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영 공작실’의 방혜영 스테파노 유비 부부

아내 작품에 남편 요리를 곁들인 오감 퍼포먼스

크고 작은 식당과 술집들이 복작거리는 홍대 앞. 서교호텔 뒤쪽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제법 멋을 부린 원룸 건물이 나타나고, 건물 옆구리에 숨은 듯 작은 문이 하나 보인다. 간판도 문패도 없어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바깥 풍경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난다.

33㎡가 될까 말까 한 작은 공간 입구엔 한때 혼수품으로 각광받던 자개 장식장과 화장대가 놓여 있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완구와 봉제인형, 나비 모양의 각종 기념품과 액세서리들이 가득하다. 짙은 초록색 콘크리트 벽에는 각양각색의 액자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만화경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 속으로 들어서면 독특한 모양의 긴 사각 테이블과 형형색색의 의자 10개가 눈에 들어오고, 다락으로 오르는 사다리가 보인다. 그 안쪽으로 주방이 있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하나 더 있다. 좁디좁은 공간을 작업실, 전시장, 휴게실, 레스토랑 등으로 200% 활용하고 있는 이곳이 ‘방혜영 공작실’이다.

“어서 오세요.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의자 하나 골라 앉으세요. 모두 제가 작업한 작품이에요. 여기는 작품을 오감으로 감상하는 곳입니다. 만져 보고 질감이나 촉감도 느껴 보세요. 조금 있으면 후각과 미각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 준비될 거예요. 이번 전시의 주제인 ‘비밀의 화원’ 퍼포먼스가 시작될 거니까요.”

벨벳 드레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방문객을 맞는 이가 이 공간의 주인인 방혜영 씨다. 그는 여러 번의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한국 화단에 이름을 알린 설치미술가다. 네 살 때 사업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이주,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도쿄에서 살았기에 우리말이 매끄럽지는 않다. 그런데 어눌한 그 말투에서 순수함과 진지함이 묻어난다.

“제가 언어보다는 시각 쪽 기능이 발달했나 봐요. 말보다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게 훨씬 편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힘들었습니다. 그림이 아니었으면 적응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1996년 그는 가족과 함께 귀국했고,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노끈을 꼬아 원을 그리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 흔적은 공작실 벽 여기저기에 미니멀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은 남대문시장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한동안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어요. 전업 작가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죠. 그때 아는 분의 소개로 남대문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하다 보니 점점 미술 쪽과는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하는 자각이 일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길로 시장에서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 둘과 함께 홍대 앞에 공동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술 작업을 계속해도 될지 테스트할 겸 인사동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대관은 물론 도록 제작에서부터 전시 홍보까지 모두 혼자서 해낸 말 그대로 ‘개인전’이었다.

“겁도 없이 70평 공간을 대관해 작품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돈도 많이 들었고요. 그렇게 전시회를 가졌는데도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데요.”

미술계에 그의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 후 가진 기획전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대중과 소통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럭저럭 전시 이력을 쌓아 가는 동안 작업실을 몇 번 옮겼다. 그러다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이 5년 전이다.

“친구들과 함께 새 작업실로 사용할 공간을 찾아 이곳에 왔을 때 저는 아주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공간 같았죠. 많을 때는 5명이 함께 사용하기도 했는데,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하나 둘 빠져나가고 결국 저 혼자 남았죠. 그때부터 오롯이 저만의 공간으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바깥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새기고 기억을 담았죠.”


추억의 물건들로 가득한 다락방 같은 이 공간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나비다. 나비 노리개, 나비 브로치, 나비 펜던트, 나비무늬 머그 컵 등. 그는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나비를 채집하듯 나비 문양 물건들을 모으고 있더라”고 설명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나비, 친구나 가족이 선물한 나비, 직접 제작한 나비 등. 그는 이 무수한 나비들을 여행지에 대한 기억과 선물한 이의 마음까지 날아가지 않도록 핀으로 잘 고정해 놓았다.

