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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살아난 글꼴 전성시대

편석훈 ‘윤디자인연구소’ 대표

컴퓨터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드문 시대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개성, 캐릭터를 글씨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문서를 작성하거나 미니홈피,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이메일이나 휴대전화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수많은 글씨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 글씨를 내보이기 부끄러워하던 악필도 디지털 글자체로 마음껏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 “당신이 원하는 글씨체를 고르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자신하는 남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히는 서체 디자인회사 ‘윤디자인연구소’의 편석훈 대표. 이곳에서 만드는 서체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각 기업과 관공서, 지자체, 대학들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서체를 만들어 주고, 유행에 민감하고 싫증을 잘 내는 젊은층이 그때그때 글씨체를 소비할 수 있도록 인터넷 쇼핑몰도 운영한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의 글꼴을 며칠에 한 번씩 바꾸는 소비자도 늘고 있기 때문.

윤디자인은 최근 서울시 전용서체 개발을 맡았다.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 2010’으로 선정된 서울에 아이덴티티를 부여할 글씨체를 만드는 것. 유럽의 경우 가로 공공표지나 간판의 글꼴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와있는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도시의 아이덴티티와 서체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울이 갖고 있는 고유 이미지를 서체에 담아 공공 시설물에서 공문서에 이르기까지, 인쇄용과 화면용, 모바일용으로 모두 활용한다는 계획.

‘디지털화한 글씨체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을까?’하는 선입견과 달리 편석훈 대표는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른 것처럼 무궁무진 서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윤디자인이 서체의 기본이 되는 명조체와 고딕체를 변형해 만든 ‘윤명조’, ‘윤고딕’ 등 이른바 윤서체는 1999년 이후 전자주민등록증의 전용서체로 쓰이고 있고, MBC, KBS, SBS 등 방송사와 DMB 방송의 서체도 만들었다. 요즘은 손 글씨 느낌을 살린 디지털 폰트가 인기. 모든 것이 디지털화하고 있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손 글씨 공모전’을 열어 일반인의 글씨체를 폰트로 만들었던 윤디자인은 문근영, 세븐, 현빈, 동방신기, 이효리, 이준기, 옥주현, 윤도현 등 스타들의 자필을 받아 글꼴을 만든 ‘스타 폰트’로 화제를 모았다. 그중 박한별의 글씨체가 예뻐서 인기를 모았다. 그 외에도 전각가 정병례 씨의 전각서체와 유명 서예가의 붓글씨를 칼 맛과 붓 맛까지 살려 재현하고 있다. 표준 문법에 쓰이는 글자인 2350자를 기본으로 ‘꿱’ 등 신종 글자까지 하나하나 다듬어 폰트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개월에서 1년 이상. 서체 디자인도 다른 디자인처럼 무단 도용되는 일이 많아 하나하나 특허 신청을 하고 있다. 윤디자인은 국내 최다 서체 보유 회사로 시장점유율도 1위.

윤디자인은 서울대 미대 졸업 후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온 윤영기 씨가 1989년 “컴퓨터가 일반화되면 편집 환경이 바뀔 것”을 예상해 만든 곳이다. 미국에서 타이포그래피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글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서체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한 것. 편석훈 대표가 윤디자인을 이끄는 CEO가 된 것은 2006년. 그러나 윤디자인 출범 때부터 윤영기 전 대표와 형, 동생 하는 사이로 서체 사업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 왔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편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를 차려 그래픽 디자인을 제작하다 우리나라에 매킨토시 컴퓨터가 몇 대 안 되던 시절부터 이 컴퓨터를 접하며 일찍이 전자출판에 눈을 떴다. 조판과 레이아웃, 제판 과정을 모두 컴퓨터로 처리하는 전자출판에 있어서 다양한 글꼴의 디지털 폰트는 중요한 디자인 요소. 1996년 윤디자인으로 옮겨온 그는 글꼴 판매로 윤디자인의 기록적인 매출 신장을 이끌면서 우리나라 책의 본문, 제목 서체가 다양해지는 데 물꼬를 텄다.



한글ㆍ패션 사업에도 전망 있다

서울대와 홍익대 미대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디자인계에서 그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인회사 CEO. 그래서 오해도, 시기와 질투도 많이 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향해 달렸다고 한다. 올 봄부터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할 계획. “자필 글씨체는 어떠시냐?”고 물으니 “악필”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자필보다 좋아하는 글씨체를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떤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기업의 전용서체를 개발할 때 그 기업이 보수적이냐, 젊은 감각이냐에 따라 선호하는 서체가 달라진다. 또 부드러운 서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거칠고 힘 있는 서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취향을 맞추기 위해 100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서체를 갖추고 있다는 것.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사계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서체를 개발하는가 하면, 명조체 분위기지만 부드러운 질감에 온후한 맛이 담긴 ‘풍경’체, 피아노의 건반을 연상시키는 ‘피아노’체, 예전에 쓰던 타이프라이터 글씨체를 본뜬 ‘회상’체,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들쭉날쭉 쓴 ‘청춘’체, 청아하고 우아한 느낌의 ‘아이리스’체 등 글꼴에는 각기 다른 감성과 분위기가 담겨 있다.

손으로 쓴 듯한 스크립터 스타일 서체들은 시집이나 에세이집의 부제목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문의 서체로 히트를 했다. 스크립터 스타일의 ‘쿨재즈’체의 경우 “늦여름,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시원한 음료를 마실 때의 느긋함, 도시에서 느끼는 그런 편안함이 살아나도록 만들어 보라”고 디자이너에게 제시했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집에서 항상 뭔가 그리거나 만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 ‘보는 눈’이 일찍이 발달했다고 한다. 수많은 글꼴들이 유행 따라 소비되는 시대지만, 그는 “서체의 기본이 되는 명조체와 고딕체를 어떻게 다듬어 가느냐가 영원한 숙제”라고 말한다.

“벤츠의 로고를 보면 바뀐 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십 년간 조금씩 고쳐 가며 지금에 이르렀지요. 처음과 비교해 보면 선이 샤프해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요즘 세대들이 좋아하는 서체도 많이 개발해야 하지만, 한글 서체의 정통성이 뭔지 연구하면서 계승 발전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윤디자인은 세조 5년(1459년)에 편찬한 석가 일대기인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한글 글꼴을 디지털 폰트로 만들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인 《월인석보》에 쓰인 한글은 고딕과 명조의 중간쯤인 글씨체로 소박하면서도 안정된 느낌. 안정적인 조형미에, 가독성이 뛰어나 도로 표지판의 글씨로 적당하다고 한다.

윤디자인은 최근 온라인 한글 박물관인 ‘온한글(www.onhangeul.com)’을 열었다.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져 발전해 왔는지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온라인 상의 박물관. 돈이 안 되는 이 일에 왜 그렇게 정성을 쏟느냐고 묻자, 그는 “한글과 인연을 맺은 이상 ‘돈을 벌자’가 아니라 ‘끝을 보자’는 자세로 달려든다”고 말한다. 한글이 생활 속에 더욱 친숙하게 파고들 수 있도록 한글을 응용한 패션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우선 한글을 디자인에 활용한 속옷을 선보일 계획.

“한글의 조형미가 섹시한 인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걸 부각시키는 속옷을 만들면 상품성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시장으로도 나가겠다는 생각. 그의 이리저리 튀는, 엉뚱한 상상력이 한글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인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심어 놓을 것 같다.

사진 : 신규철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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