한 도시 중 가장 작은 도시가 문경이었다. 미국 대도시에서만 살던 그의 눈에 비친 문경은 인간다움이 살아 있는 따뜻한 신세계였다. 그는 “문경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시골이 저한테 잘 맞는 것 같아요. 게을러서 그런지 자연을 좋아해서 그런지 도시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게 맞지 않았어요.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에서 사는 게 몸에 좋고, 정신에도 좋잖아요? 문경에서 살면서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 배웠습니다.”

그는 “도시에서 살았다면 한국에 이렇게 오래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3년 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 입학했고, 졸업 후 경기도 양주에서 영어 강사, 전라도 광주에 있는 광주대학교에서 영어 강사를 지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www.rj koehler.com)가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는 창이 됐다. 한국의 여행지에 대한 정보에서부터 ATM기 사용법 등 실용 정보, 따끈한 화제 기사부터 국제 정세까지 1인 잡지를 방불케 하는 그의 블로그는 주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신문사에서 기사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추천했다. 2년 후 그는 서울셀렉션으로 옮겨 편집장이 됐다. 미국 대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 그가 또다시 대도시에서 살게 된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원하는 삶과 다르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한국근대문화유산여행기 집필 중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바뀔 수 있죠. 결혼도 했으니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도시는 기회가 많고 사는 게 편합니다. 바쁘게 사는 것도 좋은 측면이 있죠. 아,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 저는 계획을 세우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살면서 기회가 오면 잡든지 놓든지 하며 하루하루 살죠. 불교에서도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잖아요? 헤헤헤헤.”

말투와 웃음은 개구지지만 답변 내용은 진지했다. 단언하는 말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케이스를 염두에 두고 분석적으로 말했다. 신중하다는 말을 많이 듣느냐고 물으니 “정치학을 배웠으니까 신중하게 말하는 게 기본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몽골인 아내는 경희대대학원에서 만났다. 아내가 미국에 가서 살자고 졸라 많이 다투었지만, “지금은 제가 잘 설득해서 조용해졌어요” 한다. 그는 지난 12년 동안 미국에 단 두 차례 방문했다. 동생 결혼식 때문에 간 하와이까지 포함해서란다. 미국에 다시 안 갈 거냐고 묻자 솔직하고도 현실적으로 답한다.

“미국에 돌아가면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한국에 오래 살아서 이제 미국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돌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요. 제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적지도 않아요. 한국에서 사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지고 있어요.”

한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한국에 온지 2년 후인 1999년부터 한복만 고집해 왔다. 한복이 왜 좋으냐고 묻자, 한국에 왔으니 당연히 한복을 입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가 한복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숨을 자연스럽게 쉴 수 있다”는 것. 이제는 답답해서 양복을 못 입겠단다. “결혼하면서 뚱뚱해졌어요. 몸 관리의 동기가 없어졌으니까요” 하면서 또 “헤헤헤헤” 웃는다.


영화배우 김혜수를 좋아한다는 그는 김혜수의 최근 영화 <타짜>와 <열한 번째 엄마>까지 다 봤다. 잡지 마감 때문에 극장에 가서 못 보고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며 “저는 절대 불법 다운로드 안 합니다. 대한민국 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려서부터 건축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시간의 숨결이 녹아 있는 한국의 오래된 건축물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그리고 그 피사체를 통해 자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오랜 역사의 흥망성쇠를 읽는다. 최근엔 한국 근대사에 관심이 많아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독파했단다. 다음 주에는 천주교 신학교도 있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들이 많은 대구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정작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 도시의 매력을 모른다”며 그는 “서울은 이상하게 살수록 좋아지는 도시”라고 말한다. 그는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고, 웬만한 서울시민보다 서울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영어로 된 한국근대문화유산여행기를 집필 중이라는 그에게 하고 싶은 게 또 있느냐고 물으니 “크(그)럼” 하면서 이렇게 답한다.

“사진기자로서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편집장으로서 배울 게 많고,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요. 우리 잡지가 더 발전할 부분이 아직 많습니다. 이 좋은 도시를 홍보할 좋은 잡지가 있는 게 마땅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는 한동안 서울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사진 : 이규열
  • 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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