“자개장식장은 서울 근교 폐가에 버려진 것을 주워 온 거예요. 사람들은 물건을 버릴 때 마음까지 버리고 가죠. 그들의 삶과 손때 묻은 이야기까지 제가 수집해 온 겁니다.”

그의 어눌하고 느릿한 말투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을 즈음, 남편 스테파노 유비 씨가 외출했다 돌아왔다. 오늘의 공연을 위해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스테파노는 13년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다. 아버지가 유명한 요리사여서 어렸을 적부터 세계를 누비며 갖가지 요리를 익혔다고 한다.



전시 오프닝 때 작가와 요리사로 만나

2005년 1월 두 사람은 서울 선릉역 부근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 작가와 전시 오프닝을 준비하는 요리사로 처음 만났다. 당시 방 작가는 스테파노가 요리를 단순히 먹는 차원이 아닌 작품과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오브제로 만드는 것에 반했고, 스테파노는 방 작가의 어눌한 말투에 매력을 느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경기도 부천의 아트포럼에서 가진 방 작가의 개인전에 스테파노가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이 전시의 주제는 ‘나비’였고, 스테파노는 방 작가의 나비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꽃처럼 색감이 화려한 요리를 선보였다. 방혜영 작가와 달리 달변인 스테파노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저는 방혜영 작가의 작품에 맛과 향을 입히는 요리사일 뿐 작가는 아닙니다. 방혜영 작가가 주인공이니 저를 너무 내세우지 마십시오. 그저 오늘 진행할 퍼포먼스에 참가하게 되셨으니 편안하게 오감을 충족시키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프랑스 요리인데, 하나의 식자재로 얼마나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지 실험할 거예요.”

아내의 작품에 맞춰 요리를 만드는 스테파노 유비 씨.
10명의 참가자들이 속속 도착, 모두 자리에 앉았다. 방혜영 작가는 참가자들이 간단한 종이접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말문을 트도록 유도했다. 이어 돼지목살과 단호박, 감자와 버터 등을 주재료로 한 스테파노의 요리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단호박은 수프를 농도가 다르게 끓여 색감과 맛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먹도록 했다. 방혜영 작가는 노란 수채화 물감과 유화 물감의 차이와 같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돼지목살은 먼저 오븐에 살짝 구워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한 후 허브와 통후추, 마늘로 양념해 충분히 익힌 후 10조각으로 슬라이스했다. 육즙으로는 소스를 만들어 각자의 접시에 담아 주었다. 풍부한 육즙 때문인지 입 안에서 씹히는 살코기 맛이 돼지고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맛있었다. 여기에 버터를 섞어 으깬 감자와 방울토마토를 곁들이니 맛도 색감도 환상적이었다. 스테파노는 “껍질을 벗기느냐 안벗기느냐, 굽느냐 삶느냐에 따라 방울토마토 하나만으로도 갖가지 요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디저트로 달콤한 수플레가 나오면서 이날의 음식 퍼포먼스는 끝났다. 스테파노는 “아, 내가 방혜영 작가의 작품을 먹었구나 생각되시면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달변의 그는 천부적 감각을 지닌 요리사였다.


방혜영 작가의 종이접기와 레이스 페이퍼, 스테파노의 음식 퍼포먼스, 이케다 교코의 곰돌이 퍼포먼스 등으로 꾸민 이번 행사는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지난 10월 첫째 주 주말과 둘째 주 주말에 걸쳐 4일 동안 진행됐다.

“퍼포먼스는 끝났지만 ‘비밀의 화원’ 전시는 계속됩니다. 평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는 늘 공작실 문을 열어 놓고 있으니까요. 물론 저희 부부에게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닫습니다. 음식 손님은 저녁때 한 팀만 받는데, 미리 예약하셔야 합니다. 특별한 기념일이나 모임이 있는 분들은 전화 주세요. 정성껏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는 가격도 메뉴도 없다는 사실. 예약하는 사람이 정하란다. 삶의 쉼표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사진 : 장성용
  • 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